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언을 본 스탈린은 “결국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견제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김일성을 부추겨 전쟁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맞붙어 싸우게 만들고, 그 틈을 타 유럽을 공산화 시키겠다”는 스탈린의 야심이 6·25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최근 공개된 스탈린의 편지가 입증한다. 1954년 스탈린은 체코 공산당 서기장 고트바르에게 `6·25전쟁을 일으킨 속내`를 밝힌 편지를 써보냈던 것이다. 한반도라는 `떡조각`을 놓고 강대국들이 흥정을 벌였던 정황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에는 미스터리가 있다. 당시 5월이나 6월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정보가 나돌았다. 에치슨선언과 함께 그 정보들은 신빙성이 높았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6월 10일 군 수뇌부의 대규모 인사이동` `6월 11일에 발동한 비상경계령을 23일에 해제` `6월 24일 38선 근무 병력의 3분의 1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사들도 외출 외박` `6월 24일 저녁에는 육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를 열어 군 수뇌부와 전국 주요 지휘관이 밤늦도록 술을 마심`
술파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국일관에서 새벽 2시까지 2차를 했다. 그 자리에서의 술값은 연합신문 정국은 주필이 냈는데, 휴전협정 직후 그는 간첩혐의로 체포돼 6개월 후 사형이 집행됐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정국은 재판기록`이 사라졌다. 실상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군 내부의 어떤 세력이 말소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당시 군 수뇌부에 북한과 내통하거나 조종되는 간첩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쟁을 모의하는 자들이 적 핵심부에 간첩을 심지 않았을 턱이 없다.
당시 김일성은 `남조선 해방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다. 에치슨 선언, 한국 전방 방어력의 와해상태, 박헌영이 구축해놓은 남로당의 내응, 남한 내의 이념 갈등과 국론분열 등 `승리의 조건`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으니,`지려야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정전`이 아니라 `휴전`이기때문이다.`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리는`한반도 불운이 언제 끝나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