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LA폭동은 1991년 3월3일 속도위반으로 차를 몰던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구타한 4명의 백인경찰관이 1년 후 무죄판결을 받은 데 대해 LA의 흑인들이 반발하며 6일간에 걸쳐 벌어진 폭동으로 역시 비주류라고 볼 수 있는 한인들의 피해가 매우 컸었다.
그 흑인청년은 마침 현대 엑셀차를 몰고 가다 경찰에 잡혔는데, 그 구타당하는 모습이 한 시민에 의해 녹화되고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는 바람에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젊은이들, 특히 흑인이나 스패니쉬 젊은이들 여럿이 함께 타고 차를 몰게 되면 검문에 걸리는 경우가 더 흔했던 것 같다.
지금도 미국경찰들의 위압적인 행동이 잘 알려졌지만 이는 범법행위를 막기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사건임에도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심하게 얻어맞거나 총격을 당하는 경우가 있음이 신문지상 알려지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고 보면 된다.
그 구타하던 경찰들이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로 판결됨이 알려지게 되자 흑인들이 많이 몰려 살던 도심지역의 몇몇 흑인들이 순찰차에 돌을 던지고 지나가던 백인운전자를 끌어내어 폭행하는 등의 범법행위를 벌였는데 이러한 항의 내지 난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은 그날 오후 늦게 부터였다.
이들 데모는 폭동이 되고 이들은 주변의 상가들을 때려 부수고, 불 지르고, 약탈을 단행했다. 이때 이 지역에 중소규모 마켓 등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인들로서 당장 그 피해의 대상이 되었다. 폭도로 변한 데모대들은 차에 타고 무장한 채 총을 쏘아대며 북쪽에 위치한 한인타운을 휩쓸게 되고 이때 많은 피해가 났었다. 이들은 데모대라기 보다는 무장폭도들이었으며 그 목표가 한인타운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백인들이 운집한 베벌리힐스를 포함한 서부 로스앤젤리스라고 봐지는데 7~8천의 경찰과 6천여의 주정부군, 그리고 1천 여명의 연방정부군이 그때까지 넋놓고 있다가 백인지역으로 피해가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그곳 입구지역의 수비를 강화하게 되어, 폭동의 피해는 고스란히 도심상가와 한인타운에 집중되었다.
LA시정부 주택국에 근무하던 필자는 다음날부터 업무상 도심 관할사업지역을 운전하며 돌아봐야 했다. 그 차에는 로스앤젤리스시청 로고가 크게 찍혀있기도 했지만 `폭동의 공격대상인 백인과 한국인이 타고 있어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다.
거리에 눈에 띄는 것은 부서지고 불타는 상가들과 중무장한 흑인 갱들이었고, 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로스앤젤리스에는 두 개의 흑인 갱단이 있었고 이들에 속한 갱들이 7만5천명이나 됐는데, 이들의 본부 앞을 지나자니 이들도 폭동가담자인지 피해를 막기 위해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기관단총 등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폭도들은 총기를 든 약탈자가 되어 어두워진 도심지역이며 한인타운의 주요 상가지역들을 주기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많은 한인가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하고 한인타운 몇몇 지역에서는 가게주인과 젊은 청년들이 권총, M16 등을 들고 밤새 폭도들과 싸우며 재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이때 총상으로 숨진 이들도 있었다.
이 폭동의 영향은 매우 커서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인기 좋던 `부시`가 패하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젊은 `클린턴`이 당선됐다.
한인타운도 이로 말미암아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재산상의 피해도 그러하지만, 우리 교포들은 다른 소수인종들과 다를 바 없는 비주류이면서도 백인그룹들을 대신해 피해를 당하게 됐다. 그 당시 매스컴에서도 우리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한·흑갈등을 부추겼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한인교포들도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