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민음사 펴냄
시선집· 1만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제공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20세기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문학과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보르헤스는 ‘픽션들’, ‘알레프’ 등의 단편소설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가였고, 생전 주제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를 남긴 산문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나, 무엇보다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를 첫 책으로 내며 문학 여정을 시작한 시인이기도 했다.

최근 민음사에서 출간한 그의 시선집 ‘창조자’는 라틴아메리카 문학 연구 및 번역에 앞장서 온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교수의 번역으로 이뤄졌다.

‘창조자’는 보르헤스 만년기의 대표 작품집 ‘창조자(El Hacedor)’(1960)의 주요 수록 시와 보르헤스 시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별도의 여섯 편을 함께 엮었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축복의 시’에서

보르헤스의 시 세계는 그의 나이 30세였던 1929년과 50대 중반이었던 1955년 이후, 즉 청년기와 만년기로 나뉜다. 이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은 시력 상실이다. 특히 ‘창조자’는 보르헤스가 눈먼 후 공동 저작 외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갑자기 암흑세계에 빠진 심경을 최초로 드러낸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이러한 ‘눈먼 도서관의 주인’ 보르헤스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보르헤스 역시 자신의 내면 세계가 가장 진하게 녹아 있는 작품으로 주저 없이 ‘창조자’를 꼽았다. 단편소설의 플롯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작가의 자기 고백적 목소리는 보르헤스 문학의 미로를 푸는 열쇠가 바로 시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 ‘거리’에서

청년기의 보르헤스는 ‘울트라이스모’(일종의 전위주의 운동)를 제창해 모더니즘 일변도였던 아르헨티나 문단 쇄신에 앞장섰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간,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지방색이 강한 자유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눈먼 후 만년의 그는 정형시에 주력했다. 운율과 리듬을 맞추는 것이 기억과 구술에 의존해야만 했던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텍스트에 대한 집요한 검열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혹자는 그가 일생 동안 청년기 시에 수차례 개작을 거쳐 ‘울트라이스모’와 지방색을 없앤, 아예 새로 쓴 다른 시가 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번‘창조자’에 수록된 청년기 대표시는 개작 전 초판본을 번역했다. 보르헤스 애독자라면 누구나 찾아보고 싶었던 초기 보르헤스 시의 전위적인 작품부터 가장 잘 알려진 보르헤스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후기 시의 원숙함까지 한 권에 담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