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상지 클뤼니.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의 시골마을 클뤼니(Cluny)를 찾아가야만 한다. 오늘날 인구가 채 오 천명이 되지 않는 이 시골 마을이 과거 한때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혹은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클뤼니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이 한때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는 것과 제2의 로마로 불렸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다.

때는 카롤링거 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서유럽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던 시기였고, 사회는 전반적으로 불안정 하였다. 이 시기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상 또한 극에 달해 있었다.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행위는 너무나 공공연한 일이었고,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왕과 교황은 서로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910년 열두 명의 수도자들이 마콩강에서 멀지 않은 경건공 기욤(875∼918)의 땅 클뤼니에 들어왔다. 이들은 성인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 살기위해 수도원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Ora et Labora’(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부터 그 위대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910년 처음 문을 연 클뤼니 수도원은 개혁의 여파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맞춰 수도원 교회를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이루어졌다. 건축사에서는 원래의 교회와 훗날 개축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클뤼니I, II 그리고 III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클뤼니I은 910년 수도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모습을 가리킨다. 981년 마이올루스(Maiolus) 수도원장 하에 개축된 건물을 클루니II, 위고(Hugo)가 수도원장을 지내던 1089년에 완성된 모습을 클뤼니III이라고 부른다.

클뤼니 II는 상하로 긴 라틴식 십자가형의 기본 구조를 지니는 3랑식 바실리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좌우로 가로지르는 익랑을 마주한다. 익랑에는 외부로 출입이 가능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제단방향으로 밀폐된 느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이곳을 통하여 제단이 있는 내진으로 접근할 수 있다.

클뤼니 III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크기가 커짐에 따라 내부구조에도 큰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 3랑이었던 클뤼니 II에 두 개의 측랑이 더 붙으면서 5랑이 되었다. 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다. 원래는 신랑 측랑 모두에 평평한 나무 패널이 천장을 덮고 있었는데, 이제 측랑에는 ‘교차형 궁륭’이 나타난다. 클뤼니 II는 하나의 익랑을 가졌지만 클뤼니III에서는 익랑 하나가 더 설치되어 십자가에 팔이 모두 넷으로 늘어났다. 구조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후진의 외벽에 모두 다섯 개의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는 것과 내진과 후진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주보랑’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은 종교적 쇄신으로 유럽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클뤼니 III이 보여주는 건축구조는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일 드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건축의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클뤼니 교회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과거의 위용과 웅장하고 장엄했던 모습은 폐허로 변해버렸고 지금은 그 흔적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