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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문정민 에듀아이엠 대표“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 줄 아니?”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면이다. 어린 왕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한다.“글쎄,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어린 왕자의 생각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얼마나 바쁜가? 지혜로운 사막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그래, 네 말도 맞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뜻밖의 답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회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싶은 이유 중 첫 번째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싫어질 때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함께 하는 기간이 길면 괜찮을까?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힘들다. 무조건 상대방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맞춰주면 다 될 것 같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도달한다.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좋다고 하지만 그것은 더 힘든 일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대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일이다. 영국 육상 대표였던 데릭 레드먼드는 400m 달리기 종목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트랙을 질주하던 선수들 사이에 갑자기 한 선수가 주저앉았다. 데릭 레드먼드였다. 150m쯤 다다랐을 때 갑자기 다리 힘줄이 끊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고통 속에서 레드먼드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진행 요원과 의료진이 만류했지만, 레드먼드는 한 발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관중석에서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레드먼드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울고 있는 아들에게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레드먼드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레이먼드는 더 큰 부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경기 결과는 이미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모든 불운에도 그는 뛰고 싶었다. 비록 메달을 딸 수 없지만, 이 순간을 위해 애쓴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아들의 마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부축하며 말한다.“그래, 같이 뛰자!”아버지는 결승선까지 완주하도록 도왔다. 어깨동무하며 골인하는 그들에게 모든 관중이 일어서 박수를 보냈다.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친한 친구를 생각해 보자. 나에게 정답을 가르치고 강요하려는 친구보다, 내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친구에게 마음이 열린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마음을 얻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스스로 현재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 상태도 잘 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잘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얻는 사람은 나 자신을 잘 돌보며 살아간다. 내가 잘한 일과 못 한 일, 그 모든 일이 합해 나라는 사실을 안다. 자신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수용한다. 그래서 자신을 받아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 경험에 비추어 남도 실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며 무시하지 않는다.얼마 남지 않은 2019년, 정신없이 사느라 놓쳤던 부분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이런저런 일로 웃고 울기도 했다. 기대했던 만큼 잘 풀리지 않은 일도 있지만, 뜻밖의 소식에 기쁘기도 했다.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사람 덕분에 힘이 나기도 한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고마운 이름을 떠올려 본다. 열 손가락으로 부족하다. 괜히 부끄럽고 미안하다. 어쩌면 내 상처만 기억하느라 고마운 사람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연락해야겠다. 내게 사랑과 이해를 가르쳐 준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나를 더 아끼고 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기온이 뚝 떨어져 바람이 차다.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겨울밤이다.

2019-12-08

2019년, 내 삶의 키워드

정현아 간호사찬 바람 부는 이 계절이면 커다란 양철통, 길쭉한 서랍 속 줄줄이 늘어선 고구마 생각이 난다. 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꾹 찔러보던 군고구마. 퇴근길 아버지가 들고 온 군고구마 냄새는 당신보다 먼저 집안을 가득 채웠다.해마다 12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롭게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이 계절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딱 한 달 남은 2019년, 나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올해를 시작하며 세운 계획은 잘 실천했을까? 요가와 헬스장을 끊었지만 결국 제대로 실천 못 하고 유효기한을 넘겨버렸다. ‘라푼젤’ 영화를 자막 없이 보며 공부하겠다는 야심 찬 영어 공부 계획도 라푼젤이 태어난 시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멈춰 있다. 올해 읽을 책은 70권이라고 자신 있게 썼던 독서계획은 반도 채우지 못했다. 여행을 비롯 몇몇 소소한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다이어리 속에 머물러 있다.이뤄낸 목표도 있다. 아픈데 없이 건강하고 좋은 분들과 함께 쌓아온 추억으로 올해는 유난히 풍성한 시간이었다. 딸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충실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일은 한 해 동안 ‘나다움’ 찾는 여정을 시작한 점이다.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던 내가 ‘나다움’을 찾고자 노력한 시간은 2019년 내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38년을 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가슴 뛰는지 모른 채 살았고 어떤 선택에도 ‘아무거나, 다 괜찮아!’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해야 하는 줄 알았다.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색깔도 정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 취향에 나를 맞추며 살았다. 이랬던 나와 올해는 기어코 결별하고 싶었다. 이제는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나다움을 찾는데 도움받은 경험을 소개한다.첫째는 글쓰기다. ‘생각학교ASK’에 입학해 ‘어떻게 살 것인가?’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묵은 감정을 토해내고 엉켜버린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해 내놓을 수 있었다. 글쓰기 시간은 상처 입은 나를 보살펴주는 치유의 시간이었다.둘째는 차 마시기다. 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르는 동작을 수행하고 있노라면 잠잠히 나와 마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차의 깊고 따스한 향을 몸 전체로 스미게 해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곤 했다. 찻잔이 비워지면서 내 존재도 비워지고 가벼워지는 순간을 만났다.셋째 명상이다. 아침, 저녁 10분 명상으로 마치 세수를 하는 것처럼 매일 나를 오염시키는 감정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집중하면 투명하고 맑아지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챙기는 과정을 통해 나는 ‘지금(now) 여기(here)’에 존재함을 깨닫는다.넷째는 시 필사와 낭송이다. 처음에는 저질 문장력을 어떻게 고칠까 고민하며 시 구절을 쓰면서 좋은 문장을 익히려고 필사와 낭송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시를 늘 접하니 일상에 쌓이는 감정 찌꺼기가 자연스레 털어지고 버석거리는 메마른 마음은 어느새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 분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들으며 철저히 나다움을 지켜내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낭송이라고 정의했다. 살면서 내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낭송으로 듣는 내 목소리가 점점 내면의 목소리에 가까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나답게, 진짜 나로 살아낸 한 해다. 그래서 12월을 맞는 마음이 가볍다. 이루지 못한 계획도 방황도 아름다운 추억도 ‘나’였음을 안다. 감사한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남은 한 달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련다.법정 스님이 말했다. “삶은 순간순간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매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내 삶의 매 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란다.

