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가로수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무보호대 구멍을 비집고 올라오고 있는 덩굴풀 앞이다. 땅에 내려앉아 사는 별을 휴대폰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다.

아직 춘분이 한 달은 남은 날, 늦은 오후. 봄이라기엔 이른 겨울 끝자락이다. 하긴 쑥, 클로버, 장미 같은 식물들이 월동도 하니, 봄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마음속 어떤 힘이, 지나려던 나를 나를 앉히고 만 것이다.

고개 드는 덩굴풀이 쪼그만 꽃들을 피워냈다. 꽃잎 한 개가 깨알만 할 정도로 작은 하얀 꽃이다. 사람들은 왜, 몸을 바짝 낮추고 아주 작게 피운 이 꽃을 ‘별꽃’으로 불렀을까. 별꽃은 논밭 둑이나 길가, 빈터 같은 곳에 흔히 사는 두해살이풀의 꽃이다. 학명이 ‘스텔라리아 메디아(Stellaria media)’로서 라틴어로 별의 뜻을 가진 ‘스텔라(Stella)’에서 유래하였단다. 원산지가 유럽이지만, 지금은 세계 도처에 자란다. 낮아서 사람은 물론, 땅 위의 뭇 생명과 더 가까운 꽃이다. 가까이 쳐다본다. 내 눈에도 영락없는 별이다.

가로수 둥치 곁 메마른 땅에서 이렇게 일찍 별꽃을 피워낸 풀의 생명력도 별같이 반짝인다. 벌써 줄기 길이가 한 뼘을 넘어 보이는 것도 많다. 별꽃은 이른 봄부터 초여름까지 핀다. 하얀 꽃잎이 실은 다섯 개지만 눈엔 열 장처럼 보이지. 한 개가 둘로 깊게 갈라져서 그리 보인다. 사람들은 별빛을 다섯 갈래로 그리지. 별꽃의 꽃잎도 다섯 개라는 사실이 우연은 아니라 싶어. 그래서 이름이 별꽃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땅에 붙어사는데도 줄기가 꽃이나 잎에 비해 튼실해 보인다. 낮아 당할 위험이 더 큰 때문일까. 튼튼한 줄기에 이어진 앙증스러운 별꽃이기에 사림과 별의 끈끈한 연을 잘 나타낸다 싶다.

어느새 벚꽃이 만발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즐겁지가 않다. ‘코로나19’라는 신종 전염병의 위세에 눌려 지구촌이 숨죽이는 봄을 보내기 때문이다. 유명한 벚꽃 길도 ‘드라이브 스루’라는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구경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앞으로 우리는, 인류는, 지구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여행이나 다른 이유로 헤어졌던 가족·친지나 지인들을, ‘혹시 코로나 감염이나 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며 언제까지 살아내야 하는 걸까.

너도 알듯이 처음엔 ‘우한폐렴’이나 ‘우한코로나’라 했다가, 중국 압력 때문인지 ‘코로나19’라고 부르게 된 신종코로나 전염병…. 어떤 이들이 의심하듯 정말 사람이 만든 생물학 무기가 유출된 것이 ‘코로나19’라면, 유럽 흑사병 창궐같이 유행병에 무방비로 당해야 했던 그 옛날로 지구촌이 되돌아가는 건 아닐지 우려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끝없는 물질문명 추구와 향유가 과연 제 길을 걷는 것인지 묻고 싶다. 또 인간의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종교 등 제 분야의 패권 추구는 무엇일까. 정말 성악설이나 원죄론 같은 이론이 제시하는 인간상이 원래의 인간일까.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땅 위에도 가져다 놓은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까. 사람의 무의식이 땅 곧, 지구도 별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일까. 끈질긴 생명력을 뽐내며 이른 봄, 아니 겨울 끝자락에 별을 땅 위에 피워낸 별꽃을 다시 찾았다. 작고 약해 보이더라도 실은 강한 별꽃이다. ‘별꽃’이란 이름 자체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지. 춥고 음산한 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기댈 언덕은, 산 너머 남촌에서 따사한 바람 불어오는 희망의 봄일 테니까.

웬일인지 별꽃에, 하얀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코로나 환자 진단과 치료에 여념 없는 의료진들이 겹쳐 보인다. 처음 입국자 차단을 하지 않은 당국의 방역 실책을 탓하지 않고, 신종 코로나전염의 최전선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는 분들 말이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 희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하다. 그들이 낮은 곳에서 봄을 밝히는 밝은 별꽃이란 생각이 물밀듯 든다. ‘우한폐렴’소식에 선제적으로 코로나진단키트를 밤새워 개발한 기업, 그리고 검사와 진단에 전력투구한 의료재단의 역군들 또한 이 봄을 비추는 하얀 별꽃이란 마음도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