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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멘난민을 수용하라!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부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된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주도 난민 수용거부’를 촉구하는 글이 올라온다.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사람들의 난민신청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 글은 나흘만에 16만의 동의를 얻는다. 가히 폭발적이다. 그런데 국민청원에 동의하는 분들은 예멘이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이며, 어떤 역사적인 경로를 거쳐 난민이 발생했는지 아시는지 궁금하다. 예멘은 지금 내전 중이다. 52만㎢의 땅에 2천800만 주민이 거주하는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 오만의 서쪽에 위치한다. 예멘 건너편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가 있는 아프리카다. 일찍이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예멘을 1839년부터 영국이 남북예멘으로 나누고, 남예멘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오스만제국의 1차 대전 패배로 북예멘이 1918년 독립하고, 1967년에는 남예멘이 소련의 도움을 받고 독립한다. 북예멘은 이슬람의 종교적 권위에 의지해 국가를 경영했지만, 남예멘은 소련식 사회주의 정책을 국가경영 전략으로 채택한다. 그 결과 남북예멘은 1972년과 1978년 두 차례의 내전을 겪지만, 1990년 무혈통일에 이른다. 1994년 남예멘의 연방탈퇴를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무력으로 진압한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닥치자 남북예멘은 다시 내전에 접어들게 된다. 시아파를 중핵(中核)으로 하고 미국에 적대적인 후티 반군은 수도인 사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수단, 쿠웨이트, 카타르, 모로코, 바레인과 연합군을 형성해 후티 반군과 맞서고 있다. 수니파의 총궐기에 대항해 시아파의 맹주(盟主)인 이란이 후티 반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정황(政況)으로 예멘난민이 발생한 것이다.유엔은 예멘을 세계 최대의 인도주의 위기국가로 규정했지만, 확실한 지원이나 개입이 불가능한 상태다. 난민들은 비자없이 입국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로 이동했지만, 2018년부터 말레이시아도 난민수용에 난색(難色)을 표하고, 3개월만 체류허가를 해주고 있다. 체류연장이 불가능해진 549명의 예멘난민들이 말레이시아를 경유(經由)하여 제주도에 도착한다. 제주도를 떠난 일부난민을 제외하면 제주도에 남아있는 예멘난민은 486명에 이른다.제주당국은 직접적인 물적 지원보다 어선과 양식업, 요식업 일자리 같은 취업연계로 난민을 돕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402명의 난민들이 일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예멘난민들은 지구촌 곳곳을 떠돌아야 할 운명이다. 주지(周知)하는 것처럼 유럽 각국은 아랍의 봄 이후로 중동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수용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오늘날 중동의 바둑판같은 국경획정은 1916년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시원(始原)이다. 오스만제국의 분할을 자국의 이해관계에 맞추려다보니 아프리카 지도처럼 중동지도 역시 줄자로 그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예멘의 분할과 분단과 내전의 근저에도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배가 자리한다. 남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도륙(屠戮)하고,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신음하게 만든 유럽 제국주의의 본령(本領)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미군 장교가 그은 38선으로 민족분단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도 제국주의의 희생양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7위의 수출입 대국이자 15위 이내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지금과 여기는 국민들의 피땀어린 분투노력에 힘입은 것이지만, 세계 전역의 원조와 방책도 기억해야 한다. 도움받은 기억을 되살려 이제는 도움을 주는 성숙하고 아량있는 대한민국과 그 시민으로 우뚝 서기를 희망한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6-22

기분 좋은 날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부지난 12일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기막힌 장면을 보여준 덕분이다. 북한은 유일하게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다.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했으니, 내년이면 중미수교 40주년이다. 20세기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 불린 베트남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도 1995년 미국과 수교했다. 베트남 전쟁 종결 20년 후의 일이다. 쿠바 역시 지난 2014년, 단교 53년 만에 미국과 수교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올해까지 68년 동안 북한과 미국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특히 작년에는 전쟁까지 가나 싶을 정도로 양국관계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북한이 자위(自衛) 목적으로 핵을 개발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반감이 원인이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처럼 자국의 동맹이나 우방들의 핵무기 개발은 용인하고, 적대적인 북한의 핵은 용인하려 하지 않았던 터다.더욱이 수감 중인 전직 수구 대통령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대북 적대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2016∼2017년 촛불 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함으로써 평화의 서광이 깃들기 시작한다. 불과 몇 달 전의 풍전등화같던 상황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된다.서울에서 개성까지 버스로 50분 거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영화 ‘강철비’에 등장하는 파주의 산부인과 의사는 북한 최고 지도자 이름을 모른다. 남한 최고학부를 다닌 의사가, 그것도 접경지역 파주에서 밥 벌어먹고 살아가는 지식인이 북한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도 파주가 나온다. 대낮에도 대남방송이 온종일 들려오는 파주.북한에도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2천500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잊고 산다. 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백두산 천지를 가본 사람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와 같은 식생과 기후, 언어와 음식이 마음을 따사롭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어떤 동질감과 친밀감이 느껴진다는 얘기다.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철책이 철거되어 통일이라도 될 것 같은 들뜬 마음을 지울 길 없었다. 그날 이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은 21세기 지구촌의 마지막 냉전 구도를 깨뜨리는 일대 사변이다. 북한과 미국이 회담에 임하는 동안 한반도 남단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의 선언은 단비처럼 다가온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입으로는 평화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모순의 극치다. 우리에게 장사치로만 소개된 트럼프의 왜곡된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로잡히는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지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있는가?! 일찍이 한반도가 좋은 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자처하는 수구세력의 반북-친일-친미 일변도 외교정책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 아니던가?! 미국 외교가에서 나왔다는 ‘존경할 만한 적, 경멸할 만한 우방’은 얼마나 우울하고 불쾌한가?! 역사적인 사건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현대사의 중차대한 일획(一劃)이 그어지는 시점에 살고 있다. 천운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날들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6-15

소음(騷音)에 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러시아 문학에서 신성불가침으로 수용되는 두 사람이 있다. 계관시인 푸쉬킨과 문학평론가 벨린스키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이들은 19세기의 권위를 온전하게 향수(享受)한다. 그런데 벨린스키는 별스럽게 두 가지를 싫어했다. 보드빌과 몰리에르. 양자의 공통점은 웃음과 희극이다. 니콜라이 전제(專制)와 대적(對敵)한 벨린스키였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산 아파트에 살다가 청도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는 층간소음이다. 범어동에서도 층간소음으로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청소기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불쾌와 불안과 불면을 야기(惹起)했다. 몇 차례 올라가 이야기했으나 “내 집에서 내 발로 다니고, 청소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짜증섞인 대답이 돌아왔다.경산에서는 떡을 해서 윗집을 찾아갔다. 이사왔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이내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주말이면 밤낮 가리지 않고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천장을 부술듯 울려댔다. 참다못해 올라간 내게 아이 엄마는 정색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별 걸 가지고 다 올라오시네!”한국의 어린애들이 아파트 거실에서 공을 차며 자란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아들의 발걸음을 단속하면서 소음을 경계했던 나는 그런 일반화를 처음 들었다. 어찌됐든 소음은 지속(持續)됐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 법’이라 했던가?! 나의 농촌 이주는 그렇게 촉발됐다.아침 일찍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저녁 늦게까지 석양의 그림자가 어둠과 맞서면서 농촌의 시간은 유장하게 흘러간다. 자연의 소리와 소와 닭 우는 소리 아니면 연중 사위(四圍)는 적막하다. 고요에 익숙해진 탓인지 도회지 소음은 임계점까지 온듯하다. 휴대전화로 통화내용을 행인들에게 시시콜콜 알려주는 청춘남녀부터 노년에 이르는 인간군상. 목소리라도 청아하다면 모를까, 까막까치 능가하는 째지는 소리로 주변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는 무리. 여기저기 계단을 오르내리는 슬리퍼와 하이힐과 샌들의 공격적인 딸가닥 소리. 삼삼오오 짝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박장대소와 가가대소(呵呵大笑)!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엔 트럭을 동원한 도우미와 자원 봉사자들의 목청이 대기(大氣)를 찢어버린다. 듣는 사람 하나 없건만 그들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선거 벽보 붙이고, 공보자료로 정당과 후보자의 주장을 알리면 충분하지 않은가?!베를린이나 쾰른에서 대규모 유세차량을 동원해가며 선거운동 하는 것을 본 적 없다. 국영 텔레비전을 포함한 방송과 신문 매체가 평소에 정당의 주장과 활동상황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통지한다. 시민 유권자는 그런 자료를 통해 지지 후보와 정당을 결정한다.6월 12일이면 거리와 광장과 주택가를 소음과 불면으로 채운 소음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고한 유권자들은 참아야 한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숱한 말과 공약(公約)과 후보자들과 그들의 행장(行狀)을 선전하는 도우미들의 소음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시절이다. 선거철이면 넘쳐나는 소음과 공약(空約)과 트럭이야말로 적폐 아닌가. 이런 적폐 역시 우리가 청산해야 할 과제는 아닐까.

