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내게 담배를 권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것은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취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밤새려면 줄담배가 필요하겠네, 이런 농담까지 건넨다. 글쓴답시고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지만 그런 얘기를 들어도 싫지가 않다. 싫기는커녕 금연을 권장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내 추억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담∼배. 천천히 두 음절의 낱말을 곱씹어본다. 한없이 부드럽다. 담배와 연관된 어린 시절 풍광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시골에 살 때 우리집은 담배포를 했다. 다래 담배집. 사람들은 달이 뜨고 내가 흐르는 마을을 '다래' 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매청에서 허가를 내주는 담배포는 한정되어 있었다. 마을 이십 리 안팎에 담배포가 하나 있을까 말까 했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담배포가 있는 구멍가게는 시골 사람들의 정보 집합소이자 교환소가 되었다. 근동 마을의 웬만한 소식은 다래 담배집에서 퍼졌다가 그곳으로 되돌아 오곤 했다.
특히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담배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십리길이나 남은 장터길에 혀 동무라도 삼으려는지 사람들은 저마다 담배 한 두 갑씩을 사갔다. 새마을, 청자, 거북선 그리고 엽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담배들을 부지런히도 찾았다. 내 눈에는 라면땅, 크라운 산도, 눈깔사탕이 더 맛있어 뵈는데 어른들은 그 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네모난 곽에 스무 개씩 담긴 흰 담배만을 원했다. 그것이 어린 내게는 불가사의였다.
어른들 곁에서 풍기던 그 지독한 담배 냄새를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몰래 새마을 담배(곰방대에 담아 꼭꼭 눌러서 피우던 엽초 빼고는 그것이 가장 싼 담배였다.)
한 갑을 가지고 골방으로 갔다. 성냥을 긋고 장롱 안에 숨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대했던 맛은 고사하고 연기 때문에 기침부터 나왔다. 그 절정의 순간에 엄마가 방문을 연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당황한 나머지 담배를 이불 속에 감추느라 이불솜에 구멍을 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호기심의 결과치고는 싱겁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산골에 태풍이 온다는 신호는 담배포 간판 흔들리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위협적인 변주곡으로 바뀌었다. 간판이 흔들리는 강도로 태풍의 위력을 가늠하곤 했다. 처마를 받히는 기둥과 부딪혀 담배 간판은 쇳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내겐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봇물을 보러 나간 장정들은 저마다 가겟방에 모여들어 화투를 치거나 장기를 두곤 했다. 태풍이 어서 빨리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남정네들은 화투장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내 눈에는 그것이 건성으로 보였다.
양쪽 귀만이 온통 담배포 간판 흔들리는 소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쇳소리가 어서 빨리 멈췄으면 하는 사이, 어느새 가겟방은 눅눅한 담배 연기로 차 오르곤 했다.
수몰이 되는 바람에 나로선 너무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버려진 나는 한동안 우리집 담배포가 몹시 그리웠다. 이불을 태우던 골방도, 담배 연기를 내뿜던 마을의 장정들도, 쇳소리를 내며 울부짖던 붉은 담배 간판도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가끔씩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옛날 물건들을 소개하는 사이트를 만난다. 그곳에서 청자, 새마을, 거북선 담배 그리고 오래된 담배포 간판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몇 해 전, 초등학교 은사님이 개인전을 가졌을 때 그 곳에서 꼭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내 어린 날을 기억나게 하는 허름한 담배포가 있는 풍경이었다. 그림 속에서 담배포 간판은 충분히 빛이 바래져 있고, 바람에 흔들린다. 가게 앞의 낡고 긴 벤치는 쓸쓸하다. 골목 끝 어디선가 등 굽은 노파가 걸어나온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 좋은 그림 하나가 값진 기억과 만나는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다시 태풍이 일고, 내 기억의 회로 어디쯤서 낡은 담배 간판 하나가 흔들린다. 나는 가만 담배포가 있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