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전쟁인 삼남의진이 활동한 이곳은 단순한 서원이 아니라 구한말 영남지방 의병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진 전적지인데 지금은 서원 앞을 지키듯 서 있는 300년 된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남아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옆으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찾는 곳이라 여겨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 중기의 무인이면서 말년에 영천으로 귀향한 노계 박인로 선생이 계곡의 비경을 노래한 ‘입암별곡’도 전해지고 있다.
입암서원은 조선 효종 8년(1675)에 현재 죽장면 입암리 토월봉 아래에 창건된 것으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1544~1637) 선생과 네 벗인 동봉 권극립, 정사상, 정사진, 손우남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다.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셨다. 그 후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순종원년에 묘우(廟宇)가 소실되었다가 서원은 1913년에 복원되었고 1972년에 묘우도 다시 만들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은 1544년 명종 9년~1637년 인조 15년 때의 인물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지금의 구미)이며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선산에서 나고 자랐으나 임진왜란으로 집터마저 불타고 없어 47세 때 여헌이라 호를 짓고 여기저기 떠돌다 풍광에 매료되어 ‘입암 28경’이라는 시를 쓰며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서 정자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벗들과 시가를 읊으며 40여 년간 고고한 삶을 살다가 만년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무릎을 꿇자 아예 입암 골짜기에 은거하다 84세에 생을 마감한 곳이다.
사계절 내내 절경을 보여주는 입암은 언제 찾아와도 실망시키지 않는 곳이다. 이곳을 지인들과 탐방했다는 최 모(포항시 북구 장성동) 씨는 “포항이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는데 입암 별곡이나 입암 28경 같은 작품은 더 수준 높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허명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