2018-06-08

장자(莊子)와 오현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26일 속초 신흥사에서 무산당 오현 스님이 승랍 60년, 세납 87세를 일기(一期)로 입적했다. ‘벽암록’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현 스님을 모를 것이었다. 우연찮은 계기로 주워들은 ‘벽암록’이 스님의 노고를 거친 서책이었다. 주지하듯이 ‘벽암록’은 선가(禪家)의 대표적인 공안(公案) 1천700가지 가운데 100편을 골라 본칙, 수시(垂示), 송(頌)과 함께 엮은 것이다. 우리는 공안 대신 화두(話頭)라는 표현을 쓴다. ‘벽암록’에 기술된 내용은 여러 번 읽어도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現)’이 불가능하다. 까까머리 양주동은 ‘몇 어찌’라는 단문(短文)에서 ‘기하(幾何)’의 뜻을 알고자 100번 넘도록 읊조렸지만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쓴다. 읍내에 살던 수학선생을 찾아가 뜻을 얻은 소년 양주동. 그처럼 ‘벽암록’은 나같은 천학비재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격절(隔絶)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오현 스님은 ‘사족’으로 난해의 장벽을 허물어버린다.신흥사와 백담사 조실을 지낸 고승이지만 그는 시조시인이기도 했다. 2005년 ‘세계평화시인대회’ 만찬장에서 즉흥적으로 시조를 지어 낭송하여 좌중(座中)을 놀라게 한다.“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생사의 경계를 자유자재 넘나드는 호쾌한 정신과 유한한 인생살이에 대한 도저한 성찰이 공존한다. 죽음에도 즐거움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범부(凡夫)의 상념으로는 역부족이다. 더욱이 기어다니는 벌레로 스스로를 낮추면서 다음 생의 모습을 투영하는 자세는 압권이다. 누구나 꿈꾸는 극락왕생과 대치하는 구도자의 모습이 약여하다. 사람의 모습으로 왔지만, 후생에서는 숲속의 새 먹이가 되리라는 고집스러움에 묻어나는 결기가 매섭다.이럴진대 삶과 죽음을 초탈했다고 일컬어지는 장자가 떠오를 수 밖에.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인 혜시(惠施)가 위로하러 장자를 찾아온다. 뜻밖에 장자는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한다. 깜짝 놀란 혜시가 자초지종을 묻는다. 장자의 대답은 이러하다.“아내는 본디 생명도 형체도 없었다네. 그 뒤 언젠가 양기와 음기가 모여 형체가 되고 생명이 되어 생겨난 것이지. 지금 아내는 생명이 죽음으로 변한 것뿐이라네. 마치 사계절의 순환과 같다고나 할까. 아내는 태어난 곳에서 편히 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네.”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를 설파하는 장자의 목소리.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왔지만, 유는 무에서 나온 것이다.” 무에서 생겨난 아내가 유의 세계를 거쳐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감은 자연의 이치와 동일한데 무슨 슬퍼할 겨를이 있단 말인가?! 장자는 그렇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불가와 도가의 친연성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우리는 지금과 여기에 포박되어 있으면서도 다가올 날들의 성공과 영광을 기대한다. 오늘의 고통과 피로와 분노가 언젠가 천만 배 아름답고 따사롭게 보상받으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다. 우리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지금과 여기에 포박되지 아니하고 미래의 도래를 믿는 까닭은. 하되 장자와 오현 스님은 애당초 그런 기대는 눈곱만큼도 없다.누구나 오는 모습은 대동소이하되, 가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스님의 열반을 접하면서 2천300년 전 세상 버린 장자가 홀연 떠올라 일필휘지로 두 분 기린다. 평안하시기를!

2018-06-01

적과(摘果)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청도로 거처를 옮긴 후 매년 봄날 하루는 복숭아 과수원 적과로 보낸다. 옆집 농가는 칠순을 바라보는 부부가 열 살배기 손녀를 거두며 살아간다. 그들은 복숭아와 감을 기르는 과수농사에 집중하되, 쌀농사를 포함한 온갖 작물을 자급자족하는 자영농이다. 나는 첫해부터 지금까지 그이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실감날 만큼.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부는 지난 일요일 아침나절, 그들을 찾아 야트막한 야산 등성이를 오른다. 동네를 배회(徘徊)하는 들개를 쫓을 양으로 들고 간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볕이 잘 드는 중턱에 묘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언젠가 마을을 지키며 살았던 분들의 영원한 쉼터다. 그분들은 죽어서도 마을을 내려다보며 동리 주민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영면(永眠)의 축복 있기를!중턱의 한우농장을 지나 7부 능선에 이르러서야 일하는 사람들의 모양이 눈에 잡힌다. 옆집 양주(兩主)야 익히 아는 얼굴이되, 낯선 아낙 서넛이 사다리 위에서 일손을 재게 놀리고 있다. 머릿수건을 두르고 입마개를 하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낙들. 오랜 세월 적과를 해온 품새가 역력하다. 나도 사다리 하나 얻어 적과에 착수한다.4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도화(桃花)가 마을과 과수원 곳곳을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도연명이 그려냈다는 ‘도화원기’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즈음부터 마을에는 생기가 완연해진다. 봄기운이 자연과 인간의 사위(四圍)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문이다. 촌에서는 계절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벚꽃이 아니라, 도화와 더불어 오는 법이다.적과는 단순한 노동이지만 그만큼 고되기도 하다. 줄기 가득 매달려있는 작은 열매들 가운데 두어 개만 남기고 모조리 따내는 일이 적과의 본령(本領)이다. 문제는 선택이다. 어느 가지에는 어린애 주먹만한 열매가 대여섯 개 달려 있고, 어떤 가지에는 부실한 녀석들로 만원이다. 인간세상의 불공정과 불평등이 자연계에도 어김없이 베풀어져 있는 셈이다.적과를 하거나, 전지(剪枝)할 때면 나는 언제나 독재자를 떠올린다. 완전한 수동자세로 나의 손가락이나 가위에 전신을 내맡기고 침묵하는 열매와 가지들. 살리고 죽이는 일, 자르고 남기는 것이 오직 나의 순간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전지가위를 들고 다니다보면 모든 대상이 잘려야 할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여기서 독재가 나온다.잠시 숨 돌리고 올려다본 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가까운 곳에서 뻐꾸기 울음소리 크게 들린다. 장끼가 까투리 부르는 소리도 장단을 맞춘다. 당당하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자태마저 어여쁘다. 간간이 들려오는 물소리는 바람이 몰려와서 데려가는 참나무 이파리들의 아우성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춘산(春山)의 아련한 향기가 추억을 소환한다.“점심 하러 가입시더!” 하는 안주인의 목소리 들린다. 그이들을 태우고 경운기가 여유롭게 앞장선다. 서둘 이유도 없어 게으른 걸음걸이로 뒤를 따른다. 길가에 하얗게 피어난 찔레꽃이 내년을 기약하듯 나긋나긋하게 꽃잎 떨군다. 농장의 송아지들이 낯선 길손을 궁금한 눈길로 응시하고, 어미들은 누군가 하며 경계하는 낯빛이 완연하다.길가 양옆에 심어진 고구마 어린순도 우쑥하고, 마늘과 상추도 생장(生長)에 여념 없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내 누옥(陋屋)의 붉은색 지붕이 오히려 정겹다. 뒷집 멍멍이는 오늘따라 침묵하고, 단아하게 피어난 데이지가 나를 반긴다. 성가시게 짖어대던 옆집 누렁이마저 새삼 자세 낮춘다. 봄날이 물처럼 흘러간다. 하염없이 봄날이 간다, 들뜬 꿈도 없이!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5-25

