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나쁜 선거제도라는 낙인이 찍혔다. 정권을 맡아본 책임 있는 양대 정당이 위성정당이라는 희대의 정치 사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 선거법은 2019년 12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을 통해 도입됐다. 그러고는 이듬해 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으로 손가락질받으면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수의 목소리도 존중하고, 국정에 반영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소선거구제로는 국민 여론을 그대로 반영하기가 어렵다. 여론조사 상 오차 범위 안의 작은 차이로도 특정 정당이 의석 대부분을 독차지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상당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어도, 1등을 차지한 지역이 없으면한 석도 얻을 수 없다.
22대 총선으로 민주당이 거대 의석을 차지하고, 독주하는 이유다. 서울 지역구 선거에서 민주당은 52.26%, 국민의힘은 46.30%를 획득했다. 그런데 당선된 지역구 의원은 민주당 37명, 국민의힘 11명이다. 5.96%의 박빙 선거였지만, 의석수는 무려 세 배나 차이가 났다. 이런 불균형을 개선하자는 제도다.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제1정당이 힘으로 밀어붙였다. 야당의 동의를 얻으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했다. 최근 민주당이 국회를 운영하는 행태의 씨앗이 된 셈이다. 선거법은 게임의 규칙이다. 게임 참가자들이 동의해야 한다. 권위주의 정부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의석이 조금 더 많다고 게임의 규칙마저 마음대로 바꾸려 했다. 공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게임 참가자들이 탐욕 덩어리였으니, 더더욱 그렇다.
민주당은 정의당을 이용하고, 뒤통수를 쳤다. 아무리 능소능대(能小能大)하고, 속여먹기를 밥 먹듯 하는 정치판이라지만, 신뢰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민주당은 정의당을, 선거법을 야당과 함께 개정했다는 명분으로 삼았다. ‘연동형’을 미끼로 공수처법과 검찰 수사권 조정에도 정의당이 동의하게 했다. 정작선거판이 벌어지자, 민주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정의당을 존폐 위기에 몰아 넣었다.
지난달 7일에는 민주당이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개정안을 보면 그리 문제 될 게 없다. 부마항쟁과 5·18 민주주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반영하고, 비상계엄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에 악용할 수 없도록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전부다. 국민적 공감대가 큰 내용이다.
야당이 반대할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처리하지 못했다. 헌법 개정에 진심이라면 충분히 야당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합의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헌법마저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충분한 숙의 시간이 없었다. 그럴 정도로 시급한 문제인지 의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비상계엄을 쟁점으로 부각하려는 꼼수라는 오해를 자초했다.
이틀 뒷면 지방선거가 끝난다. 전국적인 승패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지역 쟁점보다는 중앙정치의 바람이 거센 선거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지역에서 모두 떠안아야 한다. 우리 시·도, 우리 시·군·구의 현안은 우리, 지역민의 문제다. 선거 때 대통령까지 나서서 지역 문제에 사탕발림했지만, 선거 이후에도 그런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국회는 거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얼마나 무리하게 독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지방의회는 그렇게 될 소지가 더 크다. 단체장과 같은 정당 출신 지방의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지역이 많다. 추진력은 강할지 모르지만, 견제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부패가 감춰진 채 만성화할 위험이 있다. 많든 적든, 야당은 무조건 발목만 잡으려 할 수도 있다.
한국적 합의제 정신이 더욱 절실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언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정말 한국적 민주주의는 소수의 목소리도 존중하는 전통이다. 민주당처럼 다수결 만능주의라면, 상임위원장을 독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1988년 첫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은 절제할 줄 알았다. 의장을 집권당에 넘기고, 상임위원장도 의석수로 배분했다. 지역 정치에도 이런 ‘K-민주주의’의 합의제 전통이 필요하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