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면 소재지 전경. 명신 양희지가 자처하여 찾아와 은거하였던 장기. 그는 이곳에 ‘의리와 명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갔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 준 세력들이 있었다. 세조는 이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43명에게는 정난공신, 왕위를 잇는 데 일조를 한 44명에게는 좌익공신이란 훈호를 각각 줘서 우대했다. 한명회 등 이른바 훈구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한때 이들은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들로부터 정치적 도전을 받긴 했으나, 유자광의 고발로 남이가 제거된 이후에는 더욱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1469년 음력 11월 28일, 나이 열세 살의 성종이 즉위했다. 수렴청정에 나선 정희왕후도 훈구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정희황후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 등 73명을 좌리공신으로 책봉해 우대해줬다.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 어린 임금을 더욱더 잘 보좌해 달라는 취지에서였다. 이제 조정은 훈구세력들이 좌지우지했다. 권력자들이 늘어나자 이에 비례해 권력다툼과 부정부패가 덩달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훈구파가 있는 반면에 사림파가 있었다. 사림파는 여말(麗末)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간 선비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살며 성리학을 사상의 기반으로 삼고 유교 경전을 중시했다. 또 의리와 명분, 절개를 강조했으므로 당연히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것에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들이 중앙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제9대 성종 때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있던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의 관리로 등용했다. 당시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김종직이었는데, 그는 고려에 절개를 지켜 경상도에 낙향했던 길재의 학풍을 이은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들로는 정여창,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 등이 있었다.

정치적 일선에 나선 사림파는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규탄하였고,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까지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에도 맞섰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야생귀족(野生貴族)들인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다. 태생부터가 서로 다른 두 집단 간의 반목은 성종을 거쳐 연산군에 이르자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릴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대봉선생문집에 실린 행장. 방축향리(放逐鄕里)를 자처하여 장기로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대봉선생문집에 실린 행장. 방축향리(放逐鄕里)를 자처하여 장기로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대립 속에서 유자광과 김종직 간에도 묵은 감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록에 사관이 써둔 일화가 있다. 경남 함양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이 누각은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자주 올랐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유자광도 함양을 유람하다가 학사루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이곳에 걸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현판은 곧 사라졌다. 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된 김종직이 이를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며 당장 떼어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유자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김종직의 유자광에 대한 모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제자들이 송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인사를 왔다.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옆에 있던 제자 홍유손(洪裕孫)이 그에게 ‘누가 현판을 해서 걸어줄지도 모르니 시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다. 홍유손은 나이가 제일 어린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가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유자광을 조롱한 것이었다. 어쩌면 유자광이 김종직과 그 일파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자광이 이들에게 복수할 기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이 즉위하고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사초를 편수(編修)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사초를 보다가 김일손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며 ‘신하로서 바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기술해 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그 내용을 빼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김일손은 이극돈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극돈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이야기가 더 있는지 사초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러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쓴 글로 중국 초나라의 항우라는 사람이 의제라는 왕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을 슬퍼하는 제문이었다. 여기에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은근히 비꼬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극돈은 유자광에게 달려가 이 일을 알렸다. 그는 당장 조정의 원로대신들인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을 찾아갔다. 훈구파를 이끌고 있던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 밤 바로 대궐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고변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에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일러바쳤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때를 맞춰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적 무기였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다. 이어서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조위(曺偉)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앞서 유자광을 조롱하였던 홍유손도 당연히 체포되어 종의 신분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로써 유자광은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사림들을 탄압함으로서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 이 사건은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이쯤에서 양희지((楊熙止)란 인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1432년에 순창군수를 지낸 양맹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객지를 전전하다 울산에 살고 있던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종근의 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울산에서 살게 되었다. 1474년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476년 6월 채수·허침·권건·조위·유호인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는데, 김종직이 축하 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1478년 홍문관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있을 때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1486년 모친의 3년 상을 마친 뒤 예조좌랑에 임명되어 벼슬할 뜻이 없었으나, 김종직과 김굉필이 편지를 보내 간곡히 권하므로 벼슬에 나가기도 했다. 양희지는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자 도학정치의 길을 연 조광조를 김굉필의 문하에 들게 한다.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해 겨울 조광조에게 희천까지 김굉필을 찾아가게 한다.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혼신의 힘으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맥을 잇게 했다. 이런 행적으로 봐서 양희지는 사림파 계통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양희지는 상의원(尙衣院)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대사간으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무호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관직을 사직하였다. 문제가 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양희지를 배향하는 오천서원(梧川書院). 대구시 수성구 파동 433 무릉계곡 내에 있는 서원이다.
양희지를 배향하는 오천서원(梧川書院). 대구시 수성구 파동 433 무릉계곡 내에 있는 서원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500년 2월, 양희지는 다시 복관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던 그해 5월, 그는 무오사화와 같은 원옥(寃獄)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무오사화 때 북쪽 변방으로 유배보냈던 사람들을 남쪽지방으로 이배(移配)시킬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과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조위가 함경도 의주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특히 조위는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49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양희지의 상소로 순천으로 배소가 옮겨진 뒤, 조위는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이런 양희지의 일련의 행위들은 훈구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양희지의 문집인 <대봉집>(大峰集)에 실린 ‘행장(行狀)’을 참고하면, 그는 1500년 5월에 위에 언급한 상소가 문제되어 노사신·유자광의 탄핵을 받았다. 양희지는 이들로부터 역적을 비호한다는 호역(護逆) 죄목에 몰려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그해 9월, 신수근의 변호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삭직(削職)되었다. 관직을 뺏긴 양희지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방축(放逐)을 ‘자처(自處)’하였다. ‘방축’이란 유배이긴 하나, 통상적인 유배보다는 한 등급 감경하여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 쫓는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말한다. 그런데 양희지의 고향은 장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울산에서 살았고, 그의 나이 40세 전후 때 가족들이 대구로 옮겨가서 살았다. 위 행장에 ‘자처(自處)’해서 장기로 와서 은둔을 했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자원안치(自願安置)의 성격이 짙다. 자원안치란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를 말한다. 어쨌거나 그는 1502년에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었으므로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고 보아진다. 장기를 떠난 후 양희지는 1503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종2품)으로 재임하다가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83년이 지난 1786년(정조 10)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양희지는 훤칠한 풍모와 맑고 시원한 기상이 있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성품 또한 청백하여 조선 500년 역사상 흔치않은 명신(名臣)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사표로 삼아야 할 한 위인이 무오사화로 인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됨됨이, 즉 ‘인품의 향기’를 장기 땅에 뿌려놓고 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