2019-12-01

잔액이 부족합니다

문춘희 종합자산관리사마트에서 물건을 산 후 휴대폰 페이로 결제한다.“잔액 부족입니다”“잠시만요”결제 수단을 신용카드로 한 단계 올린다. 처음 카운터에서 잔액 부족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부끄러워 캐셔에게 체크카드라서 그렇다며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곤 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주위에 있으면 어쩌나 마음도 졸였다.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마일리지 적립이라는 달콤한 보상으로 신용카드를 긁게 만드는 유혹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신 한도가 분명한 체크카드로 지출을 조절하며 통장이 부디 월급날 전에 바닥을 드러내지 않도록 기대할 뿐이다.25일 새벽, 반가운 급여 문자가 들어온다. 설렘도 잠시, 통장 나누기에 들어간다. 자동 이체 이외의 고정 항목을 하나씩 직접 송금하는 과정에서 급여가 만드는 대단한 위력을 실감한다. 동시에 공중으로 사라지는 지출과 차곡차곡 쌓이는 자산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종합자산관리사 일을 하면서 다양한 재무관리 현장을 본다. 수입이 많지만 소비를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나 신용카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달 악순환을 거듭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갑자기 늘어난 씀씀이에 오랜 세월 동안 어려움이 많았었다. 진작 통장 나누기를 실천해 지출과 자산 만들기를 차근차근 해왔더라면 지금쯤 꽤 괜찮은 종잣돈을 마련해 자산을 굴리고 있을텐데, 당시에는 번거롭다고 생각했다.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했다.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누구도 돈을 관리하는 인생의 책무를 피해갈 수 없다. 평생 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불편한 동거보다 확실한 친구로 삼는 것은 어떨까? 그 첫걸음으로 통장 나누기를 제안한다. 통장을 급여통장(고정지출), 예비비통장, 소비통장으로 세 개로 나눈다. 체크카드는 소비통장과 연결한다.25일에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띵똥” 월급이 들어오는 소리다. 이날 예비비통장으로 급여의 5∼10% 범위에서 정한 금액을 이체한다. 여기에서는 1년 단위로 지불하는 자동차 보험, 자동차세, 재산세 등 세금과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경조사 비용을 모은다. 고정지출, 소비 지출에서 절약한 돈도 이곳으로 이체해 종잣돈 굴리기 재원을 만든다. 부작용도 물론 있다. 예비비통장에 보관한 현금 유혹에 한두 달은 분명 시행착오가 생기게 마련이다.소비통장은 지난 3개월간 지출 평균 금액을 입금해 두고, 체크카드를 연결한다. 생활비, 식비, 피복비, 문화비, 유류대, 기타 잡비를 위한 통장이다. 카드 지출 내역을 2개월만 뽑아보면 매월 평균 지출 금액과 내 ‘방앗간(소비패턴)’이 어딘지 파악할 수 있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지, 외식을 많이 하는지, 계절마다 기분전환을 위해 옷을 얼마나 사는지. 자기계발에 한창인 사람은 책 구매 실적을, 사람이 우선인 경우는 아마 각종 술집 계산서를 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 소비는 생활 습관이기에 갑자기 줄이기 어렵다. 커피를 줄였더니 스트레스로 가을 코트에 지름신이 내리고, 술을 줄여보겠다고 애썼더니 억눌린 소비심리 때문에 더 큰 일을 터트린다. 무리하게 소비를 막으려 하지 않고 불필요한 소비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한다. 월 5만 원이라도 지출 흑자를 기록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이 귀한 돈은 그대로 이월하지 않고 다음 달 급여가 들어오기 전 예비비통장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보낸다.마지막 작업은 급여통장에서 나가는 고정지출을 정비하는 일이다. 기부금, 관리비, 보험료, 대출이자, 용돈, 통신요금, 자기계발비, 곗돈, 운동 등 매월 선택의 여지 없이 나가는 고정비다. 기존 출금 통장을 확인해 이체 날짜를 급여 이후로 조정하고 다른 통장에서 이체되는 고정비는 급여통장으로 일원화한다.여기까지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통장 나누기를 완성하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몇 달 치 카드내역서를 읽고 몇 개의 통장을 확인하며 야무지게 잘살고 있는 나를 만날 수도, 지금까지 버텨온 대견한 나를 만났을 수도 있다.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내 급여의 행방을 확인하는 자체로 의미가 있고, 분명해진 지출 패턴을 인지하고 예비비 마련까지 가능하다. 이제 신용카드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 돈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2019-11-24

