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만 19살 되던 1905년 을사망국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 분연히 일어나 향내의 석주 이상룡, 김형식, 김대락 등 동지와 의논해 상소를 올리고 성토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 1910년 8월29일엔 한일병탄조약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101년 전의 바로 오늘 맞았던 그 국치(國恥)였다.
권대용씨 가족사 책으로
김희곤 교수에 자문 결실
조부 비석도 고향에 세워
이에 추산은 1912년 4월 가족을 대동해 만주로 망명갔다. 그리고는 끝없이 넘어오는 동포들 돕는 일에 심신을 바쳤다. 협동농장을 구성해 생활을 안정시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이상룡, 이시영, 김좌진, 김동삼 등 동지와 함께 하면서 신흥무관학교도 세웠다. 나라를 되찾자는 뜻이었다. 드디어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각 방면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외무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까지도 마수를 뻗쳤다. 그해 8월 그는 상해 임시정부 연락업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음해인 1920년 5월 이후 넉달간 계속된 일제의 독립군 학살 작전 때는 피신하지 않고 동포들을 지켰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무참하게 생명을 잃은 것이다. 만으로 그의 나이 불과 34살 때였다.
이렇게 추산이 순국한 뒤 그의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살을 에이는 빈곤과 고통이었다. 부인은 겨우 3살이던 아들 형순마저 생명을 위협받자 여자애로 분장시키고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에 쓰느라고 모두 팔아가 버린 뒤였으니 기댈만한 재산이 있을리 없었다.
아들 형순은 자라면서 여러 공장을 돌며 노동으로 생계를 삼아야 했다. 드디어는 1969년 어느 날 부인과 더불어 간장 장사를 시작했다. 명문가의 주손이 리어카를 끌고 안동 시가지를 돌아다닌 것이었다. 아내가 치는 북소리를 앞세우고 독립지사의 아들은 리어카를 밀었다. 망국만 아니었어도, 독립운동만 아니었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광복한 이 나라는 그 모습을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그것이 끝도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형순씨 부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명가의 후손들에게 덮어씌워진 지독한 가난은 대물림됐다. 추산의 손자, 형순씨의 아들은 지금 안동의 택시 운전사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어떤 이가 프랑스로 도망가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됐다던 일이 연상될 정도다. 친일부역자 자녀들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좋은 대학 나와 떵떵거릴 때 독립지사의 유족들은 피로 세운 새 나라에서까지 이런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추산의 손자 권대용(63)씨는 어렵사리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명문가의 자부심과 독립운동가의 손자임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광복회 안동지회 사무국장,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운영위원, 광복회 대의원 등으로도 활동에 열성이다.
이 권기일-권형순-권대용 3대의 이야기가 독립운동 전문연구자인 안동대 김희곤 교수에 의해 최근 `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이라는 책으로 정리돼 나왔다. 권대용씨가 2000년 어느날 연구실로 김 교수를 찾아가 할아버지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싶다고 자문한 게 계기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독립운동 등을 증명할 자료가 거의 없었다. 많은 근거들은 김 교수의 계속된 연구가 있고서야 제대로 수습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리된 것이 이번에 나온 책이라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비석도 드디어 세워졌다. 추산의 고향인 검암리 `대애실`마을 입구가 그 자리가 됐다. /권광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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