68혁명 50주년에 부쳐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마지막 황제’ 등으로 친숙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2003)이란 영화가 있다. 68혁명의 소용돌이가 휘감고 있는 파리를 찾아온 미국 대학생이 경험하는 혁명과 사랑을 담고 있다. 스무 살 청춘들의 육신과 영혼을 통해 지난 세기의 위대한 사건을 추억하는 ‘몽상가들’. 에바 그린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영화였지만 불과 4만의 한국관객을 불러모으고 조용히 사라진 ‘몽상가들’.수많은 사회학자, 정치학자,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영감과 두뇌를 자극했던 68혁명. 기성세대의 속물근성과 탐욕, 부패와 타락을 비웃으며 “상상력에게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68혁명.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강타하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68의 물결은 급기야 태평양까지 돌파한다. 1969년에 결성된 일본 적군파와 전공투를 기억한다. 예일대 석좌교수인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유럽적 보편주의’에서 사회과학의 혼란과 부진의 시원(始原)을 68혁명에서 찾는다. 혁명의 발발원인과 경과, 그것이 실현하고자 했던 목표지점마저 온전히 해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학의 득세와 인문학의 정체, 사회과학의 무기력증이 21세기의 지배적인 흐름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추세의 원년을 68에서 보고 있는 월러스틴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 세 학문의 통합을 주장하기도 한다.각설하고,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프랑스와 도이칠란트의 위대한 대학교육과 무상교육은 68혁명의 결과 가운데 하나다. 정치적인 후각과 활동성에서 첨단을 달리는 프랑스의 선택은 소르본느를 포함한 파리의 모든 대학을 숫자로 표기하는 것이었다. 특권의식과 엘리트 교육에 반대했던 당대 20대의 열혈투쟁이 야기한 대학서열 철폐!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위계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질서와 담론을 창출해낸 20대의 혈기방장과 미래기획!68혁명은 좁디좁은 현해탄을 건너지 못하고 일본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김신조로 대표되는 1·21사태와 실미도 부대로 알려진 684부대 창설, 그리고 ‘1968년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과 3선개헌 준비 등으로 한반도 남단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우리에게 68혁명은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였다. 그러다가 불쑥 닥쳐온 80년 서울의 봄과 87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어쩌면 그것은 68혁명의 아련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혁명은 언제나 세상과 역사의 혈관을 맹렬하게 뛰게 한다. 혁명은 답답하게 막혀있던 혈로를 뚫어줌으로써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혁명의 근원은 언제나 청춘이었다.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 혹은 문화 권력을 탐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청춘은 불의하고 부당하며 폭력적인 기성질서를 대번에 전복시킨다. 그들의 불타는 눈동자와 탄탄한 육신과 목울대의 팽팽한 긴장은 신질서의 태동을 예비한다. 혁명이 없는 세상과 역사는 좀스럽다. 혁명의 약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청춘은 이미 푹 늙어버린 젊음에 지나지 않는다. 20대 얼굴과 육신에 80대의 영혼과 무기력이 꼴사납게 얹혀 있는 형상이다. 2018년 시점에서 한국의 청춘은 우울하다. 미래기획과 야망이 사라진 자리를 일자 걱정과 최저임금과 학점이 대신한다. 전면전을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외라는 허망한 희망을 붙들고 있다.장미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5월. 눈보다 희고 피보다 붉고 창천(蒼天)보다 푸르른 5월. 해마다 그 5월을 매메한 최루탄으로 보내야 했던 인간 암모나이트. 그 시절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나마 치욕과 자의식으로 숱한 밤을 지새운 청춘들의 머리에 어느새 무서리가 내렸다. 그렇게 세월이 세상이 관계가 추억이 하나둘 멀어져간다. 그러하되 5월이 오면 언제나 68과 나의 지나가 버린 5월들이 아릿한 추억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 5월이여!

2018-05-18

200살 마르크스가 보는 세상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5월 5일 어린이날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가 세상에 태어난 지 20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근대세계를 움직여온 거인으로 우리는 마르크스를 빼지 않는다. 호사가들은 지난 3세기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 마르크스의 ‘자본’(1867),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1929) 세 권을 거명한다. 여기에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을 덧붙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에스파냐 사회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세 나라로 영국, 프랑스, 도이칠란트를 거명한다. 영국의 산업혁명, 프랑스의 정치혁명, 도이칠란트의 정신혁명으로 현대세계의 근간(根幹)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촌이라 부르는 글로벌 시대를 되뇌게 된 데에는 이들 세 나라의 성과가 근저에 자리한다. 만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 나라를 꼽으라면 여러분은 어디를 거명하시겠는가?!각설하고, 마르크스가 대면한 19세기 유럽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횡행하는 불평등의 시공간이었다. 내다팔 것이라고는 육신 하나밖에 없는 임노동자의 삶은 신산(辛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대표저작은 ‘자본과 임노동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를 잉여가치의 관점으로 풀어낸 역작으로 수용된다. 근대유럽이 세계에 선물한 두 가지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라면, 마르크스는 21세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궁금하다.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인 1988년 봄, 석탄연기 자욱한 알렉산더 광장에서 거대한 동상과 대면한 일이 있다. 앉아 있는 이는 마르크스였고, 서 있는 사람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였다. 헝가리를 필두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사회주의 첨단을 달린다는 동도이칠란트까지 흔들리던 시점에 만난 그들. 무표정한 얼굴의 두 사람에게 지금 심정이 어떠한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끝내 말이 없었다.동도이칠란트 전역에서 ‘탈주자’들이 줄을 잇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을 다시 찾는다. 동상에는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도이칠란트는 분단 45년 만에 재통일된다. “하필이면 우리나라 개천절에 통일될 게 무어람” 하는 볼멘소리를 기억한다.1867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자본’이 성황리에 발매된 곳은 러시아였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이자, 가장 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 제정 러시아에서 1870년 번역-출간된 ‘자본’은 불과 1주일 만에 초판 2천부가 매진된다. 베라 자수리치 (1851∼1919) 같은 여성 혁명가의 뒤를 이은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과 레온 트로츠키(1879∼1940)가 사회주의 10월 혁명을 완수한 1917년은 ‘자본’ 출간 50년이 흐른 뒤였다.그러하되 우리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의 몰락 및 자본주의 회귀현상을 목도했다.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가 서둘러 도입한 신자유주의가 세계전역을 강타하고 그 여파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대체재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으며, ‘사민주의’라도 감지덕지(感之德之)라는 심정으로 일상을 영위한다.오늘날에도 자본과 임노동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는 의구하게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과 한진 같은 재벌의 행악질이 언론을 장식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이럴진대 눈감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5-11

