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는 “음식물 쓰레기로 돌아온 반려견”이라는 기사를 읽고 놀란 적이 있다. 집을 나간 올드 잉글리쉬 쉽독이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이웃 동네 노인들에게 잡혀서 두들겨 맞고 불태워져서 보신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개를 잡아먹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벌금형이 고작이라고 해서 애견인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집 잃은 개인데,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잡아먹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신탕이 되어 노인들의 공짜 좋아하는 입을 만족시켜준 반려견의 이름은 하트였다. 주인이 가족처럼 여기며 10년 동안 동고동락 해온 개였다. 그런데 지난 9월 26일 하트가 주인이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는 소리에 놀라서 집을 뛰쳐나갔다. 주인이 주위에 수소문하고 택배 기사를 중심으로 사진도 보여주고 했는데도 하트를 찾지 못하다가, 금요일에야 형사가 찾아와 하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노인 4명이 하트를 잡아서 보신탕을 해먹은 것이다.
그런데 남의 가족을 잡아먹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벌금형이었다. 반려견과 같은 반려동물은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이들 노인의 범죄는 “점유물이탈횡령죄”에 해당한다. 이것은 분실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무단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한 죄이다. 이 범죄의 최대 벌금은 300만원이라고 한다. 현재의 법으로는, 주인이 겪고 있는 반려견을 잃은 마음의 충격, 고통 그리고 상실감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없다.
반려견이나 반려 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개는 하나의 물건이나 먹을거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에게 이들은 `가족`이다. 필자도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어서 `가족`이라는 말에 매우 공감한다. 필자의 고양이들은 애교가 많은 편이라, 필자가 귀가하면 거의 필자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다. 이들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필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동생 같고 가족 같은 반려동물이 그냥 병사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판인데, 누군가가 죽여서 잡아먹었다고 한다면, 그 주인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원통할 것이다. `길 잃은 나의 아이를 누군가가 잡아먹었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고 보면, 상황이 더욱 야만적으로 보인다. 남의 집 사랑하는 아이를 잡아먹는 사람들에게 `문화` 혹은 `교양`라는 단어는 매우 사치스러워 보인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릴 당시,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 사람들은 개를 먹는 야만인들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월드컵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 적이 있다. 그 때 필자는 미국에서 연수중이었는데,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개를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그 때 필자는 정말 대답하기 난감해서 이렇게 둘러댔다. “한국에는 반려견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개도 있고, 식용으로 사육장에서 키워지는 개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먹는 개는 식용으로 키우는 개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지금, 남의 집 반려견을 잡아서 눈에서 피가 나고 다리가 부러지게 죽여서 잡아먹었다고 하니, 필자가 과거에 외국 친구들에게 한 답변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또한, 필자의 과거 답변도 사실 `동물 보호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요즘은 동물 번식장이나 개사육장 등이 동물학대 등과 같은 동물보호법 위반 사례로 언론매체에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동물 보호 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 보신탕 문화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한국의 고유한 문화이니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부분들을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길 잃은 남의 반려견을 마치 길 가다가 주운 십 원짜리처럼 생각하고 잡아먹는 것은 문제가 있다. 누가 봐도 남의 집 가족임에 분명한 반려견을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잡아먹는 심보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한국은 `헬조선`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