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서 인골 2구 출토<BR>국내 최초 성벽 축조과정서<BR>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흔적<BR>5세기 전후 매장 추정<BR>6세기 터번 쓴 토우 <BR>`병오년` 목간 등도 출토
신라의 왕성인 월성 서쪽 문지(門址, 문 터)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인골 2구가 발견됐다.
특히 국내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흔적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키 166㎝의 남성 유골은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웠고, 159㎝의 또 다른 유골은 옆 유골을 향해 몸을 조금 비튼 상태였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이 16일 경주 월성 발굴조사 성과설명회를 개최했다. 단연 가장 큰 관심을 끈 유물은 신라인이 제물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그 얼굴 둘레에선 나무껍질과 기다란 풀이 일부 확인됐으며 발치에서 토기 4점도 나왔다. 연구소는 나무껍질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과 토기의 형태로 판단해 매장 시점을 5세기로 추정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의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어린아이 유골이 나온 적이 있지만, 제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며 “이번에 나온 유골은 제의를 치르고 묻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려사를 보면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으려 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한다”며 “이 같은 인주(人柱) 설화가 사실로 드러난 셈”이라고 덧붙였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인골이 여러 장소에서 나왔다면 신라인이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 유골을 인신공양의 희생자라고 100% 확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신라인이 사람을 묻고 성벽을 쌓은 것을 보면 월성 건축에 매우 큰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관계도 궁금해진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성별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유골도 육안상으로는 남성일 확률이 높은 것 같다”며 “두 유골의 연령, 친족관계 여부 등은 자연 건조가 끝나고 추가 조사를 진행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이후 진행된 월성 발굴조사는 서쪽 문지의 인골 외에도 `최초``최고`(最古)의 수식어를 붙일 만한 성과가 여럿 나왔다.
특히 서북쪽 해자에서는 월성 목간 중 처음으로 육십 간지인 `병오년`(丙午年) 글자가 확인됐다. 이 목간이 지칭하는 병오년은 586년(진평왕 8년)일 가능성이 크지만 526년(법흥왕 1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작성 시점이 526년으로 밝혀진다면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진흥왕 때인 6세기 중반 추정)보다 앞서는,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목간이 된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6세기 소그드인 토우(土偶, 흙으로 빚은 사람 형상의 인형)가 출토됐다.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이란(페르시아)계 주민으로, 경주 황성동 고분군과 용강동 고분군에서도 유사한 토우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소장은 “신라 사람들이 서역의 소그드인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며 “계림로 보검, 황남대총 유리잔과 함께 신라와 서역의 교류사를 밝혀줄 귀중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을 서쪽부터 A~D지구로 나눠 서쪽의 A지구와 중앙의 C지구, A지구 북쪽의 해자에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연구소는 연내에 해자 발굴을 마치고 A지구의 남쪽 성벽을 조사할 방침이다. 이곳은 일본의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1914~1915년에 발굴했던 지역이다. 문헌에 따르면 월성은 2세기부터 신라의 왕성이었는데, 지금까지 나온 유물과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의 상한선은 4세기에 머물러 있다.
이종훈 소장은 “월성은 아직 전체를 조사하지 않았고, 성을 어떻게 축조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신중하게 조사하다 보면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경주/황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