진보와 보수

▲ 김규종경북대 교수 노문학부작년에 ‘문학과 영화 그리고 나’를 수강한 사회대 학생이 어느 날 내가 왜 진보인지, 묻는다. 내가 진보야, 하고 되물었다. 그렇지 않은가요, 하는 되물음이 돌아온다. 글쎄, 상대적인 개념 아닐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질문의 고갱이는 나이든 축은 보수로 회귀한다는데, 왜 당신은 그 나이 되도록 진보를 고수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진보와 보수의 경계는 모호하여 명확한 선을 긋기 어렵다. 평가대상에 따라 천양지차가 가능한 것이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분법이다. 예컨대 나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용어에 반대한다. ‘노동절’이라는 표현이 좋다. ‘근로’가 오래전부터 통용되었다는 사실도 나를 위로하지 못한다. 외려 일제강점기의 ‘근로정신대’와 ‘근로보국대’ 같은 용어가 생각난다. 여기에 박정희 철권통치시기에 만들어진 ‘근로자의 날’에 대한 거부감이 덧대진 탓이다.방송보도에 따르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5월 1일은 ‘노동절’로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독재가 횡행했던 1950년대에도 ‘노동절’은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그러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3년에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대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67년까지는 ‘노동절’이 더 많이 통용되었다 한다. 요약하자면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고, 684부대를 만들면서 이른바 ‘3선 개헌’을 준비하던 1968년부터 ‘근로자의 날’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나는 ‘노동절’에 찬성하지만 교수노조에는 가입하지 않는다. 교수가 지식 노동자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노조를 만들어 활동해야 한다는 당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조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천부인권을 실현하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교수처럼 사회·경제적 신분이 안정된 자들이 노조를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소회(所懷)가 내게는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판단은 오롯이 나의 주관적인 기준이다. 언젠가 이런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 여기라는 시공간에서 나의 판단은 그러하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개념이 뒤섞인다. 노동절을 선호하는 진보의 입장과 교수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보수의 입장이 혼재한다. 아마도 이런 혼융과 혼재양상은 세상사 모든 일에 적용 가능하리라 믿는다. 따라서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은 사태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지도 모른다.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죽을 때까지 나는 진보의 편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 이유는 보수라 함은 지키고 또 지키겠다는 것인데, 내게는 지킬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야. 돈도 명예도 사랑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두 번째 이유는 삶이란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아가고 다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죽음이 찾아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존재이유를 찾아서 전진하고 또 전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 아니겠니?!”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설왕설래가 차고 넘친다. 나는 회담 당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반도가 아닌 섬에 갇혀 산 지 70년 세월! 그 세월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민족사의 새로운 명운이 다가서는 환희의 술잔을 비우고 또 비운 게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와 새로운 시대가 끔찍하게 싫은 모양이다. 지금과 여기에 만족하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제자리걸음하면서 지키고 또 지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돌궐의 건국자 돈유곡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그가 살아남을 것이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5쪽)

2018-05-03

암모나이트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암모나이트는 고생대 데본기에서 중생대 백악기 사이에 생존했던 두족류(頭足類) 생물이다. 백악기가 1억4천400만년부터 6천600만년 사이이고, 데본기는 4억1천600만년부터 3억5천920만년까지의 기간이다. 암모나이트는 최장 3억5천만년 생존했던 기록을 가진 고생물이다. 오래 전에 멸종한 암모나이트 얘기를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요즘 학생들은 나처럼 늙은 사람을 암모나이트라 부른다. 범접은커녕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나이 먹은 인간이라는 뜻의 호칭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나를 ‘틀딱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를 일이다. 뒷담화 자리에서 ‘틀딱충’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든 세대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틀딱충’은 매우 모욕적이다. 이런 은어는 한국사회가 중증(重症)의 세대갈등을 경험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각설하고, 나는 ‘원화’와 ‘환화’를 모두 본 세대의 사람이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환을 원으로 바꾸면서 화폐가치를 10대 1로 절하해 10환이 1원이 된 것이다. 경제혼란과 경제침체만을 야기한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그 결과 1960년대에는 환과 원이 상당기간 공존하게 된다. 하나의 화폐에 두 개의 표기가 병기된 이상야릇한 현상을 어린 시절 경험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나는 서울역에서 동대문까지 다녔던 전차(電車)를 타본 세대다. 1899년부터 시작하여 1968년까지 운행된 서울의 전차.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윤동주 시인의 산문 ‘시는 종이요, 종은 시다’는 글도 ‘서강벌’과 동대문 사이를 왕복하던 전차에서 발상한 것이다. 올해가 2018년이니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지 반백년 세월이 흘렀다. 호롱불 아래서 책을 보았고, 보리밥과 늙은 오이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린 날의 사건은 놀라운 것이다. 열 살 되던 해 1월 매서운 추위가 감돌던 점심나절. 길을 가던 나는 20대 청년이 열려진 대문으로 어느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는 빨랫줄에 널린 붉은색 스웨터를 움켜잡더니 냅다 거리로 달려 나간다. 잠시 후 ‘도둑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나고, 청년은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붙들린다. 그의 눈에는 평온과 고요가 맴돌았다.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 어린 나이였지만 왜 그런 표정일까, 짐작해본다. 그는 뜻한 바를 성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 가면 옷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었으니 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20대 장정(壯丁)이 축내는 식사량은 결코 작지 않을 터. 입 하나 덜 요량으로 백주대낮에 도둑질을 감행한 것이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공허한 눈길과 맥없는 걸음걸이로 일관한 청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조카들은 먹음에 충실한지요?!”하는 인사말로 시작되던 외삼촌 안부편지는 그 시절의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입증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고 말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별똥별을 헤아리고, 반딧불을 잡아서 호박꽃 대궁에 넣어 플래시 삼아 뛰어놀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새삼 그때가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세태격변은 경악스러울 때도 있다.10억 준다면 감옥살이 1년은 견디겠다는 대학생이 51%에 이른다는 세태가 그렇다. 돈이 인격과 교양을 대신하고, 돈이 무한 ‘갑질’을 가능하게 하고, 돈이 능력으로 환원되는 세상. 그런 세상 살면서 암모나이트 소리 들어도 지나온 시공간이 아쉽지 않다. 봄날의 불장난과 초여름의 아련한 아카시아의 향기와 단풍잎 찾아다니던 가을의 서정과 눈 내리는 밤길 홀로 걷던 청년시절이 외려 그리운 게다. 그래서일까, 내가 암모나이트라 불리는 것은?

2018-04-27

새우냐 돌고래냐?!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강자들이 싸우는 통에 약자가 중간에 끼어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1885년 천진조약을 체결한다. 그것은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고종은 ‘민자영’의 척족세력 우두머리 민영휘의 조언을 받아들여 청나라 ‘원세개’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보다 먼저 경복궁에 입성한 일본군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켜 8월 초에 아산, 공주, 성환 등지에서 청군을 격파한다. 여세를 몰아 9월 중순 평양에서 청군을 패퇴시킨 일본군은 조선내정에 깊이 개입한다. 자주적인 통치능력과 기반을 상실한 조선왕조는 동학농민군을 비적(匪賊)으로 규정하고 외국군대를 들여와 척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0만여 농민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우금치 싸움은 오늘도 인구에 회자된다.조선을 둘러싼 양대 세력인 청과 일본 사이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았던 동학 민초들의 비애가 아프게 다가온다. 호사가들에 따르면 한반도는 역사 이후 대륙과 섬으로부터 900여 차례의 외침을 겪었다 한다. 고구려와 수당전쟁, 몽골침략과 고려의 항쟁,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기억하시라. 임란과 을사늑약,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도 잊어서는 아니 될 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우리는 대륙과 섬으로부터 끝없는 침탈을 받아왔다. 그래서 자연스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17일 ‘사이버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는 한국사를 왜곡하는 외국의 사례를 시정하는 작업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반크는 ‘아시아소사이어티’나 컬럼비아 대학교 등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한국을 ‘중국과 일본, 러시아 같은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 묘사하고 있어서 이것을 바로잡는 동시에 긍정적인 한국사를 알려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들 세 나라에 미국을 더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이른바 4대 강국이 제 모습을 갖추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한반도의 정치-경제적인 지형과 2018년 한반도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명-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했던 조선왕조와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세계 15위 내외에 포진한 경제 강국이자, 문화와 정보통신으로 세계인의 입길에 오르는 나라. 분단을 둘러싼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상생을 열어가려는 국민과 정부의 노력이 진행되는 나라. 재벌로 대표되는 부도덕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려는 열망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역동적인 대한민국.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만 모른다. 우리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라, 최소한 돌고래 수준이라는 것을!” 그것은 장구한 세월 대륙과 섬으로부터 잦은 외침과 수탈을 일상적으로 겪어온 비운(悲運)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온 천형(天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되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인식과 자괴감을 던져버려야 한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큰 나라 눈치 보는 관습은 패대기칠 때도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성립된 신생국 가운데 정치적인 민주화와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유일무이한 국가의 국민으로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다. 데모랍시고 성조기 흔들며 굽실거리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수치심이 그토록 역겨운 것은. 돌고래 수준의 정치제도와 실행절차, 자부심 넘치는 역사의식과 미래기획이 한반도에 넘실거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것이 위대한 4·19 혁명 58주년을 맞이한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2018-04-20

