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의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보인다
20. 이색·이염의 모반사건과 권혜·권집 모반사건

장기 배일대(拜日臺). 장기읍성 동문 해맞이 장소에 있다. 장기일출은 육당 최남선의 ‘조선10경가’에 등장할 만큼 조선 내내 유명했다. ‘이 어둠 이 추위를 더 견디지 못할세라. 만물이 고개 들어 동해동해 바라볼 제. 백령(百靈)이 불을 물고 홍일륜(紅日輪)을 떠받더러. 나날이 조선 뜻을 새롭힐사 장기일출’ 가사 속에는 혼탁한 세상이지만 뜻을 합쳐 희망찬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원대한 뜻이 담겨있다.

어떤 이는 영·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탕평책을 실시해서 붕당의 폐해를 줄이려 했고, 세금 부담을 들어주기 위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신문고를 부활하는가 하면 학문과 제도를 정비했고, 많은 책을 펴내 문화발전에 도 기여를 했다. 규장각을 짓게 하고 정약용, 박제가 같은 숱한 인재들도 나왔다. 새로운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실학이 점차 뿌리를 내린 것도 이시기였다.

이런 치적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통치한 18세기는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역모사건이 많았다. <정감록>과 같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예언한 서적들이 급속하게 퍼져 나간 것도 이때였다. 이들 비결서(秘訣書)들이 역모세력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때의 ‘역모사건’이란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말한다. 현재로 치면 정치적 집단 간의 정견의 차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모나 집회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유배객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모두가 역모사건에 엮였거나 아니면 연좌된 그 가족들이었다. 1748년(영조24) 2월 29일 장기로 온 심해용(沈海容)과 1760년(영조36) 3월 21일 유배를 온 이광필(李光弼)은 이색·이염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 또 1755년(영조 31) 3월 17일에 장기로 온 이차원(李次願)은 권혜·권집의 모반사건에 연좌된 왕실의 여자였다. 이 두 사건의 당색은 1728년(영조4) 3월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과 맥을 같이했다. 무신당(戊申黨)과 뜻을 같이하는 남인계열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영조의 기치를 내걸고 모반을 시도했던 것이다.

무신난 잔당들은 하나같이 백성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괘서를 내걸었다. 이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다. 정감록에는 ‘조선은 운명이 다했으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다’는 예언이 적혀있었다. 이는 기존의 도참설에 비해 역성혁명과 이상사회의 지향에 대한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기에 난의 주모자들은 이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했다.

흔히 무신난의 핵심인물로는 이인좌를 꼽지만, 그에 못지않게 황진기(黃鎭紀)란 불가사의한 인물이 있었다. 선전관으로 있다가 무신난에 가담했던 그는 이인좌와는 달리 그때 잡히지도 않았다.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인 <정감록>. 이 책은 역모사건 때 마다 사상적인 틀로 자주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인 <정감록>. 이 책은 역모사건 때 마다 사상적인 틀로 자주 이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황진기는 역적임에도 지략과 검술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황진기 아버지 황부(黃溥)는 함경도 경흥부사(종3품)로 무신난에 가담했다가 1728년(영조4) 6월에 잡혀 죽었다. 그는 죽었지만 아들 황진기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백성들의 이상향을 충족시켜줄 구심체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졸지에 나타난 황진기는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과 함께 그 시대의 ‘메시아’요 ‘미륵’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동해 가운데 삼봉도(三峯島)라는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은 둘레가 매우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옛날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나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라고 했다. 황진기는 이 섬에 살고 있었다. 때가되면 가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해 망명 역적인 그가 장군이 되어 진인(鄭眞) 정씨를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청주와 문의(충청도 청원군 문의면)가 먼저 함락되고, 곧이어 한양이 함락될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는 이(李)씨 대신에 정(鄭)씨가 들어서서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새 세상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게 이른바 해도진인(海島眞人) 설이다.

황진기가 등장하는 해도진인설에는 전설의 저 편으로 숨은 아틀란티스와 같은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그곳은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나라가 부유해 백성들은 세금 걱정이 없었다. 강력한 군대가 있어 전쟁걱정도 없었다.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초(超)고대문명이 전설만을 남기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바로 아틀란티스 이야기다. 해도진인설에 등장하는 미지의 섬 ‘삼봉도’는 조선의 아틀란티스였다. 조선지배층의 부패와 부조리, 차별 등을 타파하고 삼봉도에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타난 황진기는 그래서 모든 백성들의 구세주요 영웅이었다. 대부분의 모반사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신난으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흐른 1745년 12월, 황진기는 충청도 서산에 있는 가야산 백암사(白巖寺)의 승려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무신난 때 핵심역할을 하다가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끌어 모았다. 황진기는 이들을 이끌고 전라도 낙도(樂島)에서 영조 타도를 외치며 또다시 봉기를 했다. 이들은 황해·평안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불러들여 평안·함경도 북변(北邊) 땅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난의 주동자들이 모두 잡혀 영조의 친국을 받고 능지처사되었지만, 이번에도 황진기는 청(淸)나라로 도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흔치않은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황진기가 이미 처벌된 무리의 일당들과 연락해서 다시 역모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를 잡기 위해 청나라로 군사를 보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황진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황진기는 ‘평안도에서 중이 되었다’ ‘충남 가야산에서 은둔했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고, 20년이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때 180여 개에 달했다던 충남 가야산의 절집은 그가 도피했다는 풍문이 돈 이후에는 거의 폐사가 됐다고 한다.

