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초(牌招)를 어긴 죄
패초(牌招)를 어긴 죄
  • 등록일 2020.01.07 18:43
  • 게재일 2020.0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 장기로 온 지평 윤석주(尹錫周)와 대사간 송영(宋鍈)

구한말 까지 장기현 읍치가 있어서 무수한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장기읍성 동문길. 새로운 도로가 개설된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이곳을 밟고 간 수백 명의 유배인 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길이 되어 버렸다.

폐초(牌招)는 조선시대 임금이 비상사태나 야간에 급히 주요 관원들을 궁궐로 불러들이는 것을 말한다. 도구는 명패(命牌)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새는 둥근 나무판에 붉은 색칠이 되어 있었다. 그 한 면에는 ‘명(命)’자가 씌어 있고 다른 면에는 대상 관원의 관직과 이름, 도착해야할 연,월,일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임금의 수결(手決)이 찍혀 있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 명패를 내리면, 승정원관리는 이를 받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승정원에 보관하고 다른 한쪽은 부름을 받은 신하에게 보냈다.

이 패는 왕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패초를 받으면 지정된 시간 내에 입궐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수양대군이 패초를 사용해 당시 재상인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영양위(정종) 궁으로 불러 살해한 것은 유명하다.

<대전회통>의 규정에 의하면, 관원이 명패를 받으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궁궐까지 와서 그 명패를 봉납해야 했다. 단 대신(大臣)은 제외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어긴 자는 2품 이상이면 엄중히 추단하고, 정3품 통정대부 이하이면 의금부에서 추단하여 파직한다. 또 명패를 망가뜨린 자는 곤장 90대를 치고 도(徒) 2년에 처했다.

 

비록 ‘대신(大臣)은 제외한다’는 예외규정은 있었지만, 원래부터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패초해서 오지 않은 예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조선 쇠퇴기인 1700~1800년대에 들어오면 신하들이 패초에 응하지 않은 일이 잦았다.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다. 왕이 발령을 내면 예를 앞세워 사양하는 척 하며 패초를 어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 자체를 스스로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만연해졌다. 그래서 패초를 어긴 자는 태(笞) 50대를 친다는 규정도 생겨났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이 문제는 왕권의 강약, 당시의 정치적 환경 등을 가늠하게 하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영조집권기 후반에 들어오면 패초를 어기는 사건이 더 빈발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관리로 임용이 되면 패초를 받고도 저마다 핑계를 대고 약삭빠르게 피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특히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직에 임명된 대간들이 더욱 그랬다.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가 얽히면서 그 관직 자체가 언젠가는 당쟁에 휘말려 화를 입게 될 것이란 예단에서였을 것이다.

1766년(영조 42) 6월 15일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윤석주(尹錫周)가 패초를 어긴 죄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지평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는 막중하였다. 때문에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윤석주는 임금의 부름에도 시골에 있다며 거짓말하고 나가지 않았다. 후에 이를 알게 된 영조는 ‘신하들이 대간의 추천에만 오르면 모두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달아나니, 도적이 만약 쳐들어오면 이 무리는 모두 장차 달아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우겠는가?’라고 화를 내며 그를 장기(長䰇)로 유배를 보냈다.

패초를 어겨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같은 곳에 두 번이나 유배를 온 송영(宋鍈)이란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7대 할아버지인 송석범(宋碩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가 세 번째 명나라에 갈 때는 위험한 바닷길을 이용했는데, 북경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상원절(上元節·음력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먼 길을 온 그에게 친히 옥등(玉燈)과 주준(酒樽·술 항아리)을 선물로 내렸다. 이 집안에서는 이를 대대로 가보로 챙겨 내려왔다.

영조 때에 이르러, 송영은 주서(注書·승정원의 정7품 관직)로 있었다. 1754년(영조 30년) 2월 24일, 경연에 참석하는 신하들 중에서 누가 송영의 집에 가면 희한한 가보가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영조가 궁금하여 송영에게 그것들을 갖고 와서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송영의 아버지 송양필(宋良弼)이 등(燈)과 준(樽·항아리)을 가지고 입시(入侍)했다. 임금이 이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는 등과 항아리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영조는 송양필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7품 주서였던 송영을 특별히 6품으로 승진시켜줬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라고 여기던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나라가 있었다. 유교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질서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명나라에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론인 ‘존명의리’ 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물이 필요했다.