말(言) 다루기는 어려워

권해창 교사진심이 담긴 말은 듣는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 감동은 지속적으로 청자의 생각에 남아 자극을 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그 말이 선하고 이타적일 때 울림은 더 크다. 듣는 사람도 그런 진심을 받아들일 상태라야 감동이 있다. 서로 타이밍이 맞아야한다. 주파수가 조금만 틀려도 잡음이 들리는 아날로그 라디오처럼 대화도 수많은 편견과 오해의 잡음 없이 서로 주파수를 맞춰야 가능한 일이다.소크라테스가 아고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울림을 주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계속된 물음으로 주파수를 맞추고 결국에는 어떤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그의 대화법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청년들이 많았던 만큼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대화의 충격은 사람들에게 울림과 감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나보다. 그 충격의 경험으로 스스로 가치관을 깨면서 탐구하길 좋아했던 사람은 그를 좋아했을 것이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혐오하고 경멸했다.교사는 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고 이로 인해 곤란을 겪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본다.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거나 들었을 때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싶은 말을 했을 경우에는 특히 예민하게 그 장면을 떠올린다. 소심한 나의 성격도 한 몫 하지만 그렇게 곱씹으면서 그때 했으면 좋았을 말들을 상상해본다.수업시간에 하는 말은 학습 내용이 말의 대부분이다. 특정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생활지도나 면담을 목표로 학생과 일대일로 말하는 경우에는 자칫 실수가 나오기 쉽다. 학생들과 일대일로 말할 때는 최대한 표정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럼에도 대화가 끝난 뒤에 내가 한 말과 행동을 후회하는 일이 많다. 말을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잘하는 선생님들이 부러운 순간이다.며칠 전 학생 한 명이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자율학습에서 빠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독서실이 더 공부가 잘된다는 이유를 댔다. 순간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본인이 교실에서 장난을 많이 치는 녀석이 아니던가. 평소 무단지각을 많이 하던 녀석이라 좋지 않은 편견과 감정도 한몫했다.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설득했으나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 모습도 고집스럽고 미워보였다. 결국 나는 그러면 안 되었는데, 소위 막말을 하고 말았다. 성실한 아이와 비교하고 평소 행동을 지적하며 지난 잘못을 들추어내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건방진 태도인지를 전했다. 감정을 실어 묵직하게 던졌다. 듣는 입장에서는 폭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가 교무실을 떠나고 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 나쁜 감정이 함께 섞여 나오는 말은 폭언 이상으로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후회했다. 말할 당시의 내 진심을 살펴보니 더 미안했다. 걱정되는 마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말할 때의 내 진심이 그 학생을 위한 선한 마음뿐이었는가를 생각하니 그렇지 않았다. 미워하는 마음이 섞여있었다. 학생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내게 말을 꺼냈을 텐데 나는 공부를 하지 않기 위한 핑계로 해석해버렸다. 주파수를 맞추지 못했다. 진심을 가장해 충격만 준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다음날 아침, 교실로 향하면서 녀석에서 어떻게 인사를 건넬지 고민했다. ‘머리를 쓰다듬을까? 장난치듯 말을 건넬까? 급식에서 나오는 부식을 챙겨주면서? 아마 시무룩하게 있겠지? 칭찬을 하는 게 나을까? 아 오늘은 일찍 왔으려나?’ 교실 문을 여니 그 녀석이 교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지각하리라 예상했는데 자리에 보여 약간 당황했다. 아직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다. 놀란 나에게 그 녀석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선생님 오늘 일찍 왔어요. 선생님 말 듣고 이제 일찍 오려구요. 저 어제도 새벽 1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어요.”말하기는 항상 어렵다. 다른 분야는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어나는 법이지만 말하기는 그 발전이 참 더디게 느껴진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항상 조심스럽게 ‘말’을 다룰 일이다.

2019-11-17

포카전을 아십니까

용문중 포항공대 박사과정포항공대는 봄에는 교내 축제로, 가을에는 카이스트와 교류전으로 연간 두 차례 축제를 연다. 가을 축제의 명칭은 ‘포스텍-카이스트 학생 대제전’이고 줄여서 포카전 혹은 카포전이라 부르며, 해마다 장소를 번갈아 개최한다. 올해 17회째인데 포항공대가 8승 9패로 근소하게 뒤처져 있다.최종 승부는 여러 종목 승패를 합쳐 결정한다. 공대생들의 축제답게 과학 퀴즈나 프로그래밍 대결 같은 종목과 구기 종목인 야구와 축구, 농구도 있다.학부 시절, 나는 야구 선수로 포카전에 출전한 경험이 있다. 학부생 시절인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포항공대는 카이스트에 2014년 한 번 이기고 세 번을 졌다. 학부 졸업 후에 나는 야구에 관한 관심을 접고 살았다. 얼마 전 야구 동아리 선배와 밥을 먹으며 올해 포카전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최근 포항공대 야구팀 실력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가 야구를 하던 시절에는 팀이 매번 4부 리그에 머물렀지만, 최근에 2부리그까지 승격했고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단다. 카이스트 야구팀은 예전부터 2부리그에 참가하고 있다.포항공대는 최근 2년 야구 경기에서 연달아 패했다. 초반에 앞서다가 후반에 역전을 당했다. 팀에서 분석하며 여러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카이스트에서 투수가 내는 사인을 훔쳤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 고전하다가 후반에 점수를 낸다는 가설이었다. 선배는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포수는 엉덩이 밑 쪽으로 손을 내려서 투수에게 사인을 줘서 던질 구질을 약속한다. 이 사인은 1루 주자가 쉽게 볼 수 있다. 타자는 1루 주자에게서 사인을 받아 투수가 직구와 변화구 중 어느 것을 던질지 미리 알 수 있다.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대 팀이 사인을 훔친다면, 우리도 사인을 훔쳐야 하는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할 사람이 떠올랐다. 공자였다. 논어 ‘안연’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며,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 반면, 그런 공자에게 반박할 마키아벨리도 떠올랐다. 군주론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며 승리를 위해 어떠한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애초 상대 팀이 사인을 훔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상대 팀이 사인을 훔쳤기 때문에, 우리도 훔쳐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추어 야구 경기에서 사인 훔치기를 시도하면 평판이 나빠질 것이다. 즐기자고 하는 야구를 비신사적인 플레이까지 해가며 이기려 하는 것은 누구도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포카전 승리는 학교를 대표하는 동아리 1년의 가장 큰 목표며, 승리의 열매는 달콤하다. 특히 팀을 이끄는 주장은 승리가 더욱 간절하다. 주장으로서 한 해의 포카전을 이겼다는 자부심, 이긴 순간에 받는 헹가래, 근사한 트로피,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추억이다. 게다가 이번 승리를 계기로 동아리 지원금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못할까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선배에게 굳이 포항공대도 카이스트의 사인을 훔쳤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상대가 사인을 훔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고는 들었다. 올해는 포항공대가 초반에 고전하다가 후반에 역전승을 했단다.프로 야구에서도 사인을 훔치거나 이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발전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실력이 있다면 상대가 무엇을 던질지 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포항공대 야구 실력이 최근 좋아졌고 분명 이 때문에 승리했을 것이다.지금 보면, 포카전 경기의 승패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승리한다고 보상이 생기지도 않고, 진다고 큰 손해가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한 경기의 승리를 위해 두 팀 모두 땀을 흘렸던 순간들이 있다. 방학에 집에 가지 않고, 자발적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했던 시간들, 고된 훈련을 거쳐 뽑힌 학생들이 학교 대표로 경기에 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포카전에서 승리하고 싶은 마음은 노력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물을 보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2019-11-10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김영체 진솔 산림기술사사무소 대표10월 28일 월요일이 밝았다.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 2015년 10월 27일부터 하루 한 줄씩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날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감사일지’를 쓴다. 부담없이 실천할 수 있기에 꾸준히 쓸 수 있었다.2019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는 매일 A4 한 장 쓰기를 결심했다. 글자 수 1천 자.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외근이 잦을 때는 힘들다. 늦은 시간 퇴근하면 글 쓸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쓴다. 업무, 일상,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써서 블로그에 올린다.지인 K도 글을 쓴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이는 밴드에 정치나 일상을 소재로 글을 써 올리는데, 분량이 많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K는 새벽마다 쓴 글을 공유한다. K의 글에는 소신과 사명감이 묻어있다. 글을 보면 K의 철학과 인생관을 금새 알 수 있다. 얼굴 마주하고 소주 잔을 나눈 적 없지만, 지난 3년 동안 서로 글을 읽으며 정(情) 도타운 벗이 되었다.‘사람’을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글쓰기는 몇 가지 매력이 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내 안에 거짓이 사라진다. 쓰는 행위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솔직하게 표현한다. 내면의 모습을 만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글쓰기를 통해 치유 받은 경험도 적지 않다. 한번은 SNS에 내 주관이 뚜렷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바로 악플이 달리면서 약간 상처를 받았다. 괴로웠지만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악플을 단 사람 입장에서 글을 써 보았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아픈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글쓰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구나 편한 사람과는 거리낌 없이 말한다. 흔히 ‘수다를 떤다’고 표현한다. 수다를 떠는 순간은 어떤 부담감도 없다. 부담을 내려놓으니 물 흐르듯 말하기 쉽다. 글쓰기도 같은 윈리를 적용할 수 있다. 수다 떨 듯 내 마음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맞춤법이 틀리면 어떻고 문법이 좀 맞지 않으면 어떤가? 앞뒤 논리나 맥락이 어색해도 상관없다. 오로지 글을 쓰는 순간 떠오르는 것을 무작정 써내려 간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부담이 줄어든다.양을 채우고 난 다음에는 마구 휘갈겨 쓴 초고를 수정한다. 글을 수정할 때도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오타, 문맥이 어색한 곳만 수정할 뿐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지난 7월, 두 번째 책 숲에서 길을 만들고 물을 다루다를 출간했다. 본디 책 출판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다. 숲에서 임도를 만들고, 사방 공사를 진행하며 현장에서 느낀 생각을 수시로 써서 온라인에 올린 것이 초고로 탈바꿈했다. 글이 하나 둘 모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일하는 임업인들과 공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굳이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그래야 글을 쓰는 동안 문장에 집중하게 된다.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내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음이 차분해진다.말은 한번 입에서 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수정이 가능하다. 말보다 느리긴 하지만, 그만큼 생각을 숙성시킬 수 있다. 말을 많아지면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무할 때가 많다.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글을 쓰는 날에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쓰지 않는 날은 공허하다. 문법과 맞춤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문장의 모순을 무시하고 내 삶의 모순을 찾는다. 쓰는 만큼 내일이 달라진다. 삶의 방향을 짚고 나 자신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글쓰기는 완벽이라는 허상을 버리고 완성이라는 성찰을 이루어 가는 도구다.써 놓고 보면 글이 부끄러울 때가 많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일 쓴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라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을 믿는다. 언젠가 내 글의 전개와 논리적 서술이 나아질 것이라 확신하며 오늘도 글을 쓴다.

