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며칠 전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SNS에 ‘죽창가’를 언급했다. 이 메시지는 아마 한국을 압박하려고 부당한 무역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국론을 하나로 모으자고 하는 뜻일 것이다. 죽창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시 민초들의 삶의 배경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당시 구한말의 정치, 경제구조의 진실을 냉철히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정조시대 후기로 이어오면서 60여 년간 세도정치로 국고는 텅 비고 모든 산업은 위축되었다. 백성들은 심한 기아에 시달렸으며 나라가 순식간에 빚더미가 되자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알고 고종의 비(妃)로 명문이면서도 몰락하여 일가가 없고 그 세력이 미미하며 부모가 일찍 죽어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민치록의 외동딸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이 왕비가 바로 민비이다. 민자영이 왕비가 되자 갑자기 없던 친척이 수없이 몰려들었고, 이들에게 같은 민씨라는 이유로 요직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내렸다. 당시 기록에는 뇌물을 바치고 지방의 사또가 되어 가는 사람이 미처 남대문을 나가기도 전에 더 많은 뇌물을 바친 다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은 뇌물을 좋아했으며, 대신들을 임명하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 관리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는 기록도 있다. 전국의 큰 고을이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됐다고 쓰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었고, 당시 뇌물 5만 냥으로 벼슬을 산 자가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다. 탐관오리 중 으뜸이었던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아버지의 공덕비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걷고 노역을 시키는 등 민초들을 괴롭혔다. 이 폭정에 견디지 못한 고부군 사람들은 전봉준 아버지인 전창혁을 대표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질뿐이었다. 곤장으로 인해 전창혁은 거의 죽은 상태로 돌아와 며칠 안 되어 죽고 말았으니 이에 분개한 아들 전봉준이 1894년 1월 동학농민들을 주축으로 봉기했다.

전주성 함락으로 크게 놀란 조정은 청나라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자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한다. 하지만 무능한 고종과 대신들의 이런 잘못된 결정은 바로 다음 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적 사실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전투’에서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 스나이더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2만여 동학군은 대부분 조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했으니, 이건 전투가 아닌 제노사이드(학살)였던 셈이다. 농민군이 대패하고 1895년 3월 전봉준이 처형될 때까지 그렇게 1년 만에 동학농민전투는 막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할 것은 일본군이나 죽창이 아니라 상무정신이 없고 문약했던 관리들, 권력에 줄서서 백성의 고혈을 빠느라 정신이 없었던 당시 부패한 사회구조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이 무능한 집권세력을 향해 죽창을 든 것이다. 민정수석이 올린 죽창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라는 주사파 일원으로 스스로 전사라 칭하며 남조선 우익 200만은 학살해야 한다던 김남주가 작사했다. 민중해방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민비는 2000년대 ‘명성황후’라는 오페라에 의해 부패와 악질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조선의 국모’로 변해버렸다. 동학농민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이 각자 입맛에 맞는 해석으로 국민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