 

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은진송씨 비문. 은진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사신 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했다. 장기로 2차례나 유배를 왔던 송영은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영조와 정조, 순조 때까지 여러 차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은진송씨 비문. 은진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사신 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했다. 장기로 2차례나 유배를 왔던 송영은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영조와 정조, 순조 때까지 여러 차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숙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신종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로 궁궐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왕이 직접 제례를 올렸다. 이를 이어받은 영조는 명나라 태조와 의종을 제례의 대상에 추가시켜다. 태조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왕이었고, 의종은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줬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영조는 송영과 송양필에게 임금이 대보단에 제사지낼 때는 같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줬다. 원래 이 제사에는 삼학사(三學士)의 자손 및 오충신(五忠臣)의 자손으로 관직이 있는 자가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를 지내 오던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삼학사란 병자호란 때에 청국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곧 홍익한·윤집·오달제를 말한다. 이들 척화신(斥和臣)들은 청나라에 붙잡혀가서 끝끝내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참혹하게 죽었다. 오충신 역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척화를 계속 주장하다가 인조 20년(1642) 12월에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신익성·허계·이명한·이경여 등을 말한다. 이들의 틈에 송영이 끼인 것이다. 정조는 송영의 가족들이 대보단 제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황명(皇明)을 위하고, 충절(忠節)을 장려하는 뜻’이라고 했다.

영조의 송영에 대한 배려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72년(영조 48) 5월 9일, 송영은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였던 통례원(通禮院)의 통례(通禮·정3품)로 발령을 받았다. 관리로 임용한다는 패초를 받으면 직접 궁궐에 나아가 임금을 뵙고 이름을 아뢰고 공손히 절하여 인사를 올리는 절차가 있었다. 이를 ‘출숙(出肅)’이라고 한다. 그런데, 송영은 패초를 받고도 출숙하지 않았다. 영조는 출숙하지 않은 그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대보단.  창덕궁내에 있다가 1910년 조선통독부에 의해 철거되었다. 영조는 송영에게 임금이 대보단에 제사지낼 때는 같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줬다.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대보단. 창덕궁내에 있다가 1910년 조선통독부에 의해 철거되었다. 영조는 송영에게 임금이 대보단에 제사지낼 때는 같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도 줬다.

패초를 어겨 귀양을 보낸 경우는 통상적으로 1~2년 후에는 해배되었다. 이런 경우 임금은 다시 당사자를 불러올려 앞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임명한다. 귀양으로 이미 한 차례 명분이 축적된 데다, 시기하는 무리들도 매번 발목을 잡아챌 수가 없어 이때는 큰 저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송영의 경우도 1775년(영조 51년) 11월 17일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송영은 이번에도 왕이 부르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영조 말년 당시로 봐서 대사간의 역할은 잘해봐야 본전이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화가 난 영조는 패초를 어긴 그를 그날 바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다시 유배를 보내버렸다. 이래서 송영은 두 번이나 장기와 인연을 맺은 특출한 유배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로 왔던 그는 2개월도 채 안 된 1776년 1월 5일 싱겁게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런 송영이 정조 때에는 대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정조 초기인 1780년(정조 4년) 대사간으로 임명된 이래 1788년 1월까지 8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대사간으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였다. 대사간이란 사간원의 으뜸벼슬이었다.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국왕의 시종 신료로서 경연(經筵)·서연(書筵)에 참여하였다. 또한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5품 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서명하는 권리)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대사간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선호하는 요직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교체 시에도 지방관으로 폄출하지 않았으며, 승진 시에는 파직 기간도 근무 일수에 포함시켜 주었다.

송영이 대사간 직에서 물러나는 장면도 이채롭다. 1788년(정조 12년) 1월 5일, 정조가 송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등연(登筵) 때 난모(煖帽·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총칭)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체직시켜버렸다. 등연이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기 위해 신하를 소집하는 것이다. 이런 엄숙한 자리에 모범을 보이고 오히려 이를 규찰해야 할 대사간이 복장불량 상태로 나타났으니, 임금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그 후로도 송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여러 군데서 보인다. 병조참판과 형조참판 등으로 임용된 기록이 있는가 하면, 1793년(정조 17) 11월 28일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으면서 관아에 늦게 이르렀다 하여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796년(정조20) 3월 6일에는 의금부당상으로 있다가 법집행 실수를 이유로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4월 20일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풀려나기도 했다.

임금이 바뀌어 순조 때인 1808년(순조8) 2월 5일, 그는 다시 대사간에 임명이 되었으니 무려 영조,정조,순조 3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한 셈이다. 1812년 5월 대호군(大護軍·조선시대 오위의 종3품 관직)으로 있다가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졸기’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희대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