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상한 일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반짝이는 물이나, 대지의 따뜻한 온기를 팔 수 있는가? 빛나는 솔 잎, 숲속의 뿌연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대기의 신선함, 이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며, 우리는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개울과 강에서 흘러가는 반짝이는 물들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추인 여러 모습들은 우리네 삶의 일들을 모두 기억해 준다. 대지위에 부드럽게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여기가 우리 홍인들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한 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고, 대지를 형제 같이 생각지도 않고, 그 곳을 정복하면 또 다른 정복을 위해 딴 곳으로 떠난다. 초원에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들을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재미로 총을 쏘아 죽인 후, 그대로 내 버려둔 것이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인간들에게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이 왔다가는 간다. 자기들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당신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들은 땅을 소유하듯,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며, 그의 사랑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께 소중한 것인 만큼 이 땅을 헤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홍인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서부 개척시절에 백인에게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보아서 좋지 않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추장에게서 우리는 깊은 사고와 넘치는 인간애, 그리고 만물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 홍인을 괴롭혔던 백인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 추장을 하나님은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가 더 선하지 않을까?
지구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는 마치 다음 상황에서 나타나는 원숭이에 비유된다. `손님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있다. 지금 인간들의 행동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비행기 조종기계를 가지고 장난치는 한 때의 원숭이와 같다. 이미 그 비행기는 시동이 걸려,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로 인간은 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지구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모든 생명의 무게는 동일하다. 사람들은 장미꽃을 좋아하고, 할미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생명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꽃 모두가, 각각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
환경훼손에 대해 외국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다. 나는 차를 몰고 다닌다.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다닐 것이다. 나의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타고 다닐 것이다`
환경 문제는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할 주제이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서두르면 `졸속`이라는 나쁜 작품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빨리 가려거든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거든 같이 가라”고 하면서 어려운 환경문제 해결에 인류 전체가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