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영원한 유도인 - 대한유도회 김진도 회장

유도와 기업 경영 중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묻는 질문에 유도가 우선이라고 답한 김진도 회장.
유도와 기업 경영 중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묻는 질문에 유도가 우선이라고 답한 김진도 회장.

예전에 내가 살던 반고개에는 통근차가 많았다. 반고개는 성서로 가는 길목이고, 성서에는 섬유공장이 많았다. 아침마다 동네의 언니 오빠들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구두소리 또각또각 울리며 섬유공장으로 출근했다. 요란하게 구두소리 울리는 언니 오빠들의 싱그러운 젊음으로 골목이 온통 수다스럽고 생기가 펄펄 넘쳤다. 한 사람이 뛰면 덩달아서 너도나도 뛰기 시작하는데, 구두 뒤축소리가 골목 가득 울려 퍼졌다. 숨을 헐떡이며 반고개에 이르면 통근차가 줄 지어 서 있었다. 식구들이 문 밖까지 나와서‘잘 갔다 온나~’하고 배웅하던 아침 풍경이 정겨웠다. 아이도, 노인도, 출근하는 청년도 많을 때였다. 1970년대 80년대의 골목 풍경이다.

 

자승자강·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

올바른 기업운영 위해 경영학 박사 과정 등록

섬유의 날 대통령 표창·2000만 불 수출의 탑

2003년 납세의 날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까지

45년 외길 인생 기업인에 공인 유도 9단 ‘입신’

기업은 삶의 터전 발판…죽을 때까지 가야 할 일

유도는 온 마음으로 맡은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일

그저께 만난‘기풍섬유’와 김진도 회장님이 그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섬유공장 마당에 발을 딛는 순간, 또각거리며 골목을 울리던 구두소리가 들렸다. 아침마다 직물공장으로 출근한 형제가 있었다. 예전에는 2교대였는데 지금은 4교대라는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밤일하고 와서 해가 기울도록 고단한 잠에 빠져 있던 형제를 생각했다. 시간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그 서글픈 추억조차 애틋한 그리움으로 돌아보게 한다. 배운 사람보다 못 배운 사람들이 더 많았고, 직물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고, 집 가진 사람보다 셋방에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때였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대의 중심에 섬유산업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인과 유도인, 두 가지의 막강한 레벨을 보유하고 있는 김진도 회장님을 진량공단에서 만났다. 기풍섬유를 창업한 것이 1977년이었으니, 무려 45년 동안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오신 셈이다. 기업을 인수하자마자 쓰나미처럼 들이닥친 2차 에너지 파동으로 지게꾼과 막일꾼들이 부러울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쌓은 실전경험이 있다고 하나, 섬유시장의 동향을 읽는 사회적 안목이 어두워서 하청이 중단되고 자금 압박을 받는 심각한 상황에 몰렸다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경영학 공부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깨닫고 용인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에 등록했어요.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까요.”

회장님은 올바른 기업운영을 위하여 용인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에 등록하고 ‘기업의 조직문화가 조직 유효성과 노사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자승자강(自勝者强)이라던가.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던 과도기여서 어려움이 무시로 들이닥쳤지만 회장님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는 것으로 위기를 이겨냈다. 에너지 파동, 10. 26 사태, 5.16 민주화 운동 등,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사회가 지진을 만난 듯 통째로 흔들렸고 경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던 섬유산업조차 맥없이 휘청거렸다. 회장님은 위기에 봉착한 사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워터제트와 에어제트 같은 최신형 직기를 도입하는 과감한 설비투자로 맞섰다.

기적 같은 회생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창출하는 놀라운 효과로 기업의 발전은 물론이고, 산업에 종사한 근로자들의 정신적 경제적 안정과 국가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회장님은 기업을 살리고 흑자를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서 제 24회 섬유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 밖에도 1977년 수출의 날에 ‘2000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고, 2003년 납세의 날에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까지 받는 기염을 토했다.

“참된 기업인의 길을 걸어오신 삶의 역사가 45년인데도 회장님을 검색하면 유도인이 더 부각됩니다. 유도와 기업 중 어느 쪽이 먼저였어요?”

“당연히 유도가 먼저죠. 허허허!”

유도와 기업이 모두 회장님에게 천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기업은 삶의 터전을 닦는 발판이어서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 할 일이고, 유도는 온 마음을 기울여 맡은바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명확하게 구분한다. 더구나 이제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할 시점이라며 세월의 무상함을 솔직히 인정했다. 젊은 시절에 회장님은 미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미국의 프로모션 모자회사에 고종형이 있어서 미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섬유를 사랑하는 모임’의 초대회장이신 이지철 텍스밀 회장님의 부탁으로 3년 동안 공장장이 되었다. 77년 3월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독립하며 본격적으로 섬유산업에 뛰어들었다. 섬유산업의 위기를 탈피하려고 기계업에도 뛰어들었지만 직접 설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인 것을 깨닫고 일찌감치 정리했다. 지금은 주식회사 기풍산업과 기풍섬유 두 곳만 운영하고 있다.

