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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형식을 빌어 슬픔을 노래하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2-24 22:02 게재일 2012-02-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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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문학과 지성사 펴냄, 하재연 지음, 154쪽, 8천원
`문학과 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 하재연의 두번째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문학과 지성사)이 출간됐다.

사물과 현상, 삶의 단면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시선과 감정적 동요가 없는, 건조하면서도 절제된 시어들은 여전하지만 이번 시집을 장악하는 정서는 지극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의 정서가 여러 가지 존재 형식을 빌어 시 속을 소리 없이 떠다닌다. 머리를 말아 올리고 속눈썹을 붙인 인형들, 꿈속에서 여러 번 살아본 적 있는 것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유령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해삼과 멍게 같은 동물들의 존재 형식들은 그러한 슬픔의 정서를 싣고 살아간다.

이러한 슬픔의 정서, 센티멘털을 평론가 권혁웅은 “내면을 헐게 만드는 망치가 아니라 헐어버린 내면의 표현, 나아가 헐어버린 내면의 표현을 `결과`로서 담고 있는 하나의 기호”로 해석한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에서는 실로 많은 일상의 배경과 사물이 등장한다. 그런 장면들 안에서 시인은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거한다. 음소거 된 화면 혹은 음향이 켜지지 않은 무대 같은 배경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면면을 조용히 그러모으면서 최소한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과 공간과 대상을 맴도는 그녀의 걸음들에는 소리가 없다.

“말을 줄이는 것이 세상에 대한 조금 덜 나쁜 태도”(`인형들`)라고 말하는 그녀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살아간다”(`로맨티스트`). 어떻게 이렇게 힘을 빼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대답은 금세 얻을 수 있다. 소리 없는 걸음에 더 큰 힘이 들어가는 법.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다.

세계의 모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며

연인들은 작별한다.

이제 정말 안녕이라는 듯이

우리는 우리의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전 생애를 낭비한다.

어제는 빙하처럼 얼어 있던 눈이

녹아 흘러가고 있다.

하양이 사라진 만큼의 대기를 나는 심호흡한다. - `4월 이야기`부분

하재연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지난한 진실을 어떤 감상적 동요도 없이 똑, 똑 내뱉는다. 다만 물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한 삶의 진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그녀는 왜 그러한 평범한 진실들에 장난을 걸지 않는 걸까.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체념`의 형상을 띤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슬픔의 정서를 불러내는 세상을 향한 움직임이 된다.

나의 꿈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

내가 없다고 슬퍼져서는 안 된다.

물구나무를 서고

또 물구나무를 서도

내 그림자는 같은 색깔이었다.

철봉은 차갑고 녹이 슬어 간다.

코에서 비린내가 난다.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그림자와 비슷하게 웃어본다. - `술래 놀이` 부분

하지만 이때의 체념은 타자를 존중하는 시인만의 방식이다.

이러한 체념은 사실은 다름 아닌, “당신이 살아 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안녕, 드라큘라」)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사랑 방식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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