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경찰청(LAPD) 찰리 벡 청장은 20년 전 LA폭동을 경찰의 리더십 실종사건으로 규정했다. 벡 청장은 미국 NBC와 인터뷰에서 1992년 한인타운을 포함한 로스앤젤레스 일부지역을 잿더미로 만든 LA폭동 때 경찰의 대응이 형편없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경찰 중간간부였던 그는 “폭동이 시작됐던 플로렌스와 놀만디 교차로에 가능한 한 모든 경찰력을 동원했어야 했다”면서 “그곳을 방치해 폭동의 발화점으로 만든 것이 실수”라고 말했다. 벡 청장은 초기대응이 실패한 나머지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시가지가 크게 불타는 재앙을 맞았다고 경찰의 실책을 인정했다.
당시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흥분한 흑인들이 경찰 순찰차에 돌을 던지는 등 폭동조짐이 있었지만, 로스앤젤리스 경찰청은 병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사고현장을 방치하고 철수했었다. 특히 폭동이 과격해지자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만 방어선을 구축해 한인타운을 폭도들 손에 내맡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폭동으로 한인타운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천800여개의 한인업소가 약탈당하고, 전체피해액 10억달러 중 절반 이상이 한인업소의 피해였다. 그 당시 한인들은 피해자이면서도 매스미디어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정부의 지원이 대단했지만 한인교포들은 세금보고 등에 서툴렀던 관계로 보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도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폭동이 멎은 후 뿔뿔히 흩어져 살던 한인들이 불타고 부서진 한인타운에 너도 나도 모여들어 `평화의 행진`이라 이름 붙여진 대규모 행진을 통하여 재건의 의지를 온 미국에 알리기도 했었다.
일부에서는 사태가 그렇게 악화된 데는 다민족·인종사회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고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한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베벌리힐스 등 백인 부유층 주거지의 길목에 한인타운이 있다 보니 한인이 크게 당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도 폭동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교육부는 교과과정에 LA폭동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았다.
로드니 킹은 LA폭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한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서 “우리 모두 함께 잘 지낼 수 없는 건가요?”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시당국으로부터 380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자신의 힙합 레코드사를 차렸다가 파산하는 등 투자 잘못으로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1991년 잡힐 당시, 경찰관들은 곤봉으로 그를 50여 차례나 난타했을 뿐 아니라, 발로 차거나 전기충격기로 공격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1992년 4월 29일 경찰관들을 무죄로 판정하고 석방하자, LA지역 흑인사회의 분노가 폭발하여 폭동으로 연결되어, 사흘동안에 55명이 죽고 2천명 이상이 부상하는 참사를 빚었던 것이다. 엉뚱하게 한인사회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이 사태는 6일 만인 5월4일에야 진정됐다.
20주년을 맞으며 미주한인회와 교계에서 많은 성명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재미동포사회가 민족적 자만에 빠져 타민족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고, “작은 실천을 통해 이웃 타민족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고,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봉사하고 연대하는 일을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그 당시 다른 인종 커뮤니티에서와 같이 `우리의 권리가 침해되었다`, `우리에게도 권리를 달라`, `피해를 보상하라`고 외치는 우리 교포리더들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비참하게 깨지고 부서진 가운데 절망에 차있던 우리 동포들의 마음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어조로 반목하는 것은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면서도 한편 서운함이 드는데, 이는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