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게 익어가는 ‘청포도’는 해방을 갈구하던 이육사 시의 소재가 됐다. 안동시 도산면에 세워진 이육사문학관 내부 모습.

시인 이육사는…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綠). 보문의숙과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했다. 21세에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33년경부터 ‘육사’란 필명으로 ‘황혼’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한다. 민족적 불행을 겪던 일제강점기에 뜨거운 저항정신을 드러낸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사망했다.

 

39년 8개월에 불과한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향한 수많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원이었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기도 하였다.

거대한 산맥의 등뼈와도 같은
그 단단하고 매운 정신은 결코
날 것으로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는 충분한 미적 단련과
숙고를 거친 후에야 탄생한
결과물이다.

 

◇ 짧았지만 빛나는 삶, 이육사

항일활동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만큼 저항시인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문인은 없다. 39년 8개월에 불과한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향한 수많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필명인 이육사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 사건에 피의자로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 중일 때 붙여졌던 수인번호 ‘二六四’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육사는 필명으로 소리가 같은 육사(肉瀉), 육사(戮史), 육사(陸史)를 함께 사용하다가 1935년 이후에는 육사(陸史)를 주로 사용하였다. 다양한 뜻의 ‘육사’라는 말에는 모두 강렬한 항일정신이 담겨 있다.

그의 항일투쟁은 안동, 대구, 일본, 서울,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활동은 일본 중심의 다른 문인들과는 구별되는 이육사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은 글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든 행동으로도 연결된 것이었다. 그는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원이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기도 하였다.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 고난의 삶은 이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1931년 이영우에게 보낸 서신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활군(육사)이 옥살이하는 정황을 탐문해보니 고통이 보통이 아니고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그 위독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왜놈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입니까?(중략) 이따위 세상에서는 비록 부처가 살아 있다 해도 막다른 길에서 통곡할 뿐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확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습니까?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창비, 2017, 295면)

그렇다고 그를 ‘저항’시인으로만 보는 것은 육사의 삶과 문학에 대한 명백한 과소평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기도 하지만 저항‘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산맥의 등뼈와도 같은 그 단단하고 매운 정신은 결코 날 것으로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는 충분한 미적 단련과 숙고를 거친 후에야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육사는 1930년대 한국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한 계급문학, 순수문학파, 모더니즘, 생명파 등의 어느 유형에도 귀속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시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상과 세련된 언어, 거기에 새로운 감각과 진중한 생명의식까지 한데 아우르는 풍요롭고도 독창적인 시를 창조한 것이다.

그의 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을 꼽자면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선비정신과 미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갈고 닦여진 미적·인식적·윤리적 단련의 세례를 통해 이육사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장을 한국현대시사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육사는 조선의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츨생 당시는 원촌동) 881번지에서 육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인 원촌(遠村)을 빼놓고 이육사와 그의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마을은 이황의 5세손이자 육사의 9대조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주자학적 질서가 삶의 전체를 촘촘하게 이끌어가는 곳으로서, 이러한 특징을 이육사는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百餘戶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이따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엇습니다.”(‘季節의 五行’, ‘조선일보’, 1938.12.24.)라고 밝힌 바 있다. ‘무서운 규모’란 수백 년 동안 원촌을 지배한 유교적 삶의 질서를 의미한다.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말한 바도 있는 이육사도 이러한 원촌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하였다. 이육사는 ‘전조기(剪爪記)’(‘조선일보’, 1938.3.2.)에서 자신이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으며,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에서는 7,8세쯤에는 한시를 짓고 십여 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계절의 오행’(‘조선일보’, 1938.12.24.)에서는 열다섯에 이미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道를 다 배웟다고 스스로 달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수백 년 길러온 선비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2010년 기준 320여 명)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1910년을 전후하여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약 90명 가운데 10명)를 배출한 곳 역시 안동이라고 한다.(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251면) 그 중에서도 원촌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는 그러한 항일정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안의병장을 지냈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단식하여 순국한 이만도도 육사의 친척으로서 원촌과 당재라는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 출신이다. 이육사의 그 뜨거운 삶과 문학의 모태는 안동의 원촌과 그곳을 지배한 유교적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육사는 총 44편(시조 1편과 한시 3편 포함)의 시를 창작하였는데, 이 중에서 직접적으로 원촌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시는 없다. 그렇지만 간접적으로 시인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시는 여러 편이 등장하며, 필자는 이 중에서도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들 시에는 육사의 전통적인 고향의 분위기가 깊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보려고 하는 ‘청포도’는 시인 자신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작품”(김희곤, 앞의 책, 199면)으로 고백했다고 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는 흰 색과 푸른 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하여, “내 고장”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이곳은 결코 욕되고 더러운 세력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는 성지인 것이다. 또한 육사는 엄혹한 일제 시절이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손님이 온다는 사실은 마치 칠월이 되면 늘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과 같은 불변의 자연적 질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맑고 깨끗한 이곳에서 반드시 올 손님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준비일 뿐이다. 1939년이라는 일제 말기에 수많은 지사들마저 변절의 길을 가는 상황에서, 이육사는 자연의 법칙처럼 도래할 광복의 미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포도’와 관련한 기념물은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 집중되어 있다. 1993년에 안동시 원촌리 생가 터에 세워진 시비에도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으며,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 앞에는 청포도샘이, 문학관에서 육사 묘에 이르는 구간에는 청포도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경북 포항에도 여러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호미곶과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미쯔와 포도원 인근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육사가 김대청의 안내로 식민지 시기 거의 유일한 포도원이었던 포항의 미쯔와 포도원을 방문한 후에 영감을 얻어 ‘청포도’를 창작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다.

‘청포도’의 배경을 안동의 원촌이나 포항의 포도원으로 한정짓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육사가 ‘청포도’에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고장’과 ‘마을’은 그 어떤 불의의 세력으로부터도 훼손되지 않는 숭고한 공간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되찾고야 말 공간으로서의 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선에는 매운 선비정신을 담뿍 머금은 원촌은 물론이고, 참신한 포도송이로 생명력의 향취를 내뿜던 마쯔와 포도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사의 그 굴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사는 부끄럽지 않은 내면의 당당함을 갖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