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흘려보낼 때 파이프 내부가 매끄러울수록 물이 잘 흐르듯, 물질이 깨끗하고 질서정연할수록 전자가 더 잘 이동한다는 것은 과학계의 오랜 상식이었다. 하지만 국내 연구진이 이 상식을 뒤집고 오히려 특정하게 배열된 ‘무질서한 구조’가 전자의 흐름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포항공과대학교(이하 포스텍) 기계공학과 진현규 교수와 물리학과 이현우 교수 공동 연구팀은 서로 다른 구조가 섞인 자성 물질에서 전자 흐름이 예상보다 훨씬 강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고 9일 밝혔다.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가로 방향 전자 수송’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전류나 열은 가해준 방향으로 흐르지만, 특수한 자성 물질에서는 그 흐름이 옆 방향으로 휘어지기도 한다. 이는 지구 자전 영향으로 태풍이 휘어지는 것과 유사한 원리로 자기 센서나 차세대 전자소자, 열을 전기로 바꾸는 열전 발전 기술의 핵심 기전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결함이 거의 없는 고품질의 ‘단결정’ 소재가 필수적이라고 여겨왔다. 최대한 정돈된 상태여야 전자가 방해받지 않고 휘어질 수 있다는 통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구팀은 비정질(무정형)과 결정 구조가 뒤섞인 복합 물질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두 물질을 화학적으로 합치는 대신 물리적으로 섞어 각자의 고유 성질을 유지하게 하자 전자가 옆 방향으로 흐르는 효과가 단독 물질일 때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비결은 ‘구불구불한 이동 경로’에 있었다. 복합 물질 내부에서 전자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좁은 골목과 넓은 대로를 번갈아 지나는 것처럼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이동 방향이 수시로 바뀌며 옆으로 휘어지는 흐름이 증폭되는 현상이 실험과 이론 계산으로 모두 확인됐다.
특히 이번 연구는 복합 물질의 성질이 단순히 구성 물질의 ‘평균값’으로 나타난다는 기존 이론의 가정을 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철(Fe) 기반의 흔한 자성 물질 조합만으로도 고가의 희귀 양자 물질에 버금가는 성능을 끌어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진현규 교수는 “희귀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도 저비용·고성능 소재 설계가 가능해질 것”이라며 “스핀트로닉스 및 에너지 변환 분야에 큰 응용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현우 교수는 “무질서를 결함이 아닌 설계의 요소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연구”라고 평가했다.
이번 연구는 물리학 분야 최상위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 최근호에 게재됐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