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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적 일궈낸 두 거인의 만남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5-08-21 02:01 게재일 2015-08-2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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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박태준` 이대환 아시아 펴냄, 472쪽
▲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과 박태준(앞줄 오른쪽 두번째) 씨 모습.
▲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과 박태준(앞줄 오른쪽 두번째) 씨 모습.

“경부고속도로는 내가 직접 감독할 테니 종합제철은 임자가 맡아”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은 때는 1965년 6월 어느 날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8년 4월 1일 서울 한복판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는 조촐하고 소박한 기념식이 열렸다. 바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포스코) 창립식. 창립요원은 사장 박태준을 포함해 모두 39명이었다.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태준에게만은 독대의 특권을 부여했다. 박정희와 박태준의`그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고 지속하게 만들었을까? 대체 두 사람의 독특한 인간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박정희(1917~1979)와 박태준(1927~2011).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에서 최초로 산업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이뤄낸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나라로 평가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이 두 사람을 꼽는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포항 출신 중진 작가 이대환(57)이 최근 펴낸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 박정희와 박태준`(아시아)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 시련과 영광을 성찰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박정희를 이어 누가 한국을 일류국가로 이끌어가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것인가? 그는 어떤 지도자여야 하는가? 이런 화두를 가지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이 책이 전해주는 양박 당시 시대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책은 2004년 `박태준 평전`을 저술해 “서구에서 나온 수작(秀作)의 평전에 견줄 만한 한국 평전이 나왔다”라는 서평을 받았던 작가가 `박태준의 박정희 회고`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1997년 5월 포항에서 70세 박태준과 처음 만났던 저자는 그때부터 박태준이 세상을 떠난 2011년 12월까지 15년간 거의 매주 한두 차례씩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박태준이 저자에게 “내가 만났던 박통 이야기도 참 많이 했는데, 이 선생은 정리해볼 수 있겠소?”라는, 청유도 강요도 아닌 질문을 불쑥 던진 때는 2011년 9월이었고, 이에 저자는 “작가정신이 옹호할 가치에 관한 문제”라는 대답을 했으며, 이 책은 작가로서 그 약속의 실현이기도 하다.

책은 국가경제와 국민 생활에 기여하기 위해 변화의 웅지와 포부를 실현하겠다는 신념과 의지만이 하나의 대동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박정희와 박태준의 완전한 신뢰로 이뤄진 인간관계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 저자 이대환 씨
▲ 저자 이대환 씨

신념의 구축, 부정부패와 결연히 단절하며 박정희와의 숙명적인 만남과 신뢰를 구축한 군 지휘관 시절,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의 상공업분야 최고위원,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서 진행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정지작업, 귀국 후 적자 공기업인 대한중석의 사장을 맡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국가주의 리더십`의 전개과정 등을 담았다. 그리고 한일경제협력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사단법인 한일경제협회를 창립하고, 특히 10년 뒤를 내다보며 미래지향적인 한일경제협력의 제도화를 이뤄낸 박태준 리더십을 상찬하며,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보낸 완전한 신뢰가 제철보국(製鐵保國)의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박정희의 혜안이 없었다면 포스코의 박태준은 없었고, 박정희와 박태준의 독특한 인간관계(완전한 신뢰관계)가 없었거나 박태준이 없었다면 제철혁명의 대하드라마는 대성취를 거둘 수 없었다.

그리고 박태준은 박정희 서거 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가꾸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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