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몽진 당시의 정세

1360년 홍건적은 해로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침입하는 한편 요동 지방에서 활동하던 홍건적의 대부대는 원(元)의 상도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원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의 양 방면에서 홍건적을 포위해 압박하자 궁지에 몰린 홍건적은 진로를 고려로 돌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결전을 치러야만 했다.

공민왕 10년인 1961년 10월 20일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이들이 5일 만에 삭주를 거쳐 이성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홍건적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부를 편성했다. 방위군을 전진 배치하는 한편 각 도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선비와 향리가 출전을 자원하면 관직을 주고 천민이 출전을 자원하면 양인 신분을 주는 우대를 통해 전투 병력의 확충에도 팔을 걷었다.

그러나 1차 홍건적의 난을 비교적 쉽게 제압한 바 있는 상원수 안우와 도지휘사 이방실 등이 지휘한 고려군은 홍건적을 다소 과소평가했다. 청천강 방어선에 머물던 고려군은 홍건적이 한꺼번에 대부대를 남하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를 게을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중과부적으로 고려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홍건적은 놀라운 기세로 남하했다. 패배와 퇴각을 거듭한 고려군이 개경까지 퇴각하자 고려 조정은 개경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눈보라 맞으며 초라한 몽진

파천 계획에 따라 고려조정이 부녀자와 노약자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자 개경 도성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최영과 이방실 등 무장들은 공민왕과 문신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앞을 가로막고 도성의 사수를 주장했다. 최영 등이 국왕의 파천을 반대한 것은 국왕이 조정을 지켜야 군대의 사기가 유지되고 의병모집도 쉬워지며 그래야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신들은 개경의 성곽이 불완전하고 비축된 양곡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천을 강행했다. 이때 최영은 통분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주상께서 개경에 머물며 종묘와 사직을 지키셔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결국 겨울이 닥쳐오는 11월 19일 공민왕 일행은 개경을 떠났다. 20일 파주 분수원과 양주 영서역을 거쳐 21일에 광주 사평원에 도착했다. 당시 이 지방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고 고을의 행정책임자만이 쓸쓸이 남아 왕을 맞았다. 이천에 이른 24일에는 눈과 비가 함께 섞여 휘몰아치는 궂은 날씨여서 공민왕은 옷이 눈비에 젖어 얼어붙자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는 등 초라함을 면치 못했다. 25일 충주 북쪽의 음죽에 도착했지만 발길이 닿는 지방마다 관리와 백성은 도망친 뒤였으므로 공민왕 일행의 고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백성들의 외면과 함께 피란 중 전해진 수도 개경 함락 소식은 공민왕으로서는 그야말로 뼈 아팠을 것이다.

안동에 이르러 비로소 극진한 대접

거쳐 온 지방마다 국왕의 지위에 걸맞은 대접은커녕 눈보라를 뚫고 갖은 고생만 겪은 초라한 몰골로 왕은 충주와 문경을 거쳐 예천과 용궁을 지나 12월 25일 한 달 정도 만에 복주(福州: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의 초입인 송야천에 공민왕이 이르러 다리가 놓이지 않은 냇물을 건너야 할 상황에 놓이자 추운 겨울 이 곤란한 장면을 본 안동의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 인교(人橋)를 만들어 노국공주 일행을 건너게 했다고 전설로 전한다. 이는 다른 고장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극진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깃발을 앞세우고 관복 행렬이 줄지어 나타나 왕을 맞이하고 궁궐을 정해 어가를 모시니 공민왕이 비로소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민왕 일행은 그동안 지나온 다른 고장과는 달리 안동에서는 고을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안동의 목사였던 김봉환과 토착세력은 주민들과 힘을 합쳐 공민왕을 성심껏 보위하면서 재기에 필요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은 나중에 수도 개경을 수복한 것을 두고 안동 주민들의 정성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실제 공민왕은 안동의 주민 대표들에게 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 귀중품을 하사했는데 이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선했던 무신에게도 노국공주의 반대로 하사하지 못한 귀중품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시 안동의 안기역 관리들에게도 여러 종류의 귀중품을 하사했다. 개경에 환도한 뒤 안동과 안동 주민들의 따뜻한 대접을 잊지 못한 공민왕은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대도호부란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행정단위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손수 붓과 벼루를 가져다가 자신이 몽진의 시름을 달랬던 안동의 누각에 `영호루(映湖樓)`의 현판을 써서 내려 걸어두도록 했다.

임시수도는 왜 하필 안동이었나

안동은 고려의 건국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수세에 몰리자 찾은 곳은 안동이었다. 태조 13년 안동지역의 토착세력인 삼태사(三太師)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안동부로 승격됐다가 다시 영가군(郡)으로, 성종 14년 길주자사(吉州刺史)로 바뀌었다가 현종 3년 다시 안동부라 했다. 이후 명종 27년 김사미와 효심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안동부에서 평정한 공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7년 동경 야별초의 패좌 등이 일으킨 반란을 막아낸 공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이후 다시 복주목으로 고쳤다가 공민왕에 의해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이 같은 안동의 지명변천 및 승격과 강등의 역사적 사실로 미뤄 안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지방지배의 핵심이자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안동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점을 가진 지역이었다.

홍건적은 북에서 처내려왔기 때문에 주변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에워싼 안동의 지형은 적의 날랜 기병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상당했다. 또한 내륙이라는 특성으로 서남해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의 침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식량은 물론 철을 비롯한 각종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이외에도 안동은 수차례 반란을 제압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 충성과 의리가 가장 뛰어난 고장`으로 고려 왕실은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란을 맞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된 안동은 왕을 보필해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수도를 떠나는 몽진이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왕의 방문지라는 강한 자부심을 안동사람들은 지녔고 지금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태원·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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