어느 청년의 죽음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4월 8일 세종시의 고교 3년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경위는 단출하다. 1월 초하루 친구와 함께 담배 네 갑을 훔친 죄로 그는 경찰조사를 받는다. 경찰은 특수절도 혐의로 그를 3월 16일 기소의견과 함께 검찰로 넘긴다. 그 후 4월 5일 가정법원의 출석통지서가 그에게 송달된다. 극심한 심적 부담을 느낀 고교생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 세상과 작별한다. 1만8천원 어치 담배를 훔친 죄과(罪過)로 18세 청년이 세상을 등진 것이다.경찰은 그를 조사하고 검찰에 송치할 때까지 부모를 비롯한 보호자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범죄수사규칙’ 211조 ‘보호자와의 연락’에 따르면, ‘경찰관은 소년 피의자에 대한 출석요구나 조사의 경우 소년의 보호자나 그를 대신할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나아가 경찰은 소년범죄자 수사의 경우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학교전담경찰관’과의 연계 매뉴얼도 준수하지 않았다고 한다.죽은 고교생의 아버지가 언론사에 전한 나이 어린 고인(故人)의 번민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한 번의 실수로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죄송해 괴로웠다.” 호기심이든 일시적인 만용(蠻勇)이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더욱이 당사자가 범죄경력이 전무한 고등학생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경미범죄 심사위원회’ 제도다. 그가 이런 제도를 알았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경미범죄 심사위원회’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대개는 전과(前過)가 없는 범법자를 대상으로 처벌 감경여부를 심의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판 장발장 구하기’로 불리기도 한다. 장발장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1862)의 주인공으로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19년의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이 제도는 2015년 3월 23일부터 10월 30일까지 시범적으로 운영됐다. 그 기간 동안 전국 17개의 경찰서가 시범대상으로 선정돼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경찰관 3명과 외부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됐으며 위원장은 경찰서장이 맡았다. 시범운영 기간에 600여 명의 사람이 감형 받았다고 전한다. 경찰청은 2016년부터 ‘경미범죄 심사위원회’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라 밝혔다.18세 청소년이 어느 날 범죄자가 되어 경찰조사를 받고, 급기야 검찰로 송치됨으로써 법원의 호출장을 받는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단순한 장난이었든 유치한 영웅심이었든 간에 순간의 실수로 범죄자 낙인이 찍히는 지경에 이른 고교생의 절박한 심경(心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부모와 담임교사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주변 몇몇 친구들에게나마 겨우 속내를 털어놓아야 했던 18세 청년의 심사가 자못 아프게 다가온다.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청년을 몰고 간 것은 우리 사회의 낙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절도죄로 고교생을 경찰에 신고하는 주인, 조사를 실행하면서 부모나 담임교사에게 일체 연락하지 않은 경찰관, 친구의 고통을 듣기만 했던 동급생들. 담배 네 갑과 죽음을 맞바꾸기에는 인생이 너무 안타깝다. 생때같은 자식을 느닷없이 잃어버린 부모의 흉중에는 어떤 상념이 차고 넘쳤을까, 헤아리기 어렵다.증평에서 자살한 지 두 달도 넘어서야 발견된 모녀의 시신은 우리를 더욱 절망으로 인도한다. 우울증 때문이든 빚 독촉 탓이든 세상과 완전 격리된 채 끝내 죽음과 대면해야 했을 모녀의 처절한 끄트머리가 처연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말하는 것보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보듬는 세상과 나라를 희망한다.

2018-04-13

봄날에 봄을 보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며칠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지속되더니 찬바람 불고 비가 뿌린다. 벚꽃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공중제비를 돈다. 몇몇 녀석은 차창에 온몸을 부딪치고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다. 미끄러지듯 포도(鋪道) 위로 산화(散華)하는 꽃잎을 보면서 봄날이 이울고 있음을 안다. 봄의 전령이 어디 벚꽃뿐이랴?! 산수유와 매화, 진달래와 개나리, 박태기와 살구, 명자나무도 봄날의 환희를 노래한다. 봄의 함의는 `보는` 것에 있는 듯하다. 단조롭고 칙칙한 겨울의 색이 화사하고 다채로운 색깔로 탈바꿈하는 계절이 봄이기 때문이다. 신록으로 몸단장하는 활엽수를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 연초록 새순이 진초록 침엽수와 빛나는 대비를 만들어낸다. 장년의 색깔과 유년과 소년의 색깔이 만나서 이뤄지는 대비만큼 현저(顯著)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봄이 올라치면 나는 은행나무 이파리를 들여다보곤 한다. 어린 녀석들의 작은 손바닥이 서너 갈래로 쪼개져 나오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미래를 대비하는 현재의 꼴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파리. 물론 그 안에는 다른 의미도 내포돼 있다. 그것은 엄동설한을 이겨낸 자의 빛나는 자부심이다. 울안에 한 뼘 남짓한 어린 은행나무가 자란다. 언젠가 던져진 열매에서 제풀에 싹이 터서 자라는 녀석이다. 거기 달린 단 하나의 눈.모질게 추웠던 지난겨울을 찬란하게 견딘 키 작은 은행나무를 보면서 생의 환희와 약동을 느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더불어 화사함을 뽐내는 꽃잔디와 민들레, 제비꽃과 머위꽃의 합창은 밤을 낮처럼 환하게 한다. 우리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높게 빛나는 꽃을 예찬한다. 그러하되 발치에서 자라나고 피어나는 작고 여린 것들의 몸짓에는 태무심하다. 크고 우뚝하며 장쾌한 것들에 이끌리는 인심이야 인지상정일 것이다.연극이 끝난 뒤 무대인사와 마주할 때 맨 처음 등장하는 이는 으레 단역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배역을 맡은 이들로부터 시작해 조연을 거쳐 마침내 주연배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쯤이면 극장 안에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 나온다. 그럴 법하다. 공연을 인도한 주역에게 최대의 갈채를 보냄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만들어낸 격언은 이러하다. “단역 없이 조연 없고, 조연 없이 주역 없다!”누구나 주연을 바란다. 최소한 조연이라도 꿈꾸며 사는 것이 인생사다.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허다한 사연과 만남과 인연 속에서 우리는 숱한 단역과 희미한 조연에 만족해야 한다. 주역이 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평생 단 한 번 꿈같은 사랑을 경험한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에게 사랑과 인생의 주역은 부여되지 않았다.아주 희소하고 스치듯 찾아오는 놀라운 환희의 순간이 이번 봄비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하되 우리를 들뜨게 했던 초목들의 향연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꽃이 꽃으로 멈춰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조화(造花)라 부른다. 그것이 생화인 한에서 꽃은 죽어야 한다. 말라 비틀어져 시들고 바람에 날려 대지로 돌아가야 꽃은 생장을 거듭할 기회를 가진다. `한 알의 밀알`에 대한 비유는 거기서 나왔다.곳곳에서 우리는 봄날의 정령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있다. 작고 여린 것들에도 따뜻한 눈길을 던져보는 것도 봄을 완상(玩賞)하는 방법이리라. 사위(四圍)가 일리온의 축제의 밤처럼 환한 시절에 봄날의 뜻을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서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 외려 크게 들린다.

