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 <上>

예술은 과학이나 수학 같은 이공 계열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맞고 틀리다의 정답이 없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은 대립과 논쟁이 있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에너지의 낭비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조의 음악을 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음악사 백년전쟁이라고 불리는 브람스의 절대음악파와 바그너의 극음악파의 대립은 말러와 부르크너와 같은 새로운 음악형태를 출현시켰으며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고수하던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콥스키를 위시한 ‘러시아 서방파’의 대립은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사회주의와 러시아의 냄새가 강한 음악경향들을 만들어 냈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초기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약소민족의 작곡가들은 민족에서 음악의 소재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민요 등 민속음악의 연구를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주의 음악이라고 부른다.

작곡가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과 성장배경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순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늘 소개할 드보르작은 후자에 속한 경우이며 그 음악적 힘은 순수함을 등에 업고 있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린 시절 학교의 음악시간에 드보르작을 처음 접하였는데 그 국적으로 되어 있는 ‘보헤미아’라는 지역은 너무나 생소했다. 드보르작은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네라호제베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보헤미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명칭은 사회적인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거나, 가난하고 하루하루 벌어 사는 노동자나 외국 이민자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드보르작은 성장기에 다른 작곡가와는 다른 특이한 경험을 한다. 그는 작은 여인숙을 겸한 정육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정육점의 가업을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음악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묵살하지 않고 순응하여 정육점을 경영할 수 있는 ‘정육면허’를 가지게 된다. 드보르작의 부모는 그의 아들을 음악가로 키울 생각이 없었지만 장사를 위한 독일어 교육을 위해 집안에 들인 교사가 음악가였다. 드보르작은 다양한 국적의 손님들이 오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여인숙에서 자주 연주를 하였으며, 이것은 드보르작 자신도 오가는 여행객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여 자신의 프리즘으로 흡수하는 것은 이후 드보르작의 음악이 세계화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16살이 되어 프라하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지만 졸업 후 34살이 될 때까지는 카페와 술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 주최의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지원한 일이다. 이 공모전에서 당시 유럽 음악계의 보증수표였던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으며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작품을 자신이 잘 알던 출판업자인 짐 로크에게 적극적으로 출판을 추천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도 추천하여 이후 안정되게 자신의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드보르작은 쇼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작곡가였다. 첫 출판된 그의 작품에 작곡가명이 ‘안토닌 드보르작’이 아닌 독일식인 ‘안톤 드보르작’으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악보를 많이 팔기 위한 출판업자의 꼼수(?)였다고 생각된다. 드보르작은 강하게 항의하여 결국은 원래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정정하였다. 이후 1884년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빈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많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것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대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동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말엽,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작곡가들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과 차출을 찬양하는 곡을 쓰며 친일행적을 한 것과 애국가의 작곡가마저 친일 논쟁에 휘말려 있는 것을 본다면 드보르작이 한 행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