2019-11-03

끄적이는 삶이 내게 준 선물

박현미 회사원종이에 낙서하듯 끄적이는 게 좋다. 수업 시간에도 회의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적어가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했다.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쓰는 행위는 나를 자유롭게 풀어내는 시간이자 동시에 사유를 깊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희열을 느끼고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욕구 또한 충족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그냥 쓰는 것,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평가 따위는 더더욱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며 나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자신에게 그 어느 때 보다 진솔할 수 있다. 어떤 것에도 종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 글솜씨를 알아주거나 감탄해주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연습 삼아 써 내려가고 나 자신과 자유로운 대화를 하면서 감정을 배출하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글이 명확해져 간다는 것은 나 역시 구체화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들여다보며 나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면 더 잘 보고 더 사랑하게 된다. 초점을 내게 맞추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제삼자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답을 구해야 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해 보려 애를 써본다. 이런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유하는 힘이 조금씩 길러지고 편협한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상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면역력도 조금씩 늘어갔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막연한 문제들이 점점 명료해지는 것을 느낄 때도 많다. 뚜렷이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렇게 쓴 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알 수 없는 용기 비슷한 것이 불쑥 생기기도 했다.처음 나를 향한 질문의 글들은 대부분 부정적 감정을 배설한 밭이었다. 그것들을 거름 삼아 씨앗이 뿌려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긍정의 힘을 가진 이야기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싹이 자랐나 보다. 이것은 실로 내게 큰 기쁨이자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의 짧은 글쓰기는 조금씩 나를 성장시키고 힘을 더해주고 있다.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동안 나는 특별한 존재로 자신을 반기며 마중한다. 의식하는 나와 무의식의 내가 비밀을 공유한 친구가 된 기분이랄까? 써 내려간 글을 보며 만족에 빠진다. 나는 내가 가장 친애하는 독자이자 작가다. 일상 속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내 글은 공허함을 덮어준다.이렇게 내 끄적거리는 글쓰기는 비밀스러운 대화의 추억으로 쌓여간다. 이 보물은 자신감의 밑바탕이며 기죽지 않되 거만하지 않은 나로 성숙시켜 준다. 내게 이런 끄적임은 강하면서 유연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행위이자 의식이다. 멈출 수도 멈추어서도 안 되는 일과로 변했다.운동하고 여행을 가고 맛있는 것을 먹는 모든 행위가 치유의 순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회복의 계기가 되어 준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다른 이의 글을 먹으며 커갔고 내 글을 먹으며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단단함이 생긴 것을 느낀다. 소심하고 차분하던 일상의 글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거침없기도, 대담해지기도 했다. 이 모든 시간과 함께 나도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삶이라는 마라톤에서 승리하기 위한 완벽한 방법은 있지 않을 것이다. 공감받지 못하는 크고 작은 고민 속에서 방황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만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화려한 글을 쓸 필요는 없다. 대단한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매일 일정 분량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짧게라도 의지적으로 시간을 내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야만 한다. 바쁜 일과 중 미뤄지거나 건너뛸 수도 있지만, 하루에 한두 줄 나에 대한 기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나만의 노트에 써 내려가는 기록은 나 자신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9-10-20

