드디어 대통령께서 나섰다. 학교 폭력이 그냥 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거다. 사실 학교폭력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중년 남자라면 누구나 학창시절, 변소 뒤 컴컴한 곳에서 담배를 피워물거나 또는 맞짱을 떠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더러는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돈을 뜯기거나.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방안의 코끼리`였던 학교 폭력이 세상에 드러난 건 최근 대구에서 일어난 중학생 자살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처음 그 학생의 유서를 봤을 때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본 적도 없는 그 학생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 부모의 심정을 감히 헤아려봤다. 부모님 앞에서 웃으며 거짓말하던 열네 살짜리 웃자란 소년을 생각하면 내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대통령 앞에서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어른 앞에서, 대통령 앞에서 당돌하다 싶을 만큼 솔직히 학교 폭력에 대해 털어놓는 요즘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바뀐 세상에서 오히려 정도를 더해가는 그 폭력에 몸서리쳐진다. 폭력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일러바쳐 `찌질이`로 낙인찍히면 학교 생활이 그야말로 시궁창이다. 최근 몇곳의 사례에서도 드러났듯이 섣불리 신고했다가는 더 무서운 제 2의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그걸 제도적으로 막아주지 못하면 학교 폭력은 영원히 퇴출시킬 수 없다. 대통령이 나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막 제대하고 복학해서 남자중학교에 교생실습을 갔다. 그런데 그 중학생들의 여자 교생을 대하는 태도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천진한(?) 여대생들은 도무지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생활지도담당 교사는 교생들을 불러놓고 `만만하게 보이지 말 것`을 몇 차례나 강조했다. 요즘 중학생들은 당신들 교생들이 다니던 시대의 중학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하긴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버릇 없는 젊은 것들 얘기가 있었다지 않던가.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정권 당시 경찰서를 담당할 때였다. 당시 대구중부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들어온 까까머리 고교생이 있었다. 대구의 양대 주먹조직 중 하나인 동성로파 행동대원이라 그랬다. 비록 까까머리 미성년이었지만 유치장의 나이 든 성인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조폭 행동대원이라는 녀석이 형사 앞에 앉아 조사받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했다. 저런 아이들이 무슨 폭력배라고 형사들이 잡아왔을까 싶었다. 그러나 형사가 설명해주는 지역 유흥가 상대로 공갈과 폭력을 일삼은 그의 행태는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폭력배의 그것이었다.
학교 폭력,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섰다. 우선 일선 초중고교 교사들부터 교육자들, 교육학자들, 발달·행동심리학자들, 심지어는 동물 조련사까지 나서서 어린 학생들의 폭력에 대한 대책들을 언론을 통해 내놓았다. 백가쟁명식 답안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답이란 애초 있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뭐 이런 것 아닐까. 지금은 더 이상 귀엽다며 남의 아이 고추를 만지는 사람은 없다. 이 얘기가 처음 우리 사회에 회자됐을 때 그건 뉴스였다. 그런 정도로 경찰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고 곤욕을 치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지금은 남의 아기 고추를 잡고 희롱하는 노인은 없다.
학교 폭력도 그렇다. 이젠 더 이상 “아프면서 큰다”거나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호도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진한 성적 농담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면 성희롱이 되듯 동기간 친밀의 표시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폭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불편해도 인정해야 한다. 이주호 교육부장관도 인정했다. “사소한 괴롭힘이라도 폭력이고 범죄”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물론 폭로했을 때 보복을 막아주는 장치도 보장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