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주본능.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던 욕망, 질주!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고, 속도를 내서 위험하게 고개운전을 하는 것은 더욱 싫다. 그런 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그런데 산행을 하며 나에게도 그런 질주본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씨는 습기를 물고 있었고, 대략 1억5천km 정도에서 날아온 빛의 알갱이는 수증기를 데워 날씨는 찜통 같았다. 그날 산행의 1/3쯤 와서 우리는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일행이 출발했는데 나는 하필 스스로를 `엉아`라 부르는, 내일 모레면 일흔인 어르신 앞에 섰다. 그 분이 갑자기 나를 소처럼 돼지처럼 내몰기 시작했다. “자, 가자!”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쉽게 달아올라서였던 걸까, 아니면 그 말에 무슨 주술적인 힘이 있었던 걸까. 나는 꼬리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사납게 달렸다.
앞에서 느긋하게 걷던 분들이 황소같이 거칠게 몰아쉬는 내 숨소리에 길을 텄고, 나는 거의 시속 5km의 속력으로 산을 오르고 내렸다. 순식간에 두 개의 봉우리를 지났지만, 우리 `엉아`는 지친 기색도 없이 “잘한다, 자 가자!” 나보다 서른 살은 더 많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떻게든 그 분을 떼어놓고 싶어 더 더 빨리 달렸다. 그러나 그 분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고 나는 결국 세 번째 봉우리에서 기진하고 말았다.
우리 `엉아`께서는 “그럼 이제 내가 앞에 설 테니 따라와”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발과 두 개의 스틱을 마치 취권 같이 움직이며, 넘어질 듯 구를 듯 달음박질쳤다. 그야말로 후다닥. 나는 망연자실해서 그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거의 몸을 끌듯이 산을 내려왔고,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30번 국도에 이르러 이제 2km만 가면 마이산인데 도저히 갈 수 없어 퍼져버리고 말았다. 이건 비밀이지만 우리 `엉아`께서도 거기에 널부러져 있었다.
2.
흠, 질주본능이라…. 그런 본능이란 게 있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질주와 본능을 한 단어처럼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다.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6년 한 CF에서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밤안개가 음산하게 피어오르는 빌딩. 그 사이로 검은 표범이 어슬렁거리며 등장하면 스산한 음악이 뒤따르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사나운 표범의 눈빛이 정면을 향하더니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진다. 그에 맞춰 음악도 무겁지만 조금씩 빠르게 변해간다. 이제 표범은 속력을 높여 달린다. 달리던 표범은 어느 순간 승용차로 변하고, 음악은 빠르면서 힘 있게 바뀐다. 이제 성우가 등장할 차례다. 거의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광고에서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성우의 멘트는 겨우 세 개 밖에 되지 않는다. 30초 즈음에 한 번, 마지막 3초를 남겨 두고 한 번, 그리고 마지막엔 외국인의 대사다. 그 대사는 이렇다.
“힘에서 야성이 느껴진다. 질주본능! 라노스”
그렇다. 질주본능이라는 말은 사실 라노스라는 승용차를 광고하기 위해 만든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광고의 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라노스는 시판 첫날 계약실적이 6천709대나 되었다. 이를 필두로 대우는 1997년 업계의 단연 톱이었던 현대를 6천여 대 차이로 바짝 따라붙었으며, 대우의 전체 승용차 판매는 전년대비 거의 60%나 증가했다. 대우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세 개의 신차 시리즈를 잇달아 내놓으며 내수시장을 공략했고 현대와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대우는 1999년 부도가 나고 만다. 대우 자동차의 전매특허였던 `질주본능`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가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말은 경마장에서도, 경륜장에서도, 스키장에서도 애용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것을 본능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어는 무섭다.
3.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250만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단 세 개의 혁명으로 압축하고 있다. 신석기에 있었던 `농업혁명`이야 잘 아실 테고, `과학혁명`은 조금 생소할지 모르나 `산업혁명`을 떠올리면 금방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러면 하나 남은 혁명은 뭘까? 인류에게 일어난 최초의 혁명, 그것이 `인지혁명`이다. 하라리는 이 혁명이 대략 7만 년 전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 혁명의 핵심에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말을 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특징은 아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나름의 언어를 구사한다. 벌이나 개미같이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 역시 복잡한 사고를 전달할 수 있는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유인원이나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는 인간처럼 목소리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모든 동물들이 사용하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언어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특징은 무엇일까? 거짓말을 하는 능력! 아쉽지만 틀렸다. 원숭이도 거짓말을 한다.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 두 마리가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있다. 이 때 한 마리가 “주의해, 사자야!”라고 외치면, 다른 한 마리가 몸을 숨기려고 도망간다. 그러고 나면 이 거짓말쟁이 원숭이는 바나나를 여유롭게 챙긴다.
수다와 뒷담화! 그래, 이건 거의 답에 가깝다. 다른 동물들의 언어가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인간은 중요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왜 그러냐고? 하라리는 인간이 수다를 떨고 남을 헐뜯으면서 서로의 친분을 확인하며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켜 왔다고 말한다. 하라리는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떠는 행위를 통해 언어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라리는 인간의 언어에서 더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사피엔스`, 48면)이다. 즉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단군신화를 비롯해 전 세계에 산재한 시조신화는 허구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낀다. 민족은 이렇게 탄생한다. 종족이 같아서 민족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민족인 것이다. 신이 있다는 허구, 사람들은 이 허구를 허구인지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사원을 만들고 무덤을 만들었다.
`질주본능`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됐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질주본능이란 없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려는 욕구, 이것이야말로 진짜 본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주본능이 있다면 그건 말을 싸지르는 언어의 질주본능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막말을 하면 된다. 국민을 `레밍`에 비유하고, 그 말에 해명을 한답시고 자기 SNS에 11장도 넘는 분량의 글을 써대는 그런 행위, 이런 것이야 말로 언어의 질주본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