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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이다 - 김광원

이창형 기자
등록일 2006-01-23 19:19 게재일 200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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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천하통일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꿈이다. 한사람이 꿈을 꾸면 꿈으로 머물지만, 만인이 꿈을 꾸면 현실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신념이 된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다.


나는 1940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의 작은 마을에서 팔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나는 열 식구가 끼니를 때우는 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그 지독한 일본이 패망한 날에도, 625 동란이 터진 날에도, 심지어 초상이 나도 끼니는 사람에게 찾아와 밥을 내놓으란다.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나는 끼니의 무서움을 절감하며 살았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그 누구도 가난 때문에 주눅 들거나 비굴하지는 않았다. 가난할수록 가슴을 펴려 노력했고 사람답고자 애썼다. 그러자면 '정직'하고 '당당'해야 했다. 정직하고 당당하게 남들 앞에 서려면 무식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남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울진 사동초등학교, 평해 중학교를 거쳐 대구계성고를 졸업하고 서울 법대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4.19혁명의 서울대학교 제2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인물!


행시 출신, 경북을 제대로 아는 인물!


새마을 운동-가난을 몰아내는 일에 매진!



20대의 가난한 대학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며 학업에 매달려야 했던 나에게 세상의 눈을 뜨게 해주었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사건이었던 4.19혁명이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불의에 항거한 일대사건으로 나는 4.19혁명 서울대학교 제2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통해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가슴으로 느끼며 세상의 눈이 열렸다.


나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 시험을 보았다.


몸무게가 1kg 미달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서 국민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면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신체검사 당일에는 물 한주전자를 다 마시고 소변을 참아가며 겨우 합격선인 50kg에 도달했다. 결국 공군중위로 명예롭게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1960년대는 우리 사회 모두가 보릿고개의 탈출에 골몰했었다. 끼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나는 '가난을 몰아내는 일'에 내 인생을 걸기로 결심하고 행정고시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시작한 공직생활은 등산과 흡사했다. 유혹을 멀리하며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올라야 했다. 나는 경상북도 법무담당관을 시작으로 내무부 계장에서 과장을 거쳐 금릉군수, 김천시장, 강릉시장, 포항시장, 경상북도 기획관리실장과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내무부 감사관으로 지내면서 경북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키웠고 동시에 경북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다.


"어린애들에게 시간하고 돈은 독약이나 마찬가지고, 덜 된 어른들에게 권력과 돈은 독약이나 마찬가진기라." 항상 아버지의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탓인지 포항시장 시절에도 사복을 입으면 사람들은 나를 기껏해야 농사 서너 마지기 붙여먹는 농부로나


봐 준다. 한번은 지역순방길에 시간이 남았기에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를 비우며 주인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주인과 많은 얘기를 나누던 끝에 "아, 나는 포항 시장 김광원이요" 라고 했더니 갑자기 주인이 대뜸 "시장이 바뀌었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지"라고 했다. 비록 포장마차 주인이 시장의 얼굴을 몰랐지만 나는 부끄럽기 보다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서민들의 마음을 언제나 들여다 볼 수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포항시장 재직시에 가장 큰 문제가 물 부족이었다. 나는 포항이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수도 확장 사업에 전념했으며, 시민에게 안전한 물 공급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경상북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시에는 안동댐, 임하댐, 청도 운문댐 건설이 계획되었고 이로 인하여 토지보상 및 이전 대책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정말 발로 뛰어다니면 해결했다. 또한 임하댐 건설에 있어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기던 우리 병사 백여명이 모두 이 은행나무에 올라가 숨었다 화를 면한 700년전부터 둥지를 틀어온 안동용계의 은행나무(천년기념물 175호)가 물 속에 잠길 운명에 놓였고, 대통령도 관심을 가졌으니 어떻게든 살려내야 하는 운명이었다. 나는 실력있는 조경회사 사장을 찾아내어 원래보다 15m을 들여 올리는 방법(上植)을 하여 높이 30m, 지름5m의 기대한 나무의 거처를 옮기는데 성공했다.


이렇듯 공직생활이 24년을 다 채울 즈음 주위사람들은 나를 두고 '행정의 달인'이란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직생활로는 더 이상 경상북도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데 한계에 달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공직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1995년, 신한국당 영양봉화울진군 지구당 위원장을 시작으로 정치무대에 나서게 됐다.



3선 국회의원, 국회농림해양수산위원장 역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선정민단체선정 우수국회의원!


2003 한국유권자연맹 건설교통위원회 최우수 의원


윤창렬 게이트을 처음 밝힌 인물!



