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본 영호루 박정희 대통령 영호루 글씨.
뒤에서 본 영호루 박정희 대통령 영호루 글씨.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있고 산과 어우러진 강과 하천, 냇가가 많아 전국 어디에나 누(樓)와 정자(亭子)가 있다. 이 누와 정자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여기에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누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의 성격을 띄고 정자는 작은 공간으로 개인의 수양과 정신적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공통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보고 느끼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안동의 영호루도 낙동강 가에 지어져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위치 선정이 잘못되어 많이 유실되어 지금은 반대편 산위에 지어져 수해걱정은 없지만 시멘트 콘크리트로 볼품없이 지어 전국의 누 중에는 최하품이 되어 버렸다.
 

앞에서 본 영호루 공민왕 글씨.
앞에서 본 영호루 공민왕 글씨.

#. 누(루)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언제부터 누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집을 짓고 살 때부터 원두막 형태의 휴식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기록상으로는 신선들이 누에서 살기를 좋아하므로 전설적인 삼황오황제때 황제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사기’의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원수지만 한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와신상담(臥薪嘗膽)끝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 서시(西施)를 오나라에 보내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구천(勾踐)을 위해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는 삼한시대에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고구려는 기원전 17년(유리왕 3년)서로 앙숙인 유리왕 계비 화희(禾姬)와 치희(稚姬)를 별거시키기 위해 따로 별궁을 지었고, 백제는 391년(진사왕7년 ) 궁전을 중수하면서 자금성의 이화원 같이 못을 파고 산을 쌓았다는 것으로 누를 추정할 뿐이다. 636년(무왕37년) 망해루(望海樓) 등을 짓는다. 신라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甲)에 나오는 21대 소지왕이 488년 천천정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궁과 월지에 임해전을 짓고 불국사에는 범영루를 짓듯이 여러 사찰에도 누가 있었을 것이다. 월상루에서 연회를 베푼 헌강왕 등의 기록으로 궁궐과 부속건물에 지었을 것이다.

고려시대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국가라 절을 중심으로 많은 누가 생긴다. 안동 봉정사의 덕휘루, 부석사의 안양루, 그리고 해안가에는 왜구의 침입이 심해 통영 수군진영에는 남쪽을 진압한다는 진남루(鎭南樓)가 있듯이, 경주 기림사 같이 해안가 큰 절에도 진남루가 있고, 대개의 산사에는 누가 있다.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는 누정이 절정에 달한다. 궁궐의 누정은 경복궁의 경회루같이 연회장소의 목적에 충실하게 실용적으로 지은 것 빼고는 경복궁의 향원정과 부용정 같이 치장과 구조가 매우화려하다. 관청이나 서원 등에는 누가 있고 특히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누정은 대체로 화려함보다 검소하고 담백하다.

 

영호루 누 마루.
영호루 누 마루.

#. 영호루의 영광과 상처

사람이나 건물이나 한때의 영광도 있지만 상처도 있다. 특히 안동의 영호루는 큰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만큼 상처도 컸다. 영광은 10만 홍건적의 참입으로 복주(福州·안동)까지 피난온 공민왕이 70일 있으면서 강가의 영호루에 올라 활 쏘고 말 달린다. 공민왕은 어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대륙의 웅혼함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잘 타고 그림과 글씨도 잘 썼다. 말달리는 ‘천산대렵도’ 그림도 자신을 생각하며 그렸을 것이다. 서원이나 누정에 누구의 글씨가 있느냐에 따라 그 건물의 위상이 달라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후 개경으로 갔어도 안동 영호루서 추억을 잊지 못해 1366년‘영호루’ 편액 글씨를 써준다. 이 공민왕의 어필(御筆) 편액 때문에 영호루는 더욱 격이 올라갔다. 영호루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공민왕이 피난온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누정기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영호루의 누정기는 고려 말의 문인 담암 백문보(1303~1373)가 1368년(공민왕 17년)에 썼는데 익제 이재현과 제정 이달충과 함께 고려 국사를 편찬했고,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인다. …. 큰 강은 옷깃과 띠처럼 둘러앉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장(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이 누(樓)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 같은 임금의 현판글씨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오는 세상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樓)를 위하여 다행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조선시대는 누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았고 또한 즐겼다. 안동은 유학의 메카라 할 정도로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전국의 한 가닥 한다는 학자와 문인들은 안동에 오면 영호루가 필수 코스라 보고 느낀 감흥을 시 한 수로 남겼다.

