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로 불리는 남북간의 전쟁이 터진지 62년 그리고 그친지 59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곧 태어난 전후세대인 필자로서도 6·25는 아직도 이성이 아닌 감성이 북받치는 단어이고 개념이다.
코흘리개 시절 뛰놀던 동네 뒷산에서는 가끔씩 주인 잃은 철모며 군화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로 진학해 몸담았던 중고교는 경성제대 예과 캠퍼스를 물려받아 쓰고 있었는데, 건물 곳곳에 총탄자국이 남아 있었고, 뒤편에는 6·25때 파괴됐다던 기숙사건물들이 오랜 세월동안 방치돼 있었다.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다. 더구나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란 더욱 비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과 북이 갈리고 사상과 정치체제가 다르다 해서 순박하던 우리 한국인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던가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이를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과 선배들을 통해서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기에 전쟁에 대한 격한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이리라.
조선시대를 지나오며 우리나라가 좀 더 힘이 강대했다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남과 북이 타의에 의해 나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한국의 지난 수 십년간의 눈부신 발전과 그러한 저력을 생각한다면 안타까움이 크다.
국군이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두달여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몰리게된 이유는 방어가 미비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북으로서는 치밀한 준비 끝에 치뤄진 전쟁이기에 성과가 컸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낙동강전선에서 우리 국군은 `유학산`에서만 해도 하루에 500명씩 전사하며 전선을 사수해냈고, 영천과 포항에서도 많은 전투를 치러내었다.
포항에서는 도움산에서, 천마산에서, 소티고개에서, 그리고 형산강에서 많은 전투가 있었고 2천명 이상의 전사자가 났었다. 연제근 상사와 분대원 12명이 형산강 도하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었고 포항여중에서는 나이어린 학도병들의 장엄한 전투가 있었고, 98m고지인 천마산도 12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었다.
필자가 군에 입대했던 1970년대 중후반만해도 우리 한국이 빠르게 발전해 나가고는 있었지만 가난한 나라였고 6·25의 비참함과 월남전 참전 등으로 세계에 겨우 알려지고 있었다. 1960년대 말 북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및 동해안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1970년대 중반 판문점 도끼만행 등 북한의 도발이 잇따라, 우리 한국은 아직 전쟁이 계속되는 살기 불안한 나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 한국은 크게 발전을 했고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우리 한국 어디에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했던 세대들은 이제 전체인구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 할 뿐이며, 전후의 어려움 속에 성장했던 세대들도 이제는 은퇴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대부분의 세대들에게 6·25란 역사책속의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에 대해 강의도 듣고 국경일에는 관련 뉴스를 보면서 잠시 6·25의 안타까움이며 전쟁의 참혹함을 느껴보지만 현실로 다가 오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쉽게 망각하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6·25의 비참함 뿐만 아니라 약소국으로서 지난 수세기의 아픔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민족의 정통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 어느 누군가의 말대로 `기적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도 멸망치 않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려갈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해야 할 것이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장래에 전쟁이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장담치 못하기에 걱정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