대학 생활에서 배운 것

한효정한동대 4년·ICT창업학부제2의 고향, 포항에서 나는 배우는(學) 삶(生)을 살아가고 있다.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 때, 한 교수님이 칠판에 큼직하게 단십백(單十百)이라고 쓰며 말했다. “인생에서 한 명의 스승과 10명의 친구와 100권의 책을 만나면 성공한 삶이다. 단십백을 대학 생활 때 이룰 수 있도록 목표를 세워 볼 것을 권한다.”교수님 권유대로 나는 대학 생활을 통해 스승을 찾고 친구를 만나며 책을 통해 배움을 이뤄가고 있다. 대학 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 자체다. 새로운 만남은 설레지만 어렵기도 했고, 수많은 관계 안에서 피상적인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질문을 서로 연결해 가며 내 대학 생활을 만들어간다.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어떤 의미일까?’다. 우리 캠퍼스에는 RC(Residential Campus)라고 불리는 생활관 즉 기숙사가 있다. 학생 넷이 함께 방을 쓰고, 방끼리 팀으로 묶여 수요일마다 팀 모임을 하고, 다양한 학교 행사에 참여한다. 서로 다른 기질과 성향의 네 사람이 한 방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다 보면 당연히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갈등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것에 익숙하다. 우리도 그렇게 길들여졌다. 그러나 4개월 동안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다 보면 갈등을 수면 위로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몇몇 친구의 경우 이런 갈등의 과정이 힘들어 학교 밖에서 자유롭게 살기도 하지만, 싸우고 풀고 정들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과 배움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갈등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여러 친구의 다양한 태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쓰여 미안하다는 사과를 반복하는 친구들, 할 말을 꺼내기보다 우선 참고 견디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나와 맞지 않는 친구들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끊어내듯 관계를 끊어 버리고 다시는 안 보는 친구들도 있다.특히 요즘 트렌드인 ‘나의 행복을 찾아서’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아예 포기하며 살아가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어우러지기 위해 굳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잃고 싶지 않고, 맞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도 벅찬 세상이라고 딱 부러진 논리를 세우면서 선을 긋는다. 갈등을 드러내고 풀어보려는 시도들은 너무 비효율적으로 느껴져 그 과정은 생략한 채 더는 한쪽이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뚝 끊어지는 인간관계들이 많아지고 있다. 풍요로워 보이지만 가난한 인간관계다.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스스로 원해 더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종종 호구라는 말로 비하당하기도 한다. 이들은 ‘너는 누가 챙겨?’라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일들을 감당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1학년 때 이런 선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새내기들이 나가서 놀고 싶을 때는 같이 차를 타고 바다도 가주고, 고민이 생겨 힘들어할 때면 학교를 몇 바퀴나 함께 걸어 주기도 했다. 처음 접하는 전공 공부를 도와주고, 필수로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팀 모임에도 나와 열심히 게임에 참여해 흥을 돋워 주기도 했다. 4학년이 되어 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좋은 배움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나는 포항의 대학 생활에서 이런 질문하기 시작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더 사람답게 사는 길일까?’이 질문과 내 삶이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피상적인 관계가 많아질수록 진심이 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관계에서 나오는 갈등에 침묵이 아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나는 선배들을 통해 이런 상황에서 먼저 자기를 희생하며 아낌없이 내 것을 주는 것을 보았다. 나도 선배가 된 자리, 혹은 사회 초년생의 어느 자리에서 그런 환경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019-10-13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일까?

이미하 영어강사추석 연휴 마지막 날, 막역하게 지내는 친구 부부들과 만남을 위해 경주로 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을 이루는 모습, 한 잎 두 잎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무를 보며 살짝 멜랑꼴리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SNS에 빛바랜 사진 넉 장이 올라와 있다. 경주에서 만나기로 한 J 언니가 보낸 그 사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남편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잠시 차를 멈추고 추억 가득한 사진을 함께 보며 남편과 나는 바둑 수 되짚어가듯 과거를 복기했고 그 사진이 16년 전 보성 녹차 밭에서 찍은 것임을 마침내 기억해냈다. 경주에서 만날 네 부부를 포함, 친하게 지내던 아홉 가정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던 그때의 추억이 어제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초록빛 녹차 밭 한가운데 아이들이 늘어서고 그 뒤로 호위하듯 늘어선 부모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 속에는 이틀 전 학업을 위해 새벽에 서울로 떠난 둘째 녀석도 있고 얼마 전 경찰 시험에 떨어진 후 새로 마음을 다잡고 대구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한 첫째 녀석도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7살, 4살 앳된 두 녀석 얼굴이 낯설었다.다른 사진에는 경주에서 만나기로 여인 넷이 턱에 꽃받침을 만들어 괸 채 녹차 밭의 싱그러움을 닮은 소녀 같은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젊은 모습들이 낯설고 생경하기가 아이들 사진을 볼 때보다 더했다. 마치 낯선 사람처럼 보이는 ‘그때의 나’를 한참 들여다보며 잠시 상념 속에 빠져들었다. ‘그때의 나’는 과연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일까?‘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나’는 내가 살아온 과거 역사의 결과물이다. 16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문득 바라본 중년의 ‘지금의 나’와 두 개구쟁이 꼬맹이의 엄마이던 ‘그때의 나’는 참 많이 달라 보였다. 외모야 말할 것도 없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도 판이하다.사내아이 둘을 키우느라 바빴던 ‘그때의 나’는 책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살았다. 삶에 치여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글을 쓰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삶의 부분이자 존재 양식인 독서와 글쓰기에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어떤 연계성도 없다고 느꼈다. 이렇게 다른 두 존재를 두고 어떻게 ‘그때의 나’가 ‘지금의 나’와 같은 나라 말할 수 있을까?‘그때의 나’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금의 나’와 비슷한 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16년 전 어느 날, 두 아이는 모두 잠들어 있고 ‘그때의 나’는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밤중에 컴퓨터를 켜고 앉아 결혼한 여자의 이중고, 삼중고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 날 중앙 일간지 H 신문사에 우편으로 원고를 보냈다. 며칠 후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고 내 글이 신문에 실렸다. 그러므로 지금 쓰고 있는 이 독자 수상은 내 두 번째 신문에 원고인 것이다. 이것으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르지 않은 동일한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그때의 나’와 분명히 다른 ‘지금의 나’ 모습도 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인생을 살며 몇 번 뼈아픈 실수를 했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후 여러 선택의 순간, 이 교훈을 기억했고 용기를 내어 도전했을 때 삶은 멋진 보상들을 선물해 주었다. ‘그때의 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행복한 ‘지금의 나’가 되게 해준 힘이다.앞으로 계속 이어질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의 내 모습’또한 ‘지금의 나’의 연속인 동시에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삶에 고스란히 반영하며 만들어나갈 것이다. 10년 후 얼마나 낯설고 생경한 시선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볼지 모르지만 한 가지 모습만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길 바란다. 10년 후에도 책 읽는 나,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그때의 나’로 남아있기를.

