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의 ‘신화의 역사’는 신화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의 신화는 초월성과 타성의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숭배였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하늘 역시 인간에게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신’은 인류와 괴리되어 있다.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여할 수 없는 초기 신화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농경 사회를 이룩하였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대지의 신을 섬겼다. 여신은 부드럽고 인자한 신이기보다는 무자비하고 광포한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농업이 끊임없는 싸움이나 치열한 고투의 과정이었기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를 통해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의 얼굴을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를 감내하고 더 알차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하였다.
농경의 발달은 도시의 설립을 가능케 하였으며,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였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신보다 스스로를 의지하며 독립적인 주체로 변화해 갔으며, 인간은 신과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도시의 발달은 전쟁과 추방, 학살과 파괴를 가져왔으며, 이 속에서 인간은 개인의 양심과 윤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야스퍼스는 기축시대라 하였다. 이 시대의 종교는 의례보다는 정의와 윤리, 정신적 충만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까지 무지와 미지가 주는 공포를 설명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신화는 유효했다.
그러나 종교만큼이나 로고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인간은 로고스에 의지하여 신화의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합리화하고 역사화하고 실증화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신화는 인간의 삶과 멀어졌으며,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현대에 신화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신화의 역사란 인간과 신화가 일치된 시대에서 간격이 서로 멀어지는 분리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신화의 분리는 인간을 타락과 파멸로 이끈다. 그녀는 이러한 시대에 동질감과 연민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신화, 유아론적 이기주의에 의의를 제기하고 초월적 가치를 경험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모순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비록 그녀가 전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는 신화가 인간의 삶의 조건과 방식에 따라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조건에 따르는 변화를 거부하고 신화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내세운 전제를 거부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일종의 퇴행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무리한 서술방식과 신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서술방식이 갖는 문제는 다음과 갖다. 이 책은 ‘신화의 역사’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의 역사를 설명한다. 각 장의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신화는 역사에 종속된 것으로 밀려나고 만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이에 대한 그녀의 해석의 탁월함을 부정할 수 없으나) 신과 인간의 분리과정으로 이해할 때, 인간창조·홍수 모티프·희생제 등과 같은 신화적 요소를 설명하지는 못한 채 ‘서사시’에 대한 일반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또한 공자는 그녀의 주장처럼 종교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공자 그 시 대가 필요로 하는 경영철학 또는 국가철학으로써 ‘인’을 강조하였고,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성격을 띤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자로(子路)가 전쟁의 와중에 죽음을 택했던 것은 인이 가진 실천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오류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신화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무리한 시도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역사의 대척점에서 역사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신화의 기능은 말소되고 만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방식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이 책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 ‘신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God’(2009)에서 역시 암스트롱은 신화가 죽음 또는 소멸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미지의 죽음을 설명하며, 행동방식까지도 알려준다고 말한다. 즉 신화의 역사란 이러한 신화의 기능이 이성의 발달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쇠퇴되는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시각은 왜 아직까지 신화나 종교가 존재하며, 과학과 이성의 발전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이 종교에 더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또 새롭게 종교나 신화가 끊임없이 창조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암스트롱의 이러한 견해는 다른 비교종교학자들의 입장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엘리아데는 신화를 황금시대를 기억하는 행위로 보며, 조나단 스미스는 불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말하며, 웬디 도니거는 삶이 지닌 모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암스트롱의 주장과 달리 태고의 인간에게 신화·종교·의례와 같은 것들은 죽음보다는 삶을 긍정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었는지 모른다. 제시 웨스턴은 ‘초목의식’이란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Weston,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 1988). 그 부활이란, 그의 책에서 누누이 암시하고 있듯,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실체적인 것이다. 모스가 그의 책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원주민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축제란 축제에 모인 젊은 입문자들과 그곳에 참가한 정령들과 또 그들과 이름이 같은 ‘자연’이 함께 모여 서로가 풍성해지도록 자극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하나의 집 나아가 우주를 구성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Mauss, ‘증여론’, 2002 : 78, 178~179). 이것이 엑스타시(ecstasy)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을지라도 그들이 보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죽은 자를 보호자나 은인으로 여기며 이들에게서 기복을 갈망하는 의례가 축제의 본질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우주적 관계에 관한 고고한 가르침” 곧 “계속적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삶을 주장”하는 일이다(Weston, 위의 책, 17, 19). 동시에 그러한 영원한 부활을 목격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충만한 세계에 대한 안식과 평안에 대한 기쁨을 즐기는 것이 그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축제에 의해 비로소 열리는 세계, 샤먼에게만 늘 열려있는 이 세계를 유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유계’란 단지 죽음과 삶의 문턱이 아니라 현실을 아우르는 다층적이며 다차원적인 세계 전체를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인들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우주의 지형도는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거나 수직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중첩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Piers, Vitebsky, ‘샤먼’, 15~17).
우리의 ‘수심가’에서 역시 이러한 사유를 읽을 수 있다.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砂)로구나/생각사사로 님의 화용(花容)이 그리워 나 어이 할까요/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에 달 솟아오누나/생각을 하니 님의 화용이 아련하여 나 어이 할까요(평안도 민요, ‘수심가’부분).
신범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이별의 슬픔을 가장 깊은 곳까지 끌고 가는 수심가는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죽어서 산기슭에 묻혀있는 임에 대한 그리움은 꿈에서나마 계속 임에게로 가는 자신의 행로를 닦는다. 돌로 된 그 길이 닳아서 모래가 되었다는 과장법도 사랑의 강렬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수심가’에 ‘노자 노자 젊어서 놀자’라는 퇴폐적이고 허무적인 후렴구가 끼어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강렬한 긍정으로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심(愁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에서 임과의 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수심가’는 일종의 반어적 수사를 통한 삶에 대한 강력한 긍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