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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꽃 진 자리

능소화가 집니다. 무너진 꽃잎들, 담장 아래로 붉은 꽃그림자를 이룹니다. 오점의 예견도 없이 추락의 예감도 없이, 찢어지고 오므라들다 마침내 누렇게 타들어갑니다. 담담한 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 길을 내는 저 화흔(花痕)들. 제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찐득한 상처를 남깁니다.그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연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꽃나무로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운명이 된 우연은 상처인 줄도 모르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돌풍 실은 바닷바람 한 점에, 여름을 재촉하는 다급한 장맛비 한 방울에 꽃잎을 떨굽니다. 일견 화려한 꽃이 안타까운 꽃 무덤으로 보이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너무 당연한 자연현상일 뿐입니다.진물로 끈적이는 그 자리는 끝이 아닙니다. 결코 흉물스럽지도 않습니다. 생의 이면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고해성소입니다.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넘치는 욕심에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고, 어림없는 오해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우연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꽃 진 자리는 이러한 우연이 마련한 통곡의 바다이자 상처의 실존입니다.하지만 그 상처는 힘이 됩니다. 그것으로 새로운 꽃망울을 말아 올릴 수 있으니까요. 결곡하게 피운 꽃은 또다시 향을 내뿜고 열매로 보답합니다.칠월의 꽃 능소화, 그 꽃 진 자리는 서러움도 추함도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점입니다. 곡진 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증거물입니다. 그 상처가 풍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안에서 몇 번의 개화와 몇 번의 낙화가 필연처럼 이어집니다. 싹틈 또는 꽃피움으로 이어지는 환희의 이미지, 그것이 자연의 전부는 아닙니다. 필연으로 이어지는 떨굼 또는 추락의 순환까지 거쳐야 완전체의 자연이 되는 것이지요.생각하면 모든 결실은 추락이 그 시작이었지요. 떨어져보지 않는 시간은 가짜입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추억은 엉터리이지요. 뭉개져보지 않은 열매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생애, 깊어지거나 단단해졌다면 그 모든 것은 충분히 꽃 진 자리를 살폈다는 뜻이겠지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환희와 절정, 우연처럼 이어지는 청춘의 혼란과 불안. 짓무른 그 시간의 힘으로 다시 꽃망울을 맺고 피는 중년, 머잖아 운명처럼 맞이할 노년의 허무와 고독. 숨 쉬는 한 우리 삶은 비상과 추락의 변증법을 연주합니다. 저 먼 우주의 먼지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무대 위 그 사이클은 계속됩니다.누군가 묻습니다.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어느 시절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혹시라도 이십대 시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완강히 젓겠습니다. 끝없이 흔들리고 하염없이 추락하던 한 시절이었으니까요. 결실 없던 열매, 비상 없던 날개의 나날만 지속되었지요. 새벽이 올 때까지 무너지던 버거운 한 시절은 그것으로 족합니다.김살로메소설가지금의 청춘들도 별달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겠지요. 하지만 짓무른 꽃잎 같은 시간 없이 어떻게 단련할 수 있을까요. 하염없이 떨어져본 나날들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단단하게 부릴 줄 압니다. 싹 틔우는 모든 힘은 한 시절의 상처가 원동력이 되니까요. 떨어진 꽃잎의 선명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굳건한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이지요. 꽃의 진실은 피어서 화사하느냐, 떨어져 시드냐가 아니라 꽃 자체의 한 살이에 있습니다. 피는 꽃은 화사해서 아름답고 지는 꽃은 안타까워서 눈물겹습니다. 그러니 꽃 진 그 자리,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될까요.핀 꽃의 진실은 나뭇가지에 달리지만 진 꽃의 진실은 꽃 진 바위에 내려앉습니다. 꽃 진 자리를 톺아봅니다. 누군가 꽃 핀 자리에 눈을 높이 맞출 때, 누군가는 녹아내린 꽃무덤 속으로 마음을 보탭니다.그 속에서 생환의 뿌리를 다지고 활력의 가지를 뻗는 나무를 봅니다. 꽃 핀 나무가 단순히 밝은 눈을 선사할 때, 꽃 진 자리는 성찰이라는 깊은 우물을 보여줍니다. 생과 멸로 이어지는 이 우주적 질서는 아름다운 추락이자 처절한 비상으로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꽃 진 그 시간을 최상의 것으로 추억하기 위해 저마다 길을 냅니다. 구구절절 말을 잇긴 했지만, 실상 떨어진 꽃잎은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상처로 단련된 꽃무덤은 그 자체가 사유의 통로가 됩니다. 필연으로 떨어져 꽃길을 내고, 깊이 내려가 진물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생의 이면입니다. 견고한 잉태와 단단한 도약을 위한 전초전입니다. 절절하게 떨어져 본 꽃잎일수록 절실하게 꽃피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꽃 진 자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추락 없는 꽃잎이 어디 있으며 짓무름 없는 성장이 가당키나 할까요.

