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된 추계 의생명과학회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를 탔다. 좌석에 앉자마자 급격하게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끄러운 아기의 울음 소리에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50여 분 정도 지났다. 열차가 운행하지 않고 멈춰서 있길래 대전역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차의 시동과 객차 내부조명등이 꺼진 상태였고, 객차 내부 공기는 순환이 되지 않아 호흡하기에 매우 답답했다. 곳곳에 어린 아이들은 빽빽 울고 있고, 어른들의 짜증과 한숨, 그리고 어느 여성분은 코레일 고객센터에 욕설이 섞인 고성(高聲)으로 항의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차창 밖을 보니 웬걸, 아직도 영등포역이었다. 대전역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제 겨우 영등포역 까지 밖에 못 왔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옆자리에 앉아계신 어르신께 자초지종을 여쭤보았다. 그분은 매우 짜증스런 목소리로, 40여 분 전에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약 40~50대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한 중년 여성이 KTX 열차 선로 철골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어서 그 중년 여성의 감전사를 막기 위해 영등포역 일대의 모든 철도 선로 상의 전원을 차단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 속보를 검색하니 이 중년 여성의 자살소동 때문에 KTX 열차는 물론 영등포역을 지나는 지하철 1호선 운행까지 모두 마비됐다고 한다. 매우 어렵게 약속을 잡은 귀한 분과의 동대구역에서의 약속은 이 상태론 지킬 수 없게 됐다. 개인적으로 귀한 분과의 소중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나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이러한 위급 상황에 아무런 체계 없이 허둥지둥 대처하는 KTX 승무원들의 허술한 위기관리 대응 태도였다.
같은 열차 칸에 타고 있었던 어느 연세가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 폐쇄 공포증 때문인지 호흡하기가 매우 어렵고 답답하다며 비상벨을 눌렀다. 비상벨을 누르고도 한 참을 지나서야 달려온 승무원의 손을 붙잡고, 그 여성 승객은 지금 너무 호흡하기 답답하니 숨 좀 쉴 수 있도록 제발 출입문이라도 열어 달라며 요청해 보았지만, 난처한 표정을 한 여성 승무원이 대답하길 “고객님, 죄송하지만 KTX 열차 시스템상 안전을 위해 전원을 차단한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는 출입문 개폐가 안됩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고객님. 참아주세요”라며 총총걸음으로 옆 칸으로 건너가려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는 승무원에게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로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 왜 1시간이 지나도록 승객들을 위해 아무런 안내 방송을 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승무원은 좀 전 보다 더욱 난처한 표정으로 “고객님, 좀 있으면 안내 방송을 통해 사고 현장 상황을 말씀드릴 겁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참고 기다려 주세요”라며 결국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승객들의 불평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됐다. 다행히 당시 상황이 육지에 있는 KTX 열차에서 발생 됐기에 망정이지, 만일 이러한 유사한 상황이 항공기나 바다 위 여객선에서 발생 됐었다면 이러한 코레일 승무원들의 위기관리 대응 수준으론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허술함 그 자체였다.
영등포역의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며칠 전인 지난 13일에도 자살 사고가 있었으며, 지난 9월20일에도 투신 사고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였음에도 갑작스런 사고 발생 시 승객들의 불편 해소를 위한 어떠한 대책 마련과 신속한 대응 훈련도 되어있지 않은 코레일 승무원들의 무책임한 행동 속에서 체계적인 위기 대응 매뉴얼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었다. 이는 코레일의 총체적인 부실경영이며 무사안일주의이다. 그냥 간과해선 안 될 심각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