2019-10-06

수면자 효과를 극복하려면

정은숙 생각학교ASK 연구원신뢰도가 낮은 출처에서 나온 메시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설득력이 증가하는 현상을 수면자 효과라고 한다. ‘소문은 자고 일어나면 어디서 들었는지 잊어버린다.’는 외국 속담에서 비롯한 심리학 용어다. 사람들이 정보를 접할 때 얼마나 쉽게 받아들이는지 경고하는 용어다.정보가 폭증하는 현대 사회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나 지식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때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내 기억창고에 흘러들어 진짜와 가짜의 분별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반복해 듣다 보면 진실이 아니라 해도 결국 진실로 둔갑해 힘을 발휘한다. 불분명한 정보나 지식이 꾸역꾸역 흘러들어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관념이 선입견이 되기도 하고 결국에는 고정관념으로 인격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다. 무서운 일이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들어오는 잘못된 정보나 관념은 어떻게 걸러낼 수 있을까? 최소한 긴장하며 확인해 보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독서 모임을 통해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다. 몇 년째 독서 모임에 참여하다 보니 어느 시점이 되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책 안 읽는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해요. 만나서 대화를 나눠도 재미가 없어요.” 책에 재미를 붙이고, 한 권 한 권 독파해 나가고 토론하면서 즐거움에 빠져 악의 없이 던지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연 그럴까? 반드시 책을 읽어야 말이 통하는 것일까?책을 많이 읽을 형편은 못 되지만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도 책을 조금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아는 것이 전부인 양 진리인 양 상대를 설득하고 계몽하려는 교만함이 있었다. 책이나 관계를 통해서 무의식 가운데 수면자 효과로 흘러들어온 얇은 지식은 심지어 ‘책을 읽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는 편견까지도 만들어 낸다.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많은 불협화음도 나중에 찬찬히 따지고 보면 잘못된 정보나 오해가 유발한 선입견이 원인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모호한 대답,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적당히 혼합해 내 생각으로 예측한 ‘카더라(그렇다고 하더라)’통신에 우린 얼마나 길들어 있고 희생당하고 있는가?내게는 수면자 효과에 기인한 고정관념은 없는가 따져봐야 한다. 확인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근거 없는 정보들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을 기준으로 눈 가리고 귀 닫고 쏟아지는 정보를 분별없이 받아들인 것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들에게 스마트 폰을 맡기지 않으려고 하는 엄마들의 고민도 이런 염려 때문이다.정보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과연 어떤 것들이 진실이고 어떤 것들이 가짜인지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미 생활 깊숙이 자리잡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와 지식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최소한 확인 가능한 정보인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선입견으로 판단을 잘못 하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시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나의 작은 실천 사항은 이렇다. 첫째, 하지 않아도 될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려 하지 말자. 둘째, 내가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진짜인 것처럼 전하지 말자. 셋째,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정보가 확실하지 않다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넷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면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속뜻을 살펴보는 정성을 갖자.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분명히 갖고 있지만 새로운 일이나 환경에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발걸음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슬픈 일이다.내 지식을 도둑맞지 않도록, 거짓이 잘못 침범하지 않도록 깨어나야 한다. 수시로 진실인지 점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라인홀드 니버를 따라 기도한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침착함을 주소서. 내게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2019-09-29

너의 이름은?

