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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아들 전태일 곁으로 가다

김남희기자
등록일 2011-09-05 22:10 게재일 2011-09-0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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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랑 남긴 아들 뜻따라 노동운동에 생 바쳐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장례식이 오는 7일 열린다. 지난 3일 오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으며, 빈소는 현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향년 82세. 장지는 아들 전태일 묘소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이다. 임종은 가족,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 등 10여명이 지켰다.

1970년 아들 분신항거후최전선 노동운동가로 변신

수배·옥고 거듭해 치르며 민주화운동 물심양면 지원

이소선 여사는 1929년 지금의 대구 성서 땅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가 일본경찰에 희생된 후 지금의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로 가서 성장했다. 성장 후 이 여사는 결혼을 했고, 42살되던 1970년까지만 해도 가난하고 평범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1970년 11월13일 아들 전태일이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끊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판잣집에서 생계를 꾸리던 41세의 이 홀어머니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최전선의 노동운동가로 변신했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여생을 바쳤다.

아들이 숨진 후 당장 아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라며 장례식 치르기를 거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정부로부터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닷새 만에 아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전태일의 친구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해 고문직을 맡았다.

이 여사는 그렇게 노조를 만들어 놨는데도 노사협의회가 열리지 않자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또 1976년에는 청계노조 노동교실 실장을 맡아 직접 공원들을 가르쳤다. 동시에 헌옷 장사를 하며 노조 활동가들을 지원했다.

이 여사는 군사독재 시절 많은 수배자에게 숨을 곳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수배 중이던 조영래 변호사를 몰래 만나 인쇄물을 전달하려다 단속에 걸리자 연인 행세를 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여사는 스스로도 여러 차례 수배를 받거나 옥고를 치렀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장기표씨의 재판정에서 검사에게 호통을 치는 등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1977년 구속돼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0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 끝에 구속됐고, 그 이듬해에도 청계노조 해산 명령에 반발하는 농성을 했다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했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던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과 뭉쳐 1986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다.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1988년과 1998년 두 차례 의문사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422일간의 장기농성을 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그같은 사회운동 공로로 4월 혁명상과 만해대상 실천 부문상 등을 받았다.

1990년에는 자서전적 회상기 `어머니의 길`을 펴냈고, 2008년에는 작가 오도엽씨가 집필을 맡은 구술 일대기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가 출간됐다. 구술일대기에서 여사가 한 말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새겨지고 있다.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리고 분신자살했다고 하는데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 항거라고 써야 해…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유족으로는 아들 전태삼씨와 딸 순옥·순덕씨가 있다.

/김남희기자 ysknh0808@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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