이듬해인 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측근들은 어려운 선거라며 걱정이 많았다. 지역 민심은 3선의 전직의원 2명, 현역의원 2명을 포함한 10명의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재치고 나를 당선시켜 주었다.


16대 선거에서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의 영남권 진출을 위해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민주당 대표를 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민심은 언제나 깨어 살아 있었다. 봉화울진군민들은 나의 노력에 대한 보답을 해 주었으며, 한나라당에서도 민주당의 영남권 교두보 확보를 의지를 꺽은 공을 인정하여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4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건설교통위원으로서 나는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된 윤창렬 게이트(굿모닝시티 사건)사건을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경북의 장기적인 발전전략으로 포항~영덕~울진~삼천을 거쳐 북한까지 이어지는 동해중부선철도공사를 환동해안 발전전략의 하나로 정부에 요구하였고, 이 사업은 올해가지 실시설계를 끝내고 2007년부터는 사업이 착공될 것이다. 이러한 건설교통위원회의 공로가 인정되어 2003 한국유권자연맹 건설교통위원회 최우수 의원과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이 선정한 "정기국회 우수국회의원"으로 선정되어 지역민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었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나에게 "비례대표공천심사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


"비례공천심사위원장"이라는 직책은 비례대표들로부터 로비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최병렬 대표에게 공천심사위원장을 나에게 맡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병렬대표께서는 "김광원 의원이라면 돈 받지 않고 당의 미래를 위하여 제대로 된 인물을 선정 할 수 있을 소신이 있다"라는 것이 당의 중론이라고 했고, 나는 대표에게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전권을 받아 가장 공정하고 깨끗한 공천을 했다.


이러한 나는 대통령탄핵이라는 엄청난 역풍 속에서 지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3선 의원이 될 수 있었고, 지역의 현안인 영덕~안동~상주~서천을 연결하는 동서6축 고속도로 건설을 정부로부터 확답을 받고 타당성조사와 기본설계 중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의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상임위원장직을 경선을 통해 선출하였는데 나는 농림해양수산위원장에 선출된 영광을 얻었다.



비와 구름과 바람을 아는 노련한 선장이 필요


경북에 희망의 나무를 심을 사람-김광원



농해수 위원장직을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농어업에 대한 정책 방향을 나름대로 정립했다. 그것은 이제 높은 벽인 선진 농업과 경쟁체계로 나아갈 제도와 방향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농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어촌 지역에 대한 SOC사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각 지역별 농업도 특화된 상품을 개발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관세화 유예기간인 앞으로의 10년 안에 경쟁력있는 벤처 농업으로 육성해야 하고, 농업이 이제 생산체제에서 유통체제로 변화하기 때문에 공무원의 조직도 그렇게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FTA 등 국제관계에서 다른 산업의 이익추구를 위하여 우리 농업이 희생한 부분들이 크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는 농업개혁을 위한 농업협동조합법, 양곡관리법, 농지법, 여성농업인육성법 등의 법률안을 개정했다. 그러면서도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쌀관세화 유예 협상과 관련해서 위원장의 명의로 재협상을 촉구하는 문서를 농림부장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지난 '05년 10월 14일 농림해양수산위원장직을 던졌다.


나는 새로운 준비를 한다. 집의 나이 66세, 도정을 하기에 많다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방이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으며 "더하기보다는 빼기"하는 정부 아래에서는 비와 구름과 바람을 아는 노련한 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20여년간 나에게 봉급을 주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아껴서 저축도 하며 가족과 함께 행복을 느끼며 살도록 해준 공직생활의 전부가 된 사랑하는 경북을 위하며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행정 경험과 중앙정치 경험을 살려 300만 경북도민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희망을 드리고 싶다.


광역단체는 중앙정부와 기초단체 간 교량적 역할을 하므로 광역단체장의 중앙정치무대에서의 경력과 네트워크가 요구된다. 중앙정부의 수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광역단체장일 때 비로소 기초단체에 중앙정부의 힘이 제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 경북 도지사가 될 때 마침내 경북은 도약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목표가 더 해지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대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후보자가 당이 어려울 때나 힘들 때나 당에 헌신하고 봉사했는가를 반드시 검증해야만 한다.


나는 경북도민의 마음을, '쎄 빠지게 고생하며 억척스레 살아 온' 그분들의 멍든 가슴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정통 보수정당이 야당이 되면서부터 중앙정부로부터의 홀대로 인한 그분들의 한을 누구보다 잘 안다. 따라서 그분들의 응어리진 한들을 십분 공감하는 김광원! 나에게 도정을 맡아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지난 24년간의 행정경험과 3선의 국회활동을 담보로 2006년에는 "1등 경북"을 위하여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경북의 미래를 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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