박근영 회사원“용왕에게 잘 보이려 토끼를 유인했던 동물은? 이적과 유재석이 결성한 듀엣 이름은?” 정답은 거북이와 처진 달팽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부르면 동작이나 판단이 느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은 이런 연상 작용을 한다. 밥을 짓고 집을 짓는 것처럼 이름도 공을 들여 ‘지어서’ 아기에게 붙여준다. 아이 인생이 이름대로 펼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의미를 해석해서 성격이나 삶까지 유추한다.살면서 나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거나 이름이 특정인을 떠올려 일상이 불편할 때 운을 바꾸기 위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한다. 이름이 내포하는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개명을 할까? 개명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길다.10여년 전 고용센터에 경험한 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곳이 대기자들로 가득했다. 직원들은 민원인 이름을 일일이 육성으로 불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기자들 웅성거림은 커졌고 직원들은 그 소리에 호명하는 이름이 묻힐세라 더 크게 소리쳤다. 한참을 그렇게 일을 처리하던 어느 직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더니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부르는 것이 아닌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후다닥 창구에 가서 앉는다. 그만 그 순간만큼 나는 1만5천㎐를 듣는 돌고래 청력으로 그 이름을 똑똑히 듣고야 말았다. 그 이름은 ‘○백수’. 속뜻이야 참 좋으련만(아마도 만물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닐까?) 그 자리에서 불린 이름은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로 동시에 해석됐다. 하필 이곳이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에 해당하는 사람이 오는 장소인지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인 사람들 처지가 다 같은데도 하필이면 이름 때문에 머쓱해진 것이다. 그 신사분은 나중에 개명했을까?S는 자기 이름을 참 사랑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주었는데 의미도 좋아서 어디든 이름을 내놓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역술인들이 풀이를 해주거나 인터넷으로 풀이를 할 때마다 점수가 낮게 나왔다. 그 이름을 가지고서는 크게 성공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파도 위 돛단배처럼 언제 좌초될지 모르는 위험한 이름이라는 풀이까지도 나왔다. S는 자신의 이름이 의미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데 이렇게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려 바꿀 생각은 없다고 했다. S는 집이 좀 가난하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외엔 특별히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S는 30대 중반 항암치료를 받았다. 세 사람당 한 명꼴로 암이 흔한 세상이니 자기가 걸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고 했다.1년여 투병을 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씩씩하게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 40대 초반 외국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한항공 프레스티지석에 누워 이송되어 올 때도 비싼 자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천진스럽게 얘기했다. S는 다행히 다리만 동강 났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삶이 결코 쉬웠던 게 아닌데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니 결국 인생은 자기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든다.그랬던 S가 얼마 전 암이 재발해 치료를 받고 재수술을 했다. 살면서 암과 교통사고를 몇 차례씩 겪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다. 물론 S보다 더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작은 고난도 연거푸 들이닥치면 힘에 부쳐 무릎을 접게 된다. S는 마음 한쪽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던 개명의 유혹과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름다웠던 옛 이름을 미련 없이 털어낼 수 있다며 고통의 과거는 추억 속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개명이 좋다, 나쁘다를 논할 대상은 아니다. 개명을 의지박약의 결과물로 매도할 필요도, 그것에 초연한 것을 대단하다 추켜세울 필요도 없다. 최소한 개명은 이전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름을 바꾸는 행위 하나가 마음에 희망의 씨앗으로 자리 잡아 오늘을 살아낼 힘을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S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예전의 그 웃음을 찾았다. 남은 것은 건강을 마저 회복하고 새로 시작한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는 것뿐이다.

2019-09-22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할 책임

허진욱 직장인 생각학교ASK 연구원요즘 딸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말로만 듣던 중2병 증세일까? 같이 밥을 먹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이내 표정이 굳는다. 레이저 눈빛으로 아빠를 째려본 후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잠깐 당황스럽지만 허허 웃으며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딸 모습은 33년 전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나는 딸보다 백배는 더 심했을 것이다. 아침부터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 미성숙한 나를 인자한 표정으로 한 번도 감정 상하지 않게 깨워 주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 와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중이다. 늦잠 때문에 아침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려 집을 뛰어나가면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금이라도 먹이려 했다.평생토록 ‘자식이 행복’이라며 나를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준 어머니 덕분에 지금 나도 존재한다. 권투를 하다 다쳐 얼굴에 멍이라도 생기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걱정했다. 멍을 풀기 위해 받은 달걀로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비비고 있으면 그 모습에 파안대소하며 웃는 어머니로부터 나는 행복의 방법을 배웠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먼저 웃음을 잃지 않을 때 행복해지는 비결을.지난 주말 요양병원을 찾았다. 자식을 못 알아보는 어머니는 그래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내게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딸에게 줄 책임이 있다. 중2병이 심하게 도지면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우락부락 인상 쓰지만 아무래도 어떤가. 그저 사랑스럽다.‘욱’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볍게 넘길 수 있다.권투 선수였던 나는 훈련이 힘들어도, 시합을 못 해도, 친구 때문에 힘들 때도 늘 어머니에게 짜증 냈다. 어머니는 폭우를 막아주는 우산처럼 다 받아주고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았다.2018년 2월 11일 새벽 5시 3분, 모두가 깊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 갑자기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흔들리고 있는 느낌처럼 몸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곧장 딸 아이 방으로 달려간다. 딸도 놀라 울면서 방에서 뛰어나온다. 아내와 딸아이를 진정시키고 무슨 일이진 TV를 켜보니 포항에 규모 4.7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TV와 영화로 접했던 지진을 실제로 겪어 보니 그 위력은 대단했다. 집이 이렇게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다.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기 전에 지켜야 한다. 비단 가족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맑은 공기다. 미세먼지가 요즘처럼 기승 부리기 전에는 공기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 봄마다 초미세먼지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린 후에 비로소 맑은 공기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미세먼지는 노약자나 어린이에게 아토피, 천식, 비염을 치명적으로 유발한다. 노인과 어린 아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들이다.포항 남구 지역 생활폐기물 시설(SRF) 굴뚝 높이 때문에 문제가 많다. 다른 지역 소각장은 굴뚝 높이가 150m인데 포항은 불과 34m다. 이 낮은 굴뚝은 인근 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 쓰레기를 태울 때 발생하는 다이옥신, 발암물질, 미세먼지 등 환경 오염물질이 그 연기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굴뚝을 더 높게 쌓으려면 물론 돈이 들 것이다. 소리없이 우리 아이들 폐와 몸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무서운 물질들이 주는 피해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자녀가 아픈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부모로서 큰 고통도 없을 것이다. 방심하다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책임감을 갖고 소중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자식이 당신에게 아무리 짜증을 내고 힘들게 해도 환하게 웃어 주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사랑과 긍정, 희망, 감사를 배웠듯 지금 내가 딸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중2병이 아무리 심해도, 세상이 나를 좌절하게 하여 힘들어도 내가 웃을 수 있고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소중한 사람이 곁에 안전하게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19-09-15

