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대웅전과 보물 제 533호 삼층석탑. 영국사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영국동길 225-35에 위치해 있다.

산세가 빼어나 충청북도의 설악산이라 불리는 천태산, 그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영국사를 찾아 내비게이션에 하루를 맡긴다. 차는 산길을 한참 올라 화전민들이 살았을 법한 평평한 고원지대로 들어서고, 한 때는 밭이었을 것 같은 평지와 드문드문 몇 그루의 호두나무들이 보인다.

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527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했다. 그 후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해 절을 국청사라 부르고 지륵산이던 산 이름을 천태산이라고 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 마니산성에 머물며 이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태민안이 찾아와 영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 223호인 영국사 은행나무는 어떤 모습으로 반길지 내심 기대가 컸는데 첫 만남이 실망스럽다. 축대 아래에 자리를 잡은 터에 700년 된 고령의 은행나무는 나이에 비해 어딘지 왜소해 보인다.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어 운다는 나무, 불교가 전래되어 들어올 때 같이 들어 왔다는 설로 수령이 부풀려지기도 하는 은행나무가 사진과는 많이 다르다.

절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고, 만세루는 보수 중이라 분진 방지막을 두른 채 어수선하다. 고령의 은행나무와 절 사이에 주차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나무와 나는 어떤 교감도 나눌 수 없다. 축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서자 나무의 웅장함이 비로소 보인다.

또 하나의 길이 계단 아래로 이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일주문 쪽의 광경이 그제서야 잡힌다. 나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힘이 빠진다.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로움도 없이 무례하게 절의 옆구리를 박차고 들어온 셈이다.

한참 동안 나무를 올려다보지만 그의 시선은 먼 곳을 응시할 뿐이다. 쉽게 얻은 것일수록 감동은 적고 쉬이 잊혀질 수밖에 없다. 편리함에 중독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난치병과 우리가 잃어야 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마음을 씻으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의 감회와 고령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겸허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무는 품격이 넘치지만 미동도 않고, 나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언어 이전의 언어를 애타게 불러본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산중에 밤이 찾아오면 달과 별들 모두 내려와 은행나무에 깃들리라. 새벽을 여는 도량석 목탁소리에 밤새 피안에 들었던 나무는 또 하루를 열 것이다.

양산 팔경 중 일경에 속한다는 곳, 영국사를 찾는 방문객은 의외로 많았다. 그에 비해 절은 소박하다. 마당을 지키는 단아한 수형의 단풍나무가 눈길을 끌고, 그 옆에는 오래된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보물 제 533호인 삼층 석탑을 지킨다. 그 석탑은 또 대웅전을 지킨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시선은 오로지 한 곳으로 모아져 있다. 나만 홀로 무언가를 찾아 절간을 두리번거린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대웅전 법당에서 바라보는 한여름 풍경은 여유롭다. 낯설고 어색한 마음을 가라앉힐라치면 모습을 감춘 만세루의 정경이 안타깝게 아른거린다. 오늘따라 부처님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법당에 앉아 정신없던 한 주를 돌아보고 싶은데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경내는 약속이나 한 듯 침묵 속에 잠겨 있고, 7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백팔 배를 올린 부처님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다시 먼 길을 돌아갈 생각에 마음만 초조해져 온다. 법당을 나와 천태산 주봉 쪽으로 100m쯤 올라간 곳에 있었다는 옛 절터를 멀리서 더듬어 보다 발길을 옮긴다.

또 다른 보물이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개발을 서두르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흙길이 말을 걸어온다. 당신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느냐고. 보물 제 534호 원각사비와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보물 제 532호 팔각원당형 승탑조차 감흥 없이 둘러본다. 한여름의 태양을 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무작정 걷고 싶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나를 석종형 승탑이 지긋이 바라본다. 내 앞에는 높은 곳을 향해 모든 것을 버렸을 맑은 생 하나 말없이 서 있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는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음에도 단호히 뿌리치지 못했다. 절 기행은 자연히 뒤로 밀려났고 나는 시간을 다투며 절을 찾아 나서야 했다. 어쩌면 영국사의 침묵은 예고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일에는 과정의 무게가 따르는 법, 그것을 기꺼이 짊어질 용기도 없이 섣불리 절 문을 두드렸다.

솔밭에서 만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끊어진 길 앞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는 나, 그 모습은 장마가 할퀴고 간 상흔보다 더 남루했다. 영국사의 침묵은 그런 나를 향한 엄중한 경고였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려오는 길에 대웅전을 향해 두 손 모을 때 내 안에 길이 보인다. 희미하게 영국사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