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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날이면 용 부부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들려

이삼우 수필가
등록일 2007-01-15 23:26 게재일 200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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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도를 따라 동해안을 북상하다가 청하라는 맑고 푸른 고을에 이르러서 동해가 탁 트인 월포만으로 내려가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5리 쯤 가노라면 최근 천년 전 대왕고래뼈의 발굴로 소문난 방어리가 있다. 바다를 굽어보며 그 해안도로를 곧장 따라 가노라면 송라면 구역 들머리에 조사리(祖師里)라는 어촌마을이 한적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마을 이름 그 자체가 원각조사의 탄생지였던데 기인한다.




마을 어귀 곰솔림 속에 경신위천(敬神爲天)이라 쓰인 현판을 단 마을제당이 있고 거기서 빤히 보이는 언덕에 원각조사비각이 거친 해풍에 시달리며 구우정(九友亭) 비석 곁에 날렵한 모습으로 버티어 있다. 당초 순치(順治) 5년(조선 인조 26년)에 송라면 상송리 성도암에 건립했던 이 비석에는 이 고을에 태어나 일생을 마친 한 도인을 기리는 내용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어 향토사를 더듬는 이들에게 청순한 이야기를 던져준다. 조사의 휘는 마흘(摩訖) 이고 김백광의 아들이다. 해와 달과 등(燈)의 광명이 땅을 비추는 것을 받아 품안에 넣는 태몽을 꾸고 잉태하여 고려 우왕 5년(1379) 기미년(己未年) 2월 보름날에 태어났다. 이 날부터 두 7일 간 오랜 가뭄으로 메말라 있던 대지에 비가 내리니 해갈을 한 뭇 생명체들이 생기로 가득 차게 된다. 나면서부터 울지 않아 키우는데 힘들지 않았다 하며, 구전에 의하면 눈에 정기가 초롱초롱하고 세살 때 천자문을 암기하였고 11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한 신동이었다고 한다.



12세 때 아버지를 여읜 충격으로 3년간 말문을 닫고서 곧잘 깊은 명상에 잠기곤 하였는데, 어느 날 동해에 치솟는 찬란한 태양을 보고 ‘크도다! 태양의 정기여!’ 라고 외치면서 말문을 열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교에 심취하여 한 종파를 세워서 그 宗旨(종지)를 열고 주장을 하였기에 조사(祖師)로 추앙 받게 된것이다. 1459년 유월 보름날 제자들 앞에 당신 사후 130여 년 뒤에 한 반도가 온통 피로 얼룩지게 될 임란을 예언 한 연후 곧장 등신불이 되어 열반에 드니 제자들이 사리를 수습하여 상태사에 부도를 세웠다. 애써 민초를 사랑하고 보살핌은 물론이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는 서민 속에 어우러져 살면서 민초들에게 심오한 가르침을 주고 홍수며 가뭄을 예언하는 등 인근 고을에 미친 덕이 높고 커서 백리 사방에서 추앙을 받던 성인이라 전해지고 있다.



500년을 이어내린 탄생설화 기록된 역사 이외에 그의 탄생설화는 퍽 진기롭고 값지다. 때는 고려 말, 옥황상제께서는 누군가를 지상에 내려 보내어 머잖아 일어날 내란이며 외침으로 신음하게 될 선민들을 구재해야겠다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천상을 지키는 용(龍)의 외동아들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용 부부가 그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험난한 속세에 내려 보내는 것을 거절하니 옥황상제는 고심 끝에 몰래 내려 보내어 버리게 된다. 마침 이 어촌 마을에 사는 정덕(淨德)이라는 현숙한 부인의 몸을 빌려 잉태하여 음력 2월 보름날 탄생하게 된다. 한편 이 사실을 뒤늦게 사 알게 된 용 부부는 아들을 찾으려 어느 날 밤 옥황상제 몰래 이 마을 앞 바다로 하강 잠입 한다. 아들이 있는 언덕 위의 집으로 오르기 위해 해변에 널너러진 큰 바위들을 뚫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마침내 정덕부인의 집에 다다랐을 때는 이를 간파한 옥황상제의 계시로 어디론가 피해버린 후였다. 허탕을 치고 애통한 가슴으로 울부짖으며 아들을 찾던 용 부부는 그만 먼동이 트기 전에 되돌아가야하는 천상의 법칙을 어기고야 만다. 태양은 어김없이 솟구쳤고, 그래서 용 부부는 해변에서 굳어진 바위더미로 남아서 이 날에 이르도록 건너편 언덕 위에 세워진, 자기네 아들을 기리는 비석이 빤히 쳐다보이는 곳에 슬픈 사연을 간직한 채 전설의 용바위로 이어내리고 있다. 바람 거센 날이면 그들이 밤새워 뚫은 바위 구멍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마치 용부부가 “내새끼야, 오 내새끼야!” 하고 울부짖듯 하는 구슬픈 소리로 울려 퍼진다고 한다고 한다.



우리의 무지가 허물어 버린 고귀한 문화유산 십 수 년 전 이 전설의 부부용바위는 돌이킬 수 없는 수난을 당했다. 아름답던 바위더미들이 속인들의 눈에는 그냥 걸거적 거리는 돌덩이로만 비쳤음인지, 온통 콘크리트 천방으로 묻어버렸다. 그도 부족해서 어미용의 머리는 만류하는 주민들을 비웃으며 야밤 몰래 파쇠 하여 기암괴석으로 팔아먹은 것인지 행방이 묘연하고, 그리고 몸체는 형체도 없이 콘크리트로 묻어버렸다. 그 후 이 공사를 시공한 토목회사 사장은 몇 년을 더 못살고 급사하였다고 한다. 아비용은 몸체 대부분이 다 묻히고 겨우 머리와 목덜미 부위만 노출되어 간신히 연명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한 상황에 신음하면서도 자기를 찾아와 아들을 얻고자 기도드리는 민초들의 소원을 어김없이 들어주곤 한다는 것이다. 제 아들을 찾아 품고 싶던 부모 된 자로서의 한(恨)이 두고두고 인간의 득남소원(得男所願)을 들어주는 신통력으로 승화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 보름날이면 멀리 부산 이며 울진등 원근각지서 찾아와 차고 깊은 첫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곤 한다. 어쨌거나 안타까운 전설의 바위다. 이제 이 용머리를 다시 한번 뭉개면서 그 위로 해변도로를 낸다는 소문이다. 개발만능주의가 기어코 아비용의 비명 속에 불도저로 들이 밀 것을 생각하니 소름끼치는 회한을 느끼게 된다. 로렐라이 언덕 같은 귀한 문화유산 하나가 또 거덜나는 아픔이기도 하다. 주(註): 비문에 “二七日을 비가 내렸다”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사가나 학자들은 27일로 해석하고 있으나 필자는 14일로 해석하였다. 이는 흔히 세간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한 칠 두 칠로 따지는 우리 풍속에 따라 2,7일은 곧 14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삼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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