2018-04-06

춘곤증

▲ 배개화 단국대 교수월요일 출근하니 교정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평년보다 기온이 8도 정도 높아서 갑자기 꽃봉오리들이 열린 것이다. 분홍색 꽃들이 가지마다 뭉게뭉게 피어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분홍색 꽃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다보니 춘곤증도 날아가는 것 같다. 요즘 필자가 춘곤증을 앓는 이유는 지난 학기보다 수업이 한 강좌 늘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수업을 하나 더 하는데, 이 수업의 준비와 강의를 하러 가는 일들이 필자를 좀 지치게 한다. 일요일에는 수업준비를 해야 하고 월요일에는 오전에 천안캠퍼스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죽전캠퍼스에서 강의를 한다. 직접 운전을 하지 않고 학교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필자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5명인데 다들 늦깎이 학생들이다. 석사생 1명과 박사생 4명이 수업을 듣고 있는데, 석사생 한 명을 빼고는 모두 필자보다 나이가 많다. 석사생도 30살이라 그렇게 젊지는 않지만 이들 중에는 제일 어리기 때문에 반장을 맡고 있다. 다른 분들은 모두 50대인데, 40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왔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에 들어와 공부를 하고 있다. 참고로 이분들은 모두 여성들이다.매주, 주교재의 한 장과 소논문 두 편을 읽고 토론하는데 주로 필자의 강의로 진행이 된다. 현재 수업은 소설론 수업인데,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한 명을 빼고는 대학 학부를 국문과를 나오지 않았고 전공도 다들 시(詩)이기 때문에 토론보다는 강의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교재의 내용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이 논문 두 개를 요약해 온 것을 읽으면 그 내용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해준다.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그것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준다.개강 전에 대학원 세미나에서 이 분들 중 몇 분을 만나서 함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한 분은 현재 활동 중인 시인이라고 하는데,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 분의 말로는 자신은 사람들과 만나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일만으로는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다른 한 사람은 공부에 매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 분은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쳤는데, 전공이 국문학이 아니다보니 한계를 느껴서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다 보니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박사과정에도 진학했다고 한다. 가끔 일 때문에 필자가 전화를 하면 전화를 잘 받지 않는데, 나중에 도서관에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고 문자가 온다. 요즘은 학부 학위를 받는 방법도 다양한 듯하다. 필자의 가장 어린 학생은 원래 생활음악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를 하고, 나중에 평생교육원에서 대학교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대학 평생교육원이냐고 물으니, 정부에서 하는 평생교육원이라 어느 대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답한다. 요즘은 언론에서 평생교육원에서도 대학교 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가 그것인 듯하다. 필자의 학생들을 보면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 논란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요즘은 많이 드물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대학 정원을 축소하는 분위기이고, 그와 함께 신규 교수 임용도 위축된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대학교수나 전문 연구자를 목표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부 졸업생들이 많이 준 것이다. 더구나 사회 전체가 인문학이 돈 벌이가 안 되는 학문이라고 천시하다 보니 이쪽은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사회전체의 지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 좀 더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8-04-04

제주 4·3사건과 국가폭력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다음 달 3일은 제주 4·3사건 70돌 되는 날이다.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4·3사건의 불씨는 1947년 3월 1일로 소급된다. 그날 3·1절 기념대회 참가자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로당은 경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제주도 직장의 95%에 이르는 민관 총파업이 일어난다. 미군정은 경찰에 반대하는 남로당을 격파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단원들을 대거 제주도로 급파한다. 불과 1개월 만에 검속으로 500여 명이 체포되고, 1년 사이에 파업 주모자 2천500여 명이 구금되기에 이른다. 체포와 구금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제주도민들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폭발직전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러다가 4월 3일 제주도 중산간 오름 지역에서 봉홧불이 불타오르고 무장봉기가 시작된다.2000년 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의 시기를 경찰의 발포가 있었던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6개월로 잡고 있다. 우리가 제주 4·3사건을 말할 때 그것은 이 시기에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 전체도민의 11%에 이르는 2만5천~3만의 제주주민이 학살당한 사건을 일컫는다.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은 4·3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해 금기시했으며, `문민정부`를 주장한 김영삼 정권 역시 다르지 않은 궤적(軌跡)을 걷는다. 그러다가 1998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제주 4·3사건 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4·3사건의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제주 4·3사건의 개략적인 내용이다.해방공간의 극렬한 좌우대립 이후 남북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곧 이어 6·25 한국동란이 발생한다. 전쟁을 전후로 한 시점에 이승만은 제주 4·3사건 이외에도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 등을 일으켜 근면하게 자국민을 살육(殺戮)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가지는 가공(可恐)할 공권력을 동원하여 수십만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자를 혹자(或者)는 여전히 국부(國父)로 숭상하고 있다. 참혹하고 또 참혹한 4·3의 살육현장을 확인하면서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아아, 나의 조국이여, 제주여!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국을 위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무고한 민간인을 처참하게 학살한 조르바는 오그레에게 말한다. “조국이 어디든 우리 모두는 한 형제예요.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전쟁에 가담해 적국의 시민을 학살한 조르바의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었으나 통렬하기 그지없다. 모든 인간은 조국보다 우선한다. 조국을 내세우며 민간인 학살을 강제하는 정부와 권력자는 죄악이다.올해는 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세대 남짓한 세월,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되 21세기 광명천지에서 국가와 정부, 권력자를 위한 민간인 학살은 반드시 종식(終熄)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그마한 시대정신 하나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2018-03-30

위안부 아베 베트남 문재인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문재인 대통령이 22일부터 공식적인 해외순방에 나섰다. 오는 24일까지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고 쩐 다이 꽝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24일부터 27일까지는 아랍 에미리트를 방문해 모하메드 왕세제와 미래성장 분야의 협력방안을 논의한다. 국가수반이 정상외교를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국제적인 위상을 고양하는 일은 그의 고유한 업무 가운데 하나다. 그것을 간명하게 함축하는 용어가 `정상외교`다.이미 한국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은 4월 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5월 안에 열릴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5월 초로 예정된 한중일 정상회담 등을 마련함으로써 한국외교의 금자탑을 쌓아올리고 있다. 일찍이 없던 한국외교의 위대한 성취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반도의 명운을 움켜쥔 당사자가 미-일-중-러 4대강국이 아니라, 한반도 거주민이라는 `당사자주의`를 확립한 의미심장한 성취이기 때문이다.이런 과정에서 나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초기의 의구심과 미심쩍음을 내던져버렸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대북송금에 관한 특별검사제를 수용했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때문이다. 사적인 이해관계나 정파적인 목적이 아닌, 민족내부의 고도의 통치행위마저 정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안타까움과 우울함이 깊이 자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각설하고,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방문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20세기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명명된 베트남전쟁은 그들의 통일전쟁이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욕망 때문에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것이 1964년의 일이었다. 한국은 군사적-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파병한다.1965년 10월 9일 청룡부대와 10월 22일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한다. 그리하여 1973년 3월 한국군 전투부대의 완전철수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34만에 이르는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5천의 한국군이 죽고, 2만여 고엽제 환자를 낳은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은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기록된다.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를 포함한 다수의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한국군은 5만여 베트남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음이 드러났다.박정희가 내세운 `조국근대화`를 위해 한국의 숱한 청춘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목숨을 잃고, 무고한 수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 언젠가 하노이에서 다낭까지 5박 6일 동안 베트남의 전쟁과 역사박물관을 순방한 적이 있다. 영어로 시작된 자막이 도이치어나 프랑스어가 아니라, 즉시 한국어로 울려 퍼지는 베트남의 전쟁 역사박물관.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들이 통일전쟁의 희생제물이 되었는지를 웅변하는 현장에서 차마 목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우리는 아베 같은 일본 정치 지도자들에게 종군위안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그들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만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아베와 그 추종자들은 전임 박근혜 정권과 그 하수인들과 불가역적인 해결방안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정신이 온전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합의안 아니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입장은 앞으로 더욱 강고해질 것으로 보인다.이젠 우리 차례다. 경제성장과 돈벌이를 위해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된 한국군의 만행을 베트남 국민들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당한 배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아베와 일본 정객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여, 보았는가?! 우리의 사죄와 배상을 그대들은 똑바로 확인했는가!”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요청한다. “베트남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십시오!”

