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참교육’의 교실은 무너져 있다. 수업은 조롱거리가 되고, 폭력은 자랑이 된다. 가해 학생은 든든한 뒷배를 믿고, 교사는 입을 다문다. 그 폐허 속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온다. 그는 선생 편도, 학생 편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피해자의 편이라고. 통쾌하다. 그러나 통쾌함이 가시고 나면 서늘한 질문이 남는다. 왜 이 일을 가상의 조직이, 가상의 인물이 대신해야 하는가. 현실의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실 드라마의 악당은 그리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다. 폭력을 보고도 고개를 돌리는 동료, 민원이 두려워 사건을 덮는 관리자,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이웃. 우리는 언제부턴가 곁눈질하는 법을 배웠다. 나서면 손해라는 것을, 침묵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단테는 지옥의 문 앞, 천국도 깊은 지옥도 받아주지 않는 자리에 한 무리를 세워 두었다. 살아서 칭송도 비난도 받지 못한 자들, 끝내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자들이다.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을 두고 말한다. 입에 담지 말고 그저 보고 지나가라.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잊히는 것, 그것이 방관의 값이었다.
그런데 요즘, 오래 잠잠하던 무언가가 움직인다.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 선거 직후,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을 가득 메웠던 이들의 절반은 2030이었다. 그들은 부정선거 음모를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구호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 정도면 됐다’는 말이다. 한 표의 무게를, 절차의 공정을 그렇게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썼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고.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어쩌면 어른은 나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의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른의 자리는 비싸다. 우리 지역 대안학교 교장은 어긋난 한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세우려 애썼다. 돌아온 것은 몇 년째 이어지는 소송이었다. 학교는 휘청이고, 정작 그 학생도 학부모도 끝내 보호받지 못한다.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는 엉뚱한 곳으로 번진다. 같은 교실의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까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정의로운 행동을 거듭하며 정의로워지고, 용감한 행동을 거듭하며 용감해진다고 했다.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길러지는 습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용기 낸 한 사람만 대가를 치르고 나머지는 등을 돌리는 사회에서는, 그 습관을 기를 어른이 점점 사라진다.
진짜 어른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두려우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진짜 어른은 용기 낸 사람을 혼자 세워 두지 않는다. 손을 든 교사 곁에, 광장에 선 청년 곁에, 소송에 휘말린 교장 곁에 한 사람이라도 더 서는 것. 그 작은 동행이 사회를 떠받친다. ‘참교육’의 통쾌함이 끝내 드라마 안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패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다. 곁눈질을 멈추고 피해자의 편에 서는, 평범한 어른들의 용기다.
/이다영 포항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