우리는 책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오지은 공무원지식과 정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책은 지식을 얻는 가장 보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가을 문턱에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공부를 위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서 등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자신의 필요 때문에 책을 읽을 것이다.과거에는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만 책을 읽을 수 있었다.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었다.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깊은 사고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과거의 사치품은 현대의 필수품이 된다고 하던가?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료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활짝 열려 있다.25년 차 공무원인 내게 있어 책 읽기는 생존을 위한 무기였다. 겉보기에 무난한 삶이지만 고비 고비마다 순탄한 적이 없었다.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들, 모두가 자기 손해는 손톱만큼도 안 보는데 나만 순진해서 당하는 느낌, 바보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들이 짓누를 때 속으로는 화나고 슬펐지만, 겉으로 속상하지 않은 척 씩씩한 척해야 할 때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힘내라고 말해주었으면 싶었다.이런 힘든 상황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사건건 말할 수도 없다. 하소연하면 결국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타인이해 주는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나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위로하고 내면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했다.책에 나오는 한 구절 한 구절은 내가 공정하지 못한 것 같은 세상에 분노할 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지금 세상이 훨씬 공정하게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자기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에도 자신을 믿고 행동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의 시련이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네가 언제 한 번이라도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무엇인가 해 본 적이 있냐고 질책하기도 했다.세상에는 헐벗고 굶주린 상태로 폭탄이 집에 떨어지지 않기 만을 바라는 제3 세계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위만 바라보고 불평하던 내게 지금 얼마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와 더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칼의 노래’, ‘한비자의 관계술’, ‘한강’, ‘태백산맥’, ‘연을 좇는 아이’, ‘히말라야 환상방황’, ‘죄와 벌’ 이런 책들을 통해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을 만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도 배웠다.책을 읽으면서 힘을 주는 문장,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위로해 주는 그 문장들 때문에 용기를 내어 외국인들이 역동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에서 아직 잘살고 있다.책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성큼 발 내디딜 수 있는 길잡이다.몰랐던 사실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만나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때로는 책을 읽다가 만난 문장을 통해 삶이 뒤집기도 한다. 그 한 문장은 누군가의 인생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사람들은 왜 책을 쓸까? 유전학에 의하면 달고 기름진 음식에 식탐을 느끼는 이유가 열량을 최대한 저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태곳적 생존 정보가 우리 DNA에 각인된 결과라고 한다. 책을 통한 삶의 지혜 또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축적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해줌으로써 인류 생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본능일 것이다.가장 좋은 대화의 방법은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경청이다. 책을 읽는 것을 저자와의 대화라고 말한다. 가을의 문턱에서 저마다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를지라도 저자와 대화를 해 보자. 나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작가들 이야기를 경청해 보자. 그러면 거기에서 삶의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19-09-08

나의 바다 찾기

문정민 교육컨설팅 에듀아이엠대표 (커뮤니케이션 전문강사)“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질문이다. 예전에는 둘 다 좋다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바다가 좋다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다. 포항에 살면서 좋은 점을 물어보면 나는 주저 없이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것’이라 대답한다.주변에도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를 물어보면 각양각색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어린아이와 청춘은 여름 바다에 가서 신나게 놀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답답한 일이 있는 사람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면 마음이 활짝 열린다고 하고 누군가는 깊은 파도 소리가 마음을 달래주어 좋다고 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바다가 우리에게 다채로운 방식으로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나는 유난히 바다를 좋아해서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찾아가는 바다를 정해두고 있기도 하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영일대’ 바다를 찾는다. 포항 인근 해수욕장 중 늘 붐비는 곳이다. 우리나라 해수욕장 중 도로와 상가들이 해변과 가깝게 있는 곳으로 손꼽힐 것이다. 영일대 바다는 계절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이고 구경거리가 많다. 해안 보도블록을 따라 걷노라면 다양한 전시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포항을 상징하는 스틸 아트 작품이 눈길을 끈다. 버스킹 공연장에서 들리는 통기타 소리가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상점 앞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이때 바다는 조연일 뿐 주연은 사람이다. 그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나는 마침내 축 늘어진 어깨를 펼 수 있다.슬프거나 외로울 때는 ‘흥해읍 방석리’ 바다를 찾는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걸으면 방파제에 가렸던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난다. 길가 나지막이 핀 들꽃이 바닷바람에 맞춰 춤을 춘다. 그곁 삐죽 고개를 내민 달맞이꽃과 솜털을 뒤집어쓴 강아지풀이 정겹다.그 길 끝에는 파도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시커먼 바위 군락이 있다. 옷깃을 여미며 바위에 서면 바다가 나를 둘러싼다. 바위가 바다 쪽으로 성큼 나와 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장엄하다. 바위 위에 서서 하염없이 몰려오는 파도와 마주하면 박목월 시 ‘크고 부드러운 손’이 떠오른다.“크고도 부드러운 손이 /내게로 뻗쳐온다. / 다섯 손가락을 / 활짝 펴고 / 그득한 바다가 / 내게로 밀려온다.”운명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낸 시인의 고백을 조용히 나도 읊조리며 사색에 잠긴다. 시인도 내가 보고 있는 이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만 같다. 온몸을 휘감는 소리에 눈물을 얹으면, 거센 파도에 내 슬픔은 소리없이 녹아내린다. 하얀 포말과 함께 무겁고 우울했던 감정은 넓고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한없이 넉넉한 바다는 이렇게 모든 것을 품어준다.복잡하게 얽힌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집중해서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오도리’ 바다를 찾는다. 해변입구에 동화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좋지만 두 손에 담길 듯 작은 모래사장에 더 마음이 끌린다. 끝까지 걸어도 십 분이면 충분한 해변은 부담스럽지 않고 아담해서 좋다. 고운 모래는 몇 번을 잡아도 금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물은 깨끗해서 절로 손을 담그게 한다.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바다 앞 작은 바위섬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툭툭 모래를 털고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해 주차장 턱에 앉는다. 온통 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맑아진다. 그 순간 닫혀있던 감각이 열리며 다양한 하늘 풍경만큼 새로운 아이디어가 몽글몽글 피어난다.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쉼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바쁜 일들을 제쳐 놓고 마냥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가까운 바다를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잊고 있었던 나를 만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가을에는 바다와 친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오늘 저녁에는 ‘영일대’ 바다로 발걸음을 옮겨볼 생각이다.

201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