45년간 외길을 걸어온 기업인이어서 줄곧 사업만 하고 산 것 같지만, 놀랍게도 회장님은 용인대학교 유도학을 전공한 공인 유도 9단의 입신이다. 입신이란 지혜나 기예 등이 뛰어나 신묘한 경지에 들어감을 이르는 말이다. 9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긴 세월 오랜 단련의 과정을 필요로 함은 물론이고, 단순한 기예만 닦는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실력으로 인정받아야만 입신이 가능하다. 그에게는 기업 외에도 유도가 삶의 근간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두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각오로 살아오셨어요?”

“그저 묵묵히 저만의 방식으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회장님은 어려운 시절에 망설이지 않고 최첨단 기계를 도입해서 질 좋은 제품 생산 능력을 키움과 동시에 국제적인 경쟁력과 튼튼한 자본 능력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 세웠다. 그와 동시에 고단자다운 책임감으로 우리나라 유도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앞장섰다. 미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유도를 전공한 꿈나무가 대한유도회의 수석부회장이 되어 전국의 세계대회란 대회를 빠짐없이 다녔는가 하면 부회장 18년, 직무대행 두 번, 36대 37대 대한유도회 회장으로 봉사를 하고 이제 명예회장으로 넘어갈 시점에 있다. 그 동안 유도선수들과 함께 세계대회를 누비며 유도 활성화에 힘쓴 이력이 화려하고 충실하다. 그에게 유도는 기업인으로 살아온 유구한 세월만큼이나 창대해서 삶의 역사와 맞먹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고향 영덕에서도 자랑스러운 영덕인으로 칭송을 받을 것 같다.

“고향 후배들 중에도 유도를 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얘기 좀 해주세요.”

“대한민국 유도회에 입문하고 보니 저절로 고향 후배들을 만나게 되더군요.” 지도자의 자리는 스포츠 정신처럼 공명정대해야 하는 것이어서 고향 까마귀가 아무리 좋아도 실력이 안 되면 키워주고 싶어도 키워줄 수가 없다고 한다. 지도자는 어떠한 순간에도 편협해서 안 된다는 철칙을 부러지게 지켜왔다고 자신한다. 그런 와중에 고향 후배 권용달과 최창석, 조수희 같은 몇몇 후배는 당당하게 제 실력으로 등극해서 인정받았다. 후배 조수희는 아시안게임 여자 유도 국가회장으로 나가서 금메달을 땄고, 지금은 국제심판 국가회장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계명대학교 감독이었던 권용달은 유니버시아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국제심판 BA를 받았고, 대학연맹에서 심판 위원장과 부회장을 지냈고, 또 다른 후배인 최창석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대한유도회 감독도 하고, 선수보호 위원장과 중고교 연맹 부회장을 했다고 몹시 자랑스러워한다. 이제 그 후배들도 나이가 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회장님과 연결된 소중한 인맥이고 자원이다. 유도인으로서 고향에 유도를 보급하자는 정통영 선생의 취지 아래 유도인 양성에 힘을 쓴 결과였다.

대한유도회에 몸담고 있는 동안 회장님은 일 년에 전국대회가 25번, 세계대회까지 35번이나 되는 그 많은 대회를 빠짐없이 다녔다. 외국으로 나가면 일주일이나 열흘쯤, 지방으로 가도 사나흘이 걸리는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 유니버시아대회에서 금메달 8개를 땄고, 아시안게임 때에 금메달 6개, 브라질올림픽 결승에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땄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36대 37대 두 번의 회장을 지내는 동안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브라질올림픽의 그랜드슬램을 이루었는데, 동경올림픽을 치르지 못한 것과 올림픽에 심판을 한 명도 올리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한다. 두툼한 양장표지의 ‘유도백년사’를 내놓으며 회장님은 자랑할 거라곤 이것 하나뿐이라고 겸손해하신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 100년사’이고, 우리나라 유도의 역사가 알알이 담긴 책의 가치 앞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책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 후세대대로 전해질 보물이어서 그 가치를 더한다. ‘유도백년사’를 출간한 것으로 회장님의 유도 역사는 완벽하게 마무리 된 듯하다. 할 일을 다 하고 뒤로 물러앉는 사람에게 우리는 아름답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자리’의 가치는 이렇듯 참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일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임을 회장님은 말을 아끼는 신중함으로 대신한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