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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베스트셀러엔 베스트가 없다

등록일 2006-10-17 20:00 게재일 200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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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살로메 <소설가>

한글날이 지난주였고, 소박하나마 한 때 한글 전용 운동을 한 전력이 있던 내가 이런 품위 없는 제목을 붙이는데 대해서 용서하시길. 출판계에 때 아닌 대리번역 의혹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더 나은 제목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백만 권 이상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책 한 권이, 알려진 바와 달리 유명 아나운서가 번역한 것이 아니고 대리 번역자가 따로 있단다. 한 일간지 칼럼의 의혹이 단서가 되어 시작된 이 파문은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독자들에게는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출판사 측에서 해명자료를 부랴부랴 내놓았지만 독자들로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논란이 된 ‘마시멜로 이야기’는 내 책꽂이에도 얌전히 꽂혀있다. 아이들 책읽기 교재로 활용한 책이라 제법 많은 권수를 산 기억이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나도 일조를 한 셈이니 뒷맛이 씁쓸하다고나 할까. 교훈과 감동이라는 어린이 독서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비교적 유익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베스트셀러가 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의 목록에 이 책을 끼워두었다. 실제로, 누군가 어떤 책을 읽을까 물어올 때, 이런 종류의 책만 피하면 된다고 말해버릴 정도였다. 나는 은근히 가르치려들고,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완곡한 동의를 구하는 책들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도 의아했고, 어느 샌가 베스트셀러 상위를 달리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숫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정착할 조짐까지 보이자 내 독서관에 대해 잠시 흔들리기까지 했다. 독자로서 나는 까다로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백만 권 판매 신화의 주역은 마케팅이었는데, 그 매뉴얼은 유명인을 번역가로 내세워 독자를 미혹하는 것이었다. ‘제가 직접 번역한 책이랍니다. 당신의 교양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같은 책이죠.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우아하고 지적이며 세련되기까지 한 유명 아나운서를 번역자로 내세운 이런 마케팅은 판매부수에 분명 일정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리번역만 아니었다면 이 자체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책 안 읽기로는 세계에서 거꾸로 순번을 세는 게 빠른, 야만적인 독서율을 자랑한다는 우리네 독서시장에 이러한 마케팅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으니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출판사측에 감사패를 줘도 모자랄 판이다. 출판업이 자선사업도 아닌데 상업적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한데 실은 전문번역가에 의한 대리번역이었고(출판사측에서는 이중번역이라는 해괴한 용어를 사용했다.) 실제 번역가로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는 홍보 역할 밖에 하지 않았다니, 번역자의 이미지나 명성만 믿고 책을 산 독자들로서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힘들게 번역했을 그 노고를 생각하며 역자 사인회 (이 점도 이해가 안 된다. 필자도 아닌 역자가 사인회를 여는 나라가 있기나 한 것인지.)에 참석해서 책을 산 사람들의 실망감은 또 어찌할 것인가.

이 사태를 보면서 나는 출판사나 번역 당사자들 못지않게 독자들의 잘못도 크다고 본다. 대리번역을 일삼는 출판사의 행태도, 허영심에 물든 거짓 번역가의 소행도 결국은 독자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참에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을 꿈꾸는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 책을 보는 눈이 커지면 거짓과 과장에 물든 마케팅 때문에 분노할 독자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책이 많아 즐겁고,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절망하는 나날이다. 저마다 즐기는 책이 다양해지고, 사람마다 절망하는 작가가 다른 사회일수록 어느 한 책이 몰표로 밀리언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이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베스트셀러가 최고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 선생의 ‘삐딱선’의 미학을 신봉하는 의심 많은 나는 미심쩍게 등장하는 베스트셀러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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