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론가와 풀어보는
‘한국사회’라는 실타래 ④

TV조선 ‘미스터트롯’의 ‘희망가’ 경연 장면. /TV조선 제공
TV조선 ‘미스터트롯’의 ‘희망가’ 경연 장면. /TV조선 제공

온갖 화제를 남기면서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이 얼마전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면서 성황리에 끝났다. “10년 만에 국민예능의 탄생”이라는 자찬의 말에서 보듯 그것은 ‘국민적’ 수준의 흥행이었고, 특히나 이 경연에서 두드러진 영남출신 참가자들의 약진은 코로나19의 최대 감염지역으로 고통받고 지쳐가는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그나마 흥겨운 시간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렇듯 새롭게 복권된 대중음악 장르와 취향 뒤에 깔린 사회적 배경도 흥미롭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국민적 ‘문화’와 그에 의한 대중적 취향, 감성의 도야, 그리고 ‘한국적 전통’이 현재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도 한다.

사실 35.7%의 시청률, 최종 문자투표 773만 건은 예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국민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TV채널이 3∼4개에 불과하고 축구 한일전이나 올림픽,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면 모든 채널이 동일한 프로를 방영하는 것도 잦았던 1990년대까지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채널이 200개가 넘는 케이블TV·종편방송의 시대, 그리고 이것마저도 온갖 인터넷 개인방송, 유튜브, 팟캐스트 등이 또한 잠식하고 있는 오늘날 미디어 풍요의 시대에 그 정도의 시청률과 참여율은 경이롭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를, 젊은이와 진보적 성향의 인구층의 방송인 것처럼 간주되는 JTBC가 추구해온 음악예능의 방향과 비교해보면 많은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JTBC의 음악예능은 그간 ‘수퍼밴드’나 ‘팬텀싱어’, 그리고 ‘비긴어게인’등에서 보듯 중노년세대를 ‘소외’시키는, 젊은이들의 상당히 서구적이고 ‘글로벌’하면서 세련된, 고급문화적인(크로스오버) 취향에 맞추고 따라올 것을 종용하는 듯한 방향을 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추구해왔다. 특히 ‘수퍼밴드’의 경우 해외 교포 출신 참가자들이 두드러지고, 무엇보다 한국말로 된 음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어와 최신 해외음악에 익숙치않은 중노년세대가 애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 프로가 불러일으킨 소셜미디어 상의 폭발적인 관심과 대비되게 그 시청률은 ‘미스터트롯’에 비하면 초라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미스터트롯’의 성공에서 특징적인 점은, 과거에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지만 현재는 ‘전통가요’라고 불리며 주변부 장르가 된 트로트에서 팬덤(fandom), 특히 매우 능동적인 중노년층 팬덤이 형성되고, 젊은 세대에게 이 장르가 감상할 수 있는 음악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형편이 어려운 음악인들이 트로트 장르에 최종적으로 귀착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이 장르가, ‘방송국’과 SNS, 음원차트 같은 중앙집중적 네트워크와는 독립된 수익원을 제공하는 ‘행사’를 활동무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 장르에서는 노래가 가진 ‘음악성’에 대한 ‘숨죽이고 듣는 감상’보다는 노동과 일상의 피로와 따분함을 날리기 위한 ‘흥겨운 쇼’가 더 결정적이다. ‘발라드 장르의 수호자들’로 구성된 MBC ‘복면가왕’ 판정단의 단골 성원들이 노골적으로 트로트를 음악성이 없는 장르로 비주류, 노인들의 장르로 폄하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그 판정단(소위 ‘마스터’)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스터트롯’은 트로트 음악도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뿐 아니라 실제 역량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음악성’의 차원에서 높이 평가하고 즐긴 곡들은 영탁의 ‘추억으로 가는 당신’, 김호중의 ‘무정블루스’,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혼합장르적 성격을 가진 무대였다는 공통점을 갖는데, 우승자인 임영웅의 트로트 또한 사실은 발라드 계열 음악을 통해 다져진 그의 섬세한 감성과 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된다.

