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인민군 점령지역 기억 공간
6·25 전쟁, 인민군 점령지역 기억 공간
  • 등록일 2020.06.30 19:50
  • 게재일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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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6·25 한국 전쟁 70주년, 당시의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통령이 참석한 70주년 6·25 기념행사에는 전쟁 영웅 147위의 복귀신고가 있었다. 대통령과 육해공해병대 사령관이 유족들과 함께 이들의 뒤늦은 귀환을 가슴으로 맞이했다. 미군 전사자로 분류돼 하와이로 갔던 전사자들이 애타게 그렸던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님은 저세상 사람이 됐다. 희생자의 얼굴도 모르는 아들 딸들이 그 영웅을 맞이했다. 70년 전 인민군 점령지역에 살았던 당시의 비극이 또 다시 떠오른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여섯 살 우리 또래는 전쟁 전야에도 종이로 만든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종이마저 무척 귀하던 시절 우리는 빳빳하고 힘이 좋은 일본 헌 교과서로 딱지를 만들어 따먹기 놀이를 했다. 가끔 비행기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서 대포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지만 우리는 이에 아량곳 하지 않고 놀이를 즐겼다. 밤에는 집집마다 석유 호롱불을 가리개로 가리고 무명천 커튼으로 불빛을 가렸다. 동네 앞 신작로에는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늘어나 신기해 보였다. 그것이 전쟁의 시작인 줄은 우리 또래는 전혀 모르고 놀기만 했다.

며칠 후 우리 집 마당에는 복장이 다른 북한 인민군들이 들어닥쳤다. 인민군에 점령당한 우리 동네, 천진난만한 우리 또래는 군인 아저씨에게 총을 만져 보자고 조르기도 했다. 철없는 친구는 인민군들에게 총을 한번 쏘아 보라고 보채기도 했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격이었다. 국군과 다른 누런 군복을 입은 인민군 아저씨가 신기했으며 그들의 이북 사투리가 더욱 이상했다. 그들은 동네 소를 잡고 쌀을 공출할 때도 북한 인민 패를 사용했다. 모두가 점령지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임을 뒤늦게 알았다.

당시 동네 학생들은 그들에게 불려가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하는 빨치산 노래를 배웠다. 우리는 멀리서 구경만 했다. 당시 동네 청년들은 그들이 조직한 ‘치안대’에 강제 편입됐다. 그들은 매일 훈련을 받기도 하고 인민군들이 지시하는 일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철수한 후 그들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은 우리 경찰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동네 어른들 중에는 반죽음을 당하여 지게에 실려 오는 모습도 보았다. 우리 동네는 결국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피해를 당하고, 수복 후에는 우리 경찰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연좌제에 의해 출세 길이 막혀 버린 사람도 있다.

당시 북에서 온 어느 인민군은 철수하지 못하고 우리 동네에 그대로 남아 머슴살이를 했다. 당시 서울대 졸업식에 간다던 이웃집 아저씨는 갓 시집온 색시를 남겨두고 행방불명이 됐다. 그가 어수선한 전쟁 통에 인민군에 끌려갔는지 의용군으로 입대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그 아저씨가 10여 년 전 중국을 통해 북에 살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그가 북에서 새 장가가서 자식 5명과 함께 잘살고 있다는 소식에 수절했던 아주머니는 기절하고 말았다. 처절한 6·25 전쟁의 비극은 우리 고향 마을에도 아직도 상처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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