2018-03-23

습근평(習近平)과 진시황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교수지난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찬성 2천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로 통과됐다. 1978년 이래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걸어온 중국은 1인 통치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1982년 헌법 개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책을 제외한 모든 직책의 중임제한을 명문화했다.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문화혁명이 가져온 궤멸적인 타격을 우려하여 집단지도체제와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못박아온 셈이다.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지속된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에서는 수천만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이 발생한다. 제2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강령을 채택하여 중국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세계경제대국 2위인 영국을 15년 안에 추월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된 대약진운동. 하지만 중공업 우선정책과 거대수력 및 관개사업은 농업생산성과 생산량 하락을 야기하여 주민들의 대기근으로 이어진 것이다.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실각의 위기에 몰리자 1966년 이른바 `문화혁명` 구호를 내걸고 최고권력 장악과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한다. 우리는 10년 동안 진행된 문화혁명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뿌리 깊이 중국 인민들의 삶과 영혼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알고 있다. 1976년 모택동 사망이후 이른바 4인방 척결과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당시까지와 전혀 다른 노선을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1982년 헌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이다.이번에 습근평의 개헌을 보면서 진시황과 10월 유신의 박정희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소회일까! 장장 550년이나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딛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최초의 통일왕조를 개창한다. 그가 통일대업에서 활용한 방책은 법가(法家)였다. 제자백가 백가쟁명 시기에 후진국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인도했던 상군(商君)의 법가책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었다. 거기서 비롯한 것이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과 철학의 억압과 숙정이다.의약, 점복 (占卜), 농업을 제외한 서책을 불살라버리고, 황제를 비판하는 유생(儒生)들은 산 채로 묻어버린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제국을 수립하고 도량형과 문자생활을 통일한 시황의 업적은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취한 극단적인 1인 통치와 무자비한 숙청은 진나라의 단명(短命)을 예비했다고 생각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인 반대파를 수용하지 못하는 협량(狹量)으로 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 아닌가.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찬성률에서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았던 박정희를 떠올린다. 문맹이거나 대단히 소극적인 저항자 한둘 정도의 예외만을 인정했던 지독한 독재자 박정희가 습근평과 겹쳐진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헌법에는 `국가감찰위원회` 설치안이 들어있다. 중국주석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감찰과 사찰, 구금과 투옥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절대적인 권력의 절대적인 부패는 필연의 결과다. 독선과 아집은 종당에 그것을 주창하고 실행한 개인과 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귀착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역사다. 전지(剪枝)가위를 들고 정원을 맴돌다보면 함부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십상이다. 찬찬히 살피고 재삼재사 숙고하여 어디를 얼마나 자를 것인지 재단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가위질을 하기 쉽다는 얘기다. 독재는 문자 그대로 홀로 가위질을 해댄다는 의미다. 두려운 노릇이다.2050년 세계최강을 꿈꾸는 중국몽의 선구자 습근평의 앞날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14억 인구대국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노자 말처럼 `생선을 뒤집듯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 1인의 손에 너무 많은 살상도구가 주어진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습근평이 진시황의 불행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

2018-03-16

남북대화와 아베총리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통령 특사일행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오는 4월 말경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두 손을 맞잡는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분단이후 남한 땅을 밟게 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 이후 남북관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기다리던 좋은 징조(徵兆)다. 지난 연말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 사이에 오갔던 가시 돋친 설전(舌戰)이 생각난다.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시커멓게 뒤덮였던 한반도에 대화와 소통, 평화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유지해왔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전통적인 외교전술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고 있는 듯하다. 남한을 고립시키면서 미국과 교통하려는 그들의 저의는 지난 세월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외려 북한의 대내외적인 고립양상이 심화한 형국이었다.돌이켜보면 1990년 한국과 러시아,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우리나라의 경제와 외교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과 일본, 유럽 일변도로 이루어지던 대외수출의 다변화와 함께 변화된 세계정세의 일익(一翼)을 우리가 담당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일컬어지는 한러-한중수교는 한반도 남단(南端)에 머물러있던 한국인의 좁은 시야를 일거(一擧)에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일대 전환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하지만 북한은 우리가 누렸던 정치적-경제적-외교적 이익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로 이어지는 외교관계에 우리가 무리 없이 안착(安着)한 반면, 북한은 한국과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동맹관계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방정책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교통한 정도로 만일 북한이 일본과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생각해본다. 수백만 인민이 아사(餓死)했다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흥미로운 점은 남과 북의 화해와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조야(日本朝野)가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적인 대북압박과 통제로 북한의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복안에는 북한을 빌미로 한 군사대국화의 야심이 숨어있다. 북한이 지속적인 핵실험이나 도발을 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처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을 탈바꿈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원대한 숙원(宿願)이었다.일본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대륙을 향한 야망을 불태운 집념의 나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은 661년부터 663년 8월까지 약 5만에 이르는 정병(精兵)을 백제에 파견한다.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도와 금강하구 부근에서 당나라 군대와 벌인 접전을 `백강전투`라 부른다.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한 번 한반도를 향한 야욕(野慾)의 불길을 당긴다. 7년의 전란이 가져온 폐해는 그야말로 막심했다.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거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들이 식민지배(植民支配)를 일삼던 동안 한반도에서 자행(恣行)한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2차 대전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의 명운(命運)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대치하고 있다.아베와 일본정부가 한국과 북한의 화해와 대화에 찬물을 끼얹고 헤살 놓으려는 데에는 자국의 외교적 목표와 국가주의 전략이 내재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잔칫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본과 아베의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 평화를 굳게 다져나갈 때다.

2018-03-09

붕괴(崩壞)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얼마 전에 친구가 눈 덮인 두툼한 얼음장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가는 14초짜리 동영상을 보내왔다. 동장군(冬將軍)의 기세가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시각기호로 전달한 게다. 몹시 추웠던 지난겨울의 위세도 자연의 운항법칙에 따른 순차성에 물러나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산야(山野) 곳곳에서 얼음장이 깨지고, 그 아래로 맑은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봄은 그렇게 굉음(轟音)과 더불어 온다.나라 곳곳에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반도 시공간을 옥죄고 있던 시대의 거악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대단하다. 국정농단의 주범들에게 중형이 선고되고, 하수인들도 줄지어 징역형에 처해지고 있다. 지난 세기 60,70년대의 마지막 잔재가 무너져 내린다. 그들과 동고동락(同苦同)했던 정치 모리배들이 여전히 행악질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또한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신상(新商)이 비싼 법이다.80,90년대부터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우상(偶像)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처절하게 붕괴하고 있다. 87항쟁의 결과 우리가 누려왔던 87체제 30년의 의도하지 않았던 눅눅한 자리가 누추하고 언짢은 모습으로 민낯을 드러낸다. 적잖게 나이 먹은 나 역시 그런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역겨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절감하는 붕괴의 시간대가 천천히 흐르고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누군가 견디기 어려운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고개 숙여야 한다.돌이켜보면 해방공간 이후 정부수립과 한국동란, 4·19 혁명과 5·16 군사반란, 5·18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도 우리는 68혁명 같은 근본적인 사회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6~2017년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70년 누적된 `적폐`를 쓸어내기 시작한다. 두 세대가 넘는 장구한 세월 축적된 패악(悖惡)과 오욕(汚辱)의 더껑이들은 몹시 두텁고 검질기며 전방위적으로 한국사회를 짓눌러왔다. 그래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우리를 짓눌러왔던 무법, 불법, 초법, 탈법, 위법적인 행악질의 본산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리는 봄의 초입이다. 모든 붕괴하는 것에는 시대의 잔영이 남아있기 마련. 그것은 광포한 국가주의 내지 극우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사법권력의 비호를 받아 명맥을 유지하는 재벌총수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살찌우는 문학과 예술의 `프랑켄슈타인`으로도 현현(顯現)한다. 하지만 붕괴에는 건설의 강고한 에너지가 동시에 잠재해있다. 무엇인가 견고하고 강력하며 끈질긴 세력과 집단이 무너져 내린다면, 혹은 그것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을 대체할 청신(淸新)하고 청량한 신진세력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것들의 퇴장과 붕괴가 없다면 새로운 것들의 등장과 건설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다. 우리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견디기 어려운 매서운 추위와 한파를 동반하는 겨울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따뜻하고 온유(溫柔)한 봄을 맞을 수 없다. 사계절의 순항법칙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왔다. 춘하추동이 되풀이되면서 우리에게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한겨울의 맹추위 속에서 매화와 산수유의 개화를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버린다. 굳게 얼어붙은 얼음장 아래로 청수(淸水)가 흐르고 있음을 망각한다.세상의 모든 것이 와장창 소리 내며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다. 낡고 허망하며 어처구니없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하나처럼 붕괴하고 있다. 나의 죄악과 허물도 무너지는 것들과 더불어 낱낱이 붕괴했으면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 간절하다. 무겁고 어둑한 하늘이 봄을 최촉(催促)하는 비를 몰고 오실 모양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미증유의 위대한 변곡점(變曲點)이 우리와 함께 있다!

