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며칠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인물.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市場)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을 때, 시장이 뜻하던 바는 삼성. 삼성 총수가 6년 넘도록 투병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10·26과 하루 차이라는 우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절대권력도 엄청난 돈도 결국에는 죽음 앞에 무의미해진다는 자명한 사실.

그들도 사랑 때문에 밤을 새우거나 가슴이 아파 몇 날 며칠 두문불출 괴로워한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18년 권력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과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면서 이 나라 삼척동자도 아는 재벌총수.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번민의 밤을 하얗게 밝혔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 시인처럼 나는 왜 사소한 일에 관심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죽음에 즈음해서 가짜편지가 시중에 떠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손수 썼다는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검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양보하고 베푸는 삶을 설교하는 대목도 이채롭다.

사람의 가치가 비싼 옷과 자동차와 집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라고 설파하면서 만족할 줄 알라고 편지는 충고한다. 중간 이후는 스스로 자책하면서 늙고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한한 재물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한때 누렸던 돈, 권력, 직위가 이젠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

자신의 성취와 소유를 이토록 강렬하게 부정할 줄 아는 비판능력의 소유자! 편지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눌렀다. 젊은이들은 너무 황망히 서둘러 살지 말기를, 나이든 축들은 행복한 만년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내가 알던 재벌총수 이건희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삼성은 편지가 가짜라고 확인한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아쉬움과 허망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숱한 불법 탈법 무법 초법(超法) 위법을 감행하면서 거대재벌 총수로 등극한 사람이 저리 자상하고 따뜻한 인물이었다니, 하는 희열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만일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 가운데 누군가 저런 편지를 유훈으로 남기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빌 게이츠 같은 사람 말이다.

가짜로 드러났지만, 많은 사람이 감동과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도록 한 편지는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膾炙)될 듯하다. 우리의 확증편향과 선택적 기억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청량한 한줄기 소낙비 같은 편지였으므로! 가짜도 이런 가짜는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하나의 시대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21세기가 흘러간다,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