 

TV조선 ‘미스터트롯’의 ‘희망가’ 경연 장면. /TV조선 제공
TV조선 ‘미스터트롯’의 ‘희망가’ 경연 장면. /TV조선 제공

필자가 여러 음악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이때껏 발표된 곡으로서나 음악인의 저변 층으로서나 한국대중음악이 가진 높은 수준과 다양하고 넓은 역량이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것은 한국 관객들의 수준이다. 새로운 것과 더 나은 음악성에 대한 이들의 판단은, ‘전문가’로 자처하며 ‘일반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연예인 판정단, 전문음악인보다 훨씬 더 열려 있고 전향적이다. 관객들은 그것이 ‘데스메탈’, ‘사이키델릭’, ‘크로스오버’ 등 낯설은 음악이건 클래식적 감성을 가진 음악이건 해묵고 뻔해 보이는 예전 음악이건 간에 들려지는 음악이 그 완성도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응용과 편곡이 돋보이면 ‘눈물 짜게 하는 데 집중’하는 ‘정통’ 발라드나 ‘정통’ 트로트를 서슴없이 제쳐버리고 그에 높은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미스터트롯’이건 ‘복면가왕’이건 ‘수퍼밴드’건 화석화된 ‘전통’을 고수하고 반복하려는 모습은 오히려 판정단, 심사위원이나 제작진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오히려 관객들은, 자신이 해온 음악의 관성, 그리고 참가자에 대한 애착과 편애에 휩쓸리기 쉬운 이들보다 훨씬 더 공정한 평가를 무대 자체에 대해 내리고 있다.

사실 트로트에 대해 가진 반감과 낮은 평가는 그간 ‘우리의 전통’이라 불려왔고 강권하는 것에 대한 그것인 측면도 있다. 음악적인 측면을 빼고 트로트 곡 가사에 담긴 내용만을 본다면 그 주류는, 모든 대중음악에 공통적인 남녀의 사랑과 이별 외에 효도, 고향, 향토 찬양, 해방 이후 한민족의 고난에 대한 강조, 어지럽고 거친 현대화가 휘몰아치는 사회생활 속에서 출세에의 욕구가 좌절되는 등의 감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미스터트롯’의 몇몇 무대는 이처럼 ‘꼰대스러운’ 정서와 취향에 대한 온갖 반감과 괴리감을 단숨에 달려버렸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김호중이 리드한 ‘패밀리가 떴다’ 팀의 마지막 곡인 ‘희망가’였던 것 같다. 물론 시대를 요약하는 듯 맑은 밤하늘 아래 걸려 있는 달과 벚꽃이 있는 고풍스러운 풍경의 배경 화면은 그 세팅 자체만으로 이미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곡과 가사가 100년 가까운 시간을 넘어 울림과 공감을 낳게 한 예술적 성취는, 록음악의 고재근, 클래식의 김호중의 음악성이, 시원하고 울림있는 음색과 성량이 돋보이는 이찬원, 그리고 희망을 고대하는 어린 정동원의 쓸쓸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만났을 때 이루어졌다.

이제 한국사회는 고도로 개인화되고 개개인의 예술적 취향 또한 다양화되고 ‘현대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노년세대의 차에서 ‘뽕짝’음악만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70년대 통기타 음악, 8∼90년대 발라드와 해외 팝 음악, 임재범, 전인권의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다니는 노인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취향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의 변화는 가치와 이념, 생활양식에서의 변화와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은 외국인에게 내보이기 위해 박제화시켜 놓은 것들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호소력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높고 넓게 승화시켜주는 가치와 의식, 정서, 즉 문화라 불리는 대상들의 모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을 찾아가는 일은, BTS나 싸이의 성공에 한껏 고무되어 빌보트차트 1위를 탈환하려 하거나 “100억가치 트롯걸”, “글로벌 수퍼밴드” “한류 트롯스타”를 찾는 일과는 다르며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경북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