2018-03-02

기하를 환원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2월 19일 교육부 주최 공청회에서 발표된 `2021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출제범위(안)`에 따르면 이과학생들이 치르는 수학 `가형`에서 `기하`가 빠져 있다. 이에 국내 기초과학계를 대표하는 단체 가운데 하나인 `대한수학회`는 수능 출제범위에 `기하`를 반드시 포함할 것을 교육부에 촉구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간명하고 실용적이다.“이공계 진학 희망자에게 기하는 필수기초 교과목이며, 인공지능과 3차원 프린팅, 자율주행자동차,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등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신기술 개발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핵심 분야다. 이공계 기초과목인 수학에서 기하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看過)하여 미래 이공계 인력의 기초실력 배양과 역량강화를 위한 노력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수학에서 기하를 배제함은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마저 불용(不容)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피타고라스 이후 서양철학과 수학에서 기하학은 지식과 교양의 첫 번째 교과목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이외에도 기하학의 대가인 유클리드와 천동설의 이론적 완성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려져 있다. 고전 그리스 시대에 철학과 수학은 한 몸으로 세상과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현현했다.어디 그뿐인가. 중세유럽 대학은 문법, 수사, 변증의 트리비움(Trivium)과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의 크드리움(Quadrium)을 필수적인 교양 교과목으로 삼았다. 전자의 인문교양과 후자의 자연교양을 습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학, 철학 등의 전문영역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들 양자 (兩者) 일곱 교과목을 이른바 `자유 7학예 Sept Ars Liberaux`라 불렀다. 오늘날 인문학의 영어표기 `Liberal arts`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지리상의 발견과 계몽주의, 산업혁명과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는 과정에서도 기하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고도로 발전한 자연과학과 그것에 기초한 공학의 성장은 기하학에 힘입은 바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기초과학이 취약한 대한민국에서 이번에 기하를 수능에서 제외한다면 우리는 더욱 뒤처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한자와 한문을 모르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의 문장 해득능력이 나날이 추락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도 확인한다. 기하도 배우지 않고 대학에 들어와 다시 기하학을 공부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언젠가 자칭(自稱) 국보 양주동 선생의 글 `몇 어찌`를 읽고 소리 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형이 학교에서 받아온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인 듯하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던 선생이 읍내로 신학문을 익히러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전혀 새로운 과목과 만나게 된다. `기하(幾何)`다. 대체 이것이 무슨 과목일까, 곰곰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봐도 그 의미마저 생소하게 다가온 `기하`라는 교과목.선생은 어릴 적부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現)`을 금과옥조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읽고 또 새겨도 그 의미가 끝내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다 못해 선생은 한밤중에 읍내로 수학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의 물음이 흥미롭다.“선생님, 대체 `몇 어찌`가 뭡니까?!”몇 기, 어찌 하로 음과 뜻을 풀면서 질문했던 까까머리 땅꼬마 양주동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홍소(哄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에서 근대학문을 정립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기하의 의미를 고전 한자에서 찾아내려 했던 한학소년 양주동. 그렇게 우리에게 기하는 어렵고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제 다시 그런 희극적인 일화(逸話)가 벌어지지 않기 바란다. 대학은 모름지기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2018-02-23

무술년 원단의 소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요즘처럼 추위가 맹위를 떨친 일이 있었나 돌아본다. 어렸을 적 난방이 온전치 않아 윗목에 놓아둔 아버지 자리끼가 아침에 꽁꽁 얼었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2월 초에 있던 졸업식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이겨낸 일도 생각난다. 전시(戰時)도 아닌데 군사정권은 졸업식과 입학식을 운동장에서 하도록 강요했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어린것들의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장외행사를 강제했던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칼끝이 떠오른다.작년에 기상청은 “올겨울은 대체로 포근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태인가?! 슈퍼컴퓨터가 없어서 오보(誤報)가 잦다고 변명해댄 것은 귀엽기라도 했는데, 요즘엔 아예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주구장창 `북극한파타령`이다. 아린 바람이 살갗을 할퀴는 한파(寒波)에도 폐지와 공병을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음 주 오늘이 설날인데, 그이들은 뜨끈한 떡국이라도 한 그릇 드실 수 있으려나?!서민들의 가슴을 잘 벼려진 칼날로 썰어내는 판결이 나왔다. 36억 넘는 뇌물을 청와대에 상납했는데 집행유예로 범죄자를 석방한 것이다. 5천900만원 뇌물에 징역 1년 실형(實刑)을 살고 있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려는가?! 60배도 넘게 돈을 찔러주었는데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어느 일간지 만평(漫評)이 비수처럼 흉중을 찔러온다. 찬바람 속을 걸어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리로 맵짠 설한풍이 칼날처럼 불어온다.하기야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는 고사성어가 있기는 하다. 당나라 사람으로 하남 부윤을 지내던 장연상이란 자가 있었다. 고관대작들과 연루(連累)된 사건을 처리하던 와중에 그는 10만 냥의 거금을 받고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한다. 훗날 어떤 부하가 그 사건처리의 내막을 궁금해 하자 장연상은 “그렇게 많은 돈이면 귀신과도 통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돈이 인간의 전부인 시대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88 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8일 발생한 `지강헌 사건`을 기억한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지강헌과 미결수 11명이 집단으로 탈주한 다음 9일 동안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다. 그때 지강헌이 만들어낸 사자성어가 지금도 백주대로를 활보(闊步)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 없으면 죄가 있고, 돈 있으면 죄가 없다는 말이다. 지강헌은 말한다.“돈 없고 권력 없이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우리 법이 이렇다.“ (출처: 법원 이야기,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이야기), 오호택 지음, 살림, 2011. 한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설 명절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희대의 판결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문전성시라 한다. 21세기 광속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눅눅한 잔영과 대면한다. 나라 전체가 적폐청산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판국에 법원은 마냥 뒷걸음질이다. 최소한의 법리적 검토와 양심적 판단이 법관의 기본적인 자질 아닌가. 마녀사냥식의 인민재판이라는 방패막이로 사안을 호도하기엔 너무 멀리 나갔다.내 어린 시절 설날이 오면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뱃돈 받아 주머니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그걸로 무엇을 할까, 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코 흘리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관계가 세워지고 허물어지면서 나이를 먹는다. 육십갑자 한 바퀴가 꽉 차게 돌도록 세상 살면서 이런저런 지은 죄를 돌아보면 새삼 먹먹하다.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가슴 시리게 생각한다.2018년 무술년 원단을 맞으며 한국사회의 본원적인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일대 전환기의 초입에 서있다. 곧 우수(雨水)가 다가오리니!

2018-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