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죽도시장行 열차를 아십니까?

윤경보기자
등록일 2011-06-23 21:08 게재일 2011-06-23 6면
스크랩버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리다는 것은 일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느림에는 그 나름의 특징이 있는 법. 남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시간표를 따라 사는 자유로움과 느긋함.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걸 주목한 것 아닐까 싶다.

이런 느림이 좋아서 일부러 무궁화호 열차를 골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열차 가운데 그런 `내맘대로 열차`는 무궁화호 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야 진짜 느린 `완행`이나 `비둘기호`가 있었지만 이제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대전 발 영시오십분~ `이라 절절히 외치던 가수 안정애의 `대전불루스`가 대변하던 서민의 애환도 이젠 무궁화호에 담겨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애써 무궁화호를 골라 타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휴일을 활용해 혼자 혹은 친구 몇몇과 단출하게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서는 직장인들, 수십년 직장생활에서 해방된 자유를 보다 느긋이 누리려는 은퇴자들도 그 대열에 섞여 있다. 그들은 대구를 출발해 부산 해운대로 향하는 노선이 얼마 후면 없어질 것이라고 해서 서둘러 타 보려 시간을 잡는다. 동대구역을 출발해 중앙선으로 달리다 강원도 태백에서 낙동정맥 큰 산줄기를 넘은 뒤 백두대간 동편 기슭을 따라 정동진을 거치고 바닷가를 달려 강릉까지 가는 무궁화호도 그런 사람들에게 인기다.

하지만 그런 어느 것 못잖게 지역민들에게 인기 있는 노선은 따로 있다. 대구와 포항을 연결하는 열차, 간혹은 `죽도시장 열차`라 불리기도 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그것이다. 드물잖게 대구 어르신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에 이 열차로 출발, 포항 죽도시장에 가 싱싱한 회로 점심식사를 한 후 바다 구경까지 하고는 저녁 무렵 대구로 돌아간다. 동해안 최대 시장이면서도 포항역에서 걸어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죽도시장에선 내친걸음 식구들이 반찬할 갖가지 말린 생선들도 골라가며 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노선은 교통비가 상대적으로 싸 부담도 적다. 동대구~포항 사이 편도 요금이 일반인은 6천600원, 노인은 4천600원이면 되는 것이다. 동부정류장 시외버스 요금 7천400원에 비해 저럼할 뿐 아니라, 특히 노인에겐 혜택이 크다. 노인들은 또 대구시내 구간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포항까지 1만원 정도면 왕래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면 저 `죽도시장 열차`의 객차 안 모습은 어떨까? 지난 18일 오전 9시 동대구역을 출발하는 무궁화호 1755열차에 올랐다. 비 오는 날이었지만 주말이어서인지 객차엔 발디딤 틈이 없었다. 열차의 김이현 여객전무는 “만약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진짜 초만원을 이뤘을 것”이라며 “연세 많은 대구 분들이 포항 죽도시장과 바다를 보러 이 열차를 자주 이용한다”고 전했다. 오전 9시 동대구역 출발 열차를 타고 포항으로 갔다가는 오후 6시15분 혹은 7시15분 포항발 대구행 반환열차를 탄다는 얘기.

열차가 서서히 동대구역 구내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구 시가지를 벗어나자 비에 젖은 들판이 창 밖으로 펼쳐진다. 열차 안에는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어르신, 대학생, 군인, 외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끌벅적했다.

경로당 친구 4명과 일행을 이뤘다는 이태수(79·대구 서구) 어르신은 “주말을 맞아 죽도시장에 회 먹으러 간다”며 “일년에 서너번 정도는 이렇게 무궁화호를 타고 포항에 바람 쐬러 간다”고 했다. 초등학교 동기생 4명과 짝을 지었다는 또 다른 승객 박병래(71·대구 남구) 어르신은 회 식사까지 겸한 나들이에 들뜨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석탄공사에서 같이 근무한 옛 직장동료와 여행을 떠나는 김진호(76·대구 수성구) 어르신도 “싱싱한 회를 먹고 바다가 보고싶어 당일치기 여행 계획을 세웠다”며 “무궁화호는 느리지만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엔 제격”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물론 `죽도시장 열차`라고 해서 회 먹으러 가는 어르신들만 타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객실에선 젊은 여성들이 외국인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영어교사인 남아공 출신 레이커(Raquer·여·23)씨는 “내일 포항해변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친구 넷과 탔다”며 “포항 해변을 달릴 생각에 벌써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직장동료 3명과 마주앉아 창밖을 구경하고 사진 찍기에 바쁜 박혜영(23·여·대구 북구)씨는 포항이 아니라 도중의 경주에 내려 캘리포니아비치로 놀러가는 중이라 했다.

동대구역을 출발한 지 20여 분만에 기차는 하양역에 도착했다. 하양역은 동대구역과 달리 젊음이 넘쳐나는 역. 경산의 여러 대학에 유학 중인 포항·경주 출신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버스터미널보다 가까운 역이 이용하기가 손쉽고 교통비도 덜 든다고 했다.

다음 도착한 영천역에선 매우 많은 승객이 내리고 더 많은 승객이 새로 탔다. 다시 출발한 열차 차창 밖으로는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마치 열차와 시합하듯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들, 다리 밑 강에서 낚시하는 어르신, 열차와 맞닿을 듯한 다리와 나무 사이를 지나 우거진 수풀… 그것만 보고 있어도 맺히고 뭉쳤던 마음의 근육들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듯했다.

열차가 포항역에 닿은 건 오전 10시52분. 시외버스보다 30~40분 더 걸렸다. 하지만 지루해 하는 승객은 없어 보였다. 각자가 제 길을 나서느라 시끌벅적했다. 주말을 맞은 대학생들은 부모님을 재회할 것이고, 외국인 아가씨들은 포항 바닷가에서 뜀뛰기 하게 될 터. 그런 중에 여러 팀을 이룬 대구의 어르신들은 느릿느릿 주변을 즐겨가며 죽도시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회가 맛있어질 점심 시간이 가까웠다.

/윤경보기자 kbyoon@kbmaeil.com

사회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