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나이어린 운동선수가 목숨을 잃었다. 폭력과 억압에 짓눌리며 스러져갔다. 한없는 억울함과 의지할 데 없는 무력감은 또 어떠했을까. 이렇듯 야만적인 범죄를 곁에 두고 이 사회가 자랑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슨 영광을 위하여 젊은 생명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야 하는가. 유사한 범죄가 때때로 벌어져도 당장 끓어오를 뿐 문제의 뿌리는 그대로인 모양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꽃다운 청춘을 무참히 꺾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처벌과 단속을 넘어 근본적인 해결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선수는 희망이다. 선수 본인이 좋은 성적을 희망하며 달려가지만 응원하는 관중과 국민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를 전해주는가. 그들의 노력이 멋진 성과로 이어질 때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과 용기를 안겨주는가. 피땀어린 노력 뒤에 광기의 폭력이 숨어있었다니 경악할 뿐이다. ‘폭력없이 성적없다’거나 ‘맞아야 잘 한다’는 믿음은 얼마나 후진적인가. 교육과 훈련에 관하여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스포츠리더십을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폭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선수들이 아직도 있지 않을까 짙게 우려된다.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문제는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뿐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에 있어 보인다. 도움과 구조의 손길을 찾기 위해 몇 번씩이나 노력했다지 않는가. 사안의 심각성과 위험도를 감지하지 못한 일련의 과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혼신의 수고를 기울이며 달리는 선수들을 돕지 못하는 체육계의 관행과 제도들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선수이기 전에 청년이다. 젊은 선수들을 끝없는 질곡에서 구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적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 내일을 향한 꿈과 비전을 안기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관심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할 언론과 정치에도 책임이 크다. 문제의 근원을 살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취재하고 보도하며 수정하고 정비해야 한다.

삶을 포기해야 한다면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면 성공은 무슨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노력을 통해 삶의 의미를 확인해야 하며, 결실을 겨냥하는 비전을 가르쳐야 한다. 지덕체(智德體)의 균형이 잡힌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성적을 위해 수단의 정당성을 확인하지 않는 교육과 훈련은 구태일 뿐이다. 운동을 따로 떼어 인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빚어서야 되겠는가. 수고와 노력이 빛나는 성과로 나타나도록 지육(智育)과 덕육(德育)이 체육(體育)과 함께 전달되는 훈련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노력은 모두 소중하다. 함께 수고하고 땀흘린 모든 이들의 노력이 존중되어야 한다. 일등만 대접받는 문화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폭력으로 불러올 성공은 없다. 스러져간 생명이 헛되지 않도록 책임을 살피고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끓어오르다 식어버리는 관심도 경계해야 한다. 폭력은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