조정은 황진기 대신 그의 가족들을 잡아와 고문을 하고 닦달했다. 1752년(영조28) 11월 9일에는 황진기의 아들 황영(黃英)이 붙잡혀와 포도청에서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 하지만 황진기는 그 후 수많은 수배령에도 끝내 붙잡히지 않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745년(영조 21) 10월, 무신여당 이색과 이염 등이 모반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영조의 친국을 받았다. 흉서를 만들어 한양에서 퍼트리다가 붙잡힌 것이다. 이색은 무신난에 가담한 이순관(李順觀)의 친척으로 남인계열이었다. 이염 역시 무신난에 연루되어 능지처사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였다.

이들이 지은 흉서의 내용에도 황진기가 등장한다. 황진기가 칠보사(七寶寺)의 중이 되었다가 모반하여 승군을 조직하였고, 그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북변을 할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색은 황진기가 지금은 환속해서 무산(茂山)에서 살고 있다며 민중을 선동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말을 믿고 육진(六鎭) 일대 지리에 익숙한 오위장 이양중(李陽重)에게 명하여 황진기를 붙잡도록 했다. 이양중이 국경지대로 나가 탐문했으나 헛수고였다.

이색·이염의 괘서사건은 모반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당사자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능지처사되었다. 이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온 심해용은 역적으로 몰린 이색의 생질이었다. 이색과 이염은 이미 3년 전에 처형되었지만, 1748년에 와서 심해용도 그때의 역모사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이 괘서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 여파가 미쳐 1760년(영조36) 3월 21일 이광필이 같은 무리로 몰려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 그는 고치룡(高致龍)과 중(僧) 청윤(淸潤) 등과 함께 잡술(雜術)을 가지고 나쁜 무리들을 종용하였다는 이유였다.

한편, 1748년(영조 24) 11월에는 권혜(權嵇) · 권집(權鏶)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권혜는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외손자로서 당시 열여덟 청년이었다. 이증은 효종의 4세손으로, 영조와 8촌간이다. 영조의 근친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증은 영조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 1743년 이증은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과 더불어 사도세자의 관례(冠禮)를 주재하기도 했다. 영조는 이증의 집 사당에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 의창군, 인조의 막내아들인 낙선군의 신위 뿐 아니라,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신위를 옮겨 제사를 지낼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런데 1748년 11월, 이증의 집 묘당(廟堂)에서 괴이한 투서가 발견되었다. 국문(鞫問)결과 놀랍게도 그 투서는 이증의 동생인 이학(李學)과 외손인 권혜·권집 형제가 작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증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역모혐의를 덮어선 이증은 삼사로부터 집요한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55년(영조 31)까지 삼사의 끈질긴 탄핵이 이루어졌다. 그해 3월 17일 이증의 딸이자 권혜의 어머니인 이차원(李次願)이 이 사건에 연좌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이는 왕실의 딸이 장기로 유배를 온 최초의 사례가 된다.

 

청주시 상당산성 남문. 황진기는 이인좌 등과 함께 봄비가 내리는 1728년 3월 15일 밤에 청주읍성을 점령한 후 이튿날 이 상당산성도 접수하게 된다. 무신난에서 살아남은 황진기는 백성들에게 미륵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청주시 상당산성 남문. 황진기는 이인좌 등과 함께 봄비가 내리는 1728년 3월 15일 밤에 청주읍성을 점령한 후 이튿날 이 상당산성도 접수하게 된다. 무신난에서 살아남은 황진기는 백성들에게 미륵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처럼 18세기부터 일어난 각종 반란이나 대규모 민란에는 거의 <정감록>이 등장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만민 평등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정감록>의 예언은 조정에서 밀려난 양반들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에게 조선판 ‘유토피아’였다.

돌이켜보면, 조선 후기 백성들은 자연재해에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정치도 평탄치는 않았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 법전을 정비하며 혼탁한 사회를 정비하였다고는 하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당파싸움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무리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정계에서 배제된 양반들이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거사를 추진했다. 이들은 이상사회 구현을 목표로 삼았다. 이때마다 <정감록>이 사상적 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반체제 변혁 운동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에도 18세기 조선의 지배계층은 위기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영·정조라는 현명한 군주와 함께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학문 또는 예술의 부활을 꿈꾸며 백성들의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그저 부덕하고 불손한 역모자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왕조체제 붕괴라는 무서운 대가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대가는 시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 왕실과 조정 뿐 아니라 힘없는 민초들까지도, 꺼져 들어가는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