우선 위치 선정 문제였다. 도심 속에 있는 관공서의 누들은 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만 그 외의 누들은 강가나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위치에서 자연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어지는데 안동 영호루만 강가 낮은 지역에 지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는 도심이나 마을을 형성할 때 집 뒤에 산이 겨울에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적당한 농경지에다 강물이나 냇가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룬다. 영호루는 누의 입지조건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고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평양의 부벽루에 한 번, 그 외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울산의 태화루 등등 많이도 가 보았지만 이런 누들은 도심 앞을 흐르는 강물 절벽이나 산언덕 위에 세웠는데 안동은 도심에는 절벽이나 언덕이 없어 홍수로 몇 번이나 사라지는 수난의 상처를 당한다.

 

동쪽에서 본 영호루.
동쪽에서 본 영호루.

#. 수난의 상처, 망쳐 버린 영호루

올 여름 긴 장마라 낙동강 물도 불어 영호루를 찾았다. 누런 흙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위에 안동댐과 임하댐이 없다면 장관을 이루며 흘러갔을 것이다. 이 낙동강 물을 보니 어릴 적 물 구경 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 고향 의령은 동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이고 남으로는 남강을 두고 함안과 경계를 이룬다. 사람들은 물, 불구경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이 수재민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어린나이 때 의령의 동쪽 끝에 살았던 필자는 요즘같이 비가 많이 내리면 동네 형들을 따라 산 너머 낙동강 가에 물 구경 갔었다. 강가의 바위위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물은 무서웠다. 평소보다 넓게 펼쳐진 강물이 저 건너 벌판에는 유유히 흘러가는데 발아래 바위산에 부딪히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위에 떠내려 오던 집과 소들이 소용돌이 물결에 빨려들어 사라졌다가 저 아래서 솟구치곤 했다. 무시무시한 강물로 기억된다.

그 옛날 큰 홍수 때 백사장 가에 있었던 영호루도 그렇게 떠내려갔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영호루는 1547년(명종 2년) 홍수로 유실되어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이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찾았다는 것이 실감난다. 6년 뒤(1552년)에 중창한다. 1775년(영조 51년) 홍수로 다시 중건했고, 1792년(정조 15년) 홍수로 떠내려가 유실되어 4년 뒤 1796년(정조 19년)에 중수하고 1820(순조 20년) 청음 김상현의 7대손 안동부사 김학순이 중수하고 낙동상류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큰 글씨를 남긴다.
 

영호루 난간서 낙동강과 오늘날 안동시가.
영호루 난간서 낙동강과 오늘날 안동시가.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로 누각이 유실되어 영호루 금자현판이 떠내려가 선산군 구미리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 이 터 빈터만 남았다가 1969년 12월 안동시, 군민이 ‘영호루 중건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원래의 자리에서 정하동 지금의 강 건너 산위로 옮겨짓는다. 그런데 왜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망처 버린 것이다. 같은 시기 진주의 촉석루도 1241년 창건되어 중건과 중수를 8차례나 해오다 임진왜란과 6·25때 완전소실 되었다. 안동과 마찬가지로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목조로 아름답게 지은 것이 지금의 촉석루다. 뒤쪽으로 오르니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영호루’편액이 있고 앞에는 공민왕이 써준 한문‘영호루‘가 있다. 1층 기둥 옆에는 중년 남녀가 건식을 사와 먹고 있었고, 2층 누에는 혼자서 운동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김학순의 큰 글씨가 눈을 놀라게 하고 김종직의 중수기와 고려와 조선의 기라성 같은 선인들의 시판을 일이이 세어보니 47개였다. 지면의 한정으로 좋은 시들을 인용 못하지만, 고려 말의 호영 이집(1327~1387)의 ‘영호루 유별’ 중에 “술은 떨어지고 석양은 다락에 비치는데(酒盡夕陽樓),/ 떠도는 괴로움은 언제나 끝날까(行役何時了)”의 시 구절이 가슴을 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