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br>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놀란다는 경칩이다. 양력으로는 삼월 초순이니 실지로 봄이 시작되는 절기다. 흔히들 개구리가 놀라서 잠을 깨고 나온다고 하는데 개구리는 물론 벌레가 아니다. 벌레들은 대부분 알이나 번데기로 월동을 하고 애벌레나 성충으로 겨울잠을 자는 것은 장수풍뎅이, 무당벌레, 노린재 등이다. 24절기가 처음 만들어진 중국의 화북지방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그런 벌레들은 물론 개구리가 나오기에도 이른 때이다.

벌레든 개구리든 놀란다는 표현이 좀 의아하다. 봄기운이 돌아서 얼었던 땅이 풀리면 동면하던 벌레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깬다고 해야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놀라서 잠을 깬다는 건 갑자기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봄비의 차가움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었던 땅을 녹이는 봄비라면 새삼스럽게 차가움을 느낄 정도는 아닐 터이다. 물리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놀라움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총욕약경(寵辱若驚)이란 말이 있다.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로, 사랑(寵)을 받든 수치(辱)를 당하든 놀란(驚)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얼핏 들어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그보다는 총애를 받든 수모를 당하든 담담하고 초연하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 일에 놀라기까지 한다는 것은 어딘가 군자답지 못하고 경망스러워 보일 터이다. 도덕경의 해설서에는 ‘경계하라’는 의미로 풀고 있지만 왠지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명상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알아차림’의 상태를 가장 바람직한 경지로 본다. ‘마음 챙김’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알아차림은 시시각각 자신과 세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지각한다는 뜻이다. 둔감하게 지나치거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오해 따위로 사물이나 현상을 여실하게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온갖 괴로움과 불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에서부터 생각, 감정, 오감으로 부딪치는 모든 것에 각성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거나 추측하지 말고 과장이나 흥분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명한 진리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만사에 놀란 것 같은(若驚)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천진무구하고 생기로운 삶의 모습일 것이다. 미세한 봄의 기미에도 놀란 것 같이 하고, 보잘 것 없는 풀꽃 하나에도 경이로움을 갖는 것에 생명의 참뜻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그저 사소하고 미미한 것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본질과 에너지에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레와 개구리뿐 아니라 나무와 풀도 동면에서 깨어나는 계절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을 시시각각 놀랍게 느끼며 살 일이다. 그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고 소통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도 충실하기 마련이다. 작은 것에도 불충한 사람에게 어찌 큰 것을 맡길 수가 있으랴. 불통과 비리와 파렴치가 판을 치는 정치판을 바꾸는 일도 국민 각자의 사소한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