2020-08-05

사소한 따뜻함

도서관에서 잠시 상주작가로 일할 때였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주차 공간을 확보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침 시간을 마디게 활용하기 위해서였지요. 중앙 출입문을 통과하면 미화 담당 여사님이 가장 먼저 반겼습니다. 연두색 앞치마를 두른 채 대걸레 하나로 로비와 계단을 누비는 그녀는 누가 봐도 에너자이저였습니다. 밀대를 쥔 여사님 손끝, 붉은 메니큐어가 그 열정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고희 넘은 연세인데 환갑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고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언제 봐도 분양받고 싶은 기운이었습니다.여사님이 마지막 순서로 제 공간을 청소할 때면, 웬만하면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노고에 대한 제 나름의 소박한 소통법이었지요. 하루 십여 분도 되지 않는 티타임이었지만 여사님과 친구가 되는 그 순간이 좋았습니다. 동료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사님은 다음해에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하곤 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뻔한 말로 저는 여사님을 응원하곤 했습니다.그날도 변함없이 일찍 출근했습니다. 여사님은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심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안 돼!” 하는 여사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흠칫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밀려났습니다. 복도 바닥에 노란 테이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락스로 바닥 대청소를 한 뒤 말리는 중이었습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려면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았기에 여사님은 안심하고 바닥에 락스를 뿌렸겠지요. 너무 일찍 나온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순간 바닥을 밟을까봐 본능적으로 막은 것이었지요.여사님의 적극적이고 친절한 경고 덕에 락스 자국을 남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금세 그 사실을 잊은 채 찻물을 받기 위해 복도 한쪽 정수기로 향했습니다. 정수기 하얀 머리 위에 전에 없던 소품이 놓여 있었습니다. 피로회복제 음료를 등받이 삼아 단정한 글씨체의 메모지가 붙어 있습니다. 여사님 앞으로 배달된 쪽지입니다. 얼핏 봐도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여사님 손에 들어가기 전, 얼른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급한 도둑 촬영이 말해주듯 엉성한 컷이지만 공유하고 싶은 장면입니다.열람실 공식 개방 시간 전에 도서관에 입장하는 성실 이용자가 있었습니다. 수험생인듯한 그녀는 매번 그렇게 일찍 눈에 띄었습니다. 복도 휴게자리에서 공부하다가 열람실 문이 열리면 곧장 들어가곤 했습니다. 메모지 내용을 보니 그녀가 남긴 것 같았습니다. 저보다 앞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다가 여사님이 뿌려놓은 락스를 밟은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다시 바닥을 닦아야 하는 여사님에게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전한 것이지요.저절로 미소가 나왔습니다. 세제를 밟아 바닥을 더럽힌 일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한 사과가 될 사안이지요. 한데 못내 아쉬웠는지 저렇게 마음 담은 메모까지 남겼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타인의 친절 시간, 그 순간을 상상하는 일이 곧 피로회복제였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뒤늦게 메모를 발견한 여사님이 소녀 얼굴을 한 채 달려왔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아침부터 감동이랍니다. 메모지를 가볍게 흔들며 새침한 표정으로 일할 맛 난다 하십니다. 처음 본 것처럼 저 역시 가슴 따뜻해지는 일이라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집에 가서 손녀에게 자랑하겠다는 여사님에게 저는 이 상황을 글로 써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사님을 배웅하면서 제 눈길은 복도 끝에 가닿았습니다. 아직 열람실 문이 열리기 전이고, 휴게용 간이 테이블, 책에 얼굴을 묻듯 열중한 그녀가 보였습니다. 모른 척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종이컵에 담은 훈기지만 작은 응원이 되길 바랐습니다. 꼬부랑 원서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아 전문직 공부를 하는 수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해 될까 봐 말은 건네지 못했습니다. 공부에 앞서 온기를 먼저 간직한 그녀이기에 무조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다음날에도 복도 그 자리, 그녀는 주위를 잊은 듯 책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습관인 듯 저는 파이팅을 대신하는 차 한 잔을 놓고 돌아섰습니다. ‘사소한 맘 씀 덕에 일할 맛 난다‘는 여사님의 새침한 표정이 전달되기를 바랐습니다. 고맙다고 수줍게 말하던 그녀가 제 예상대로 수험생이었다면 좋은 소식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상상일지 모르지만, 전문인이 된 그녀가 소박하고 건실한 사람들 곁을 살피는 일을 오래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한결같은 여사님은 누구보다 먼저 나와 고요한 도서관 곳곳을 밀대로 닦았습니다. 수험생 그녀 역시 복도 구석진 자리에 붙박이로 있었지요. 열람실 문이 열릴 때까지 고개조차 들 마음 없이 책과 하나가 되어 있곤 했지요. 그들과 함께 조금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저는 묵묵히 찻물을 데우곤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훈훈한 기운이 도서관 전체로 퍼져나가던 시간이었습니다.

2020-07-29

내 이름은

김살로메. 제 필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에 관심을 보입니다. 특이한 이름이네요,라며 호기심을 보이거나 세례명이죠,라고 눈치 빠르게 되묻곤 합니다. 호의적인 그들은 눈빛으로 ‘진짜 이름은 뭐예요?’라고 말합니다. 눈치껏 진짜 이름을 말하는 순간, 빵 터지는 웃음소리.세례를 받던 스무 살 즈음, ‘살로메’라는 세례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좋아하던 작가 루 살로메를 차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녀 살로메와 루 살로메, 중의적 의미의 그 이름은 그렇게 제 곁으로 왔습니다. 세례명은 자연스레 필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치기 서린 시절의 선택이었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문단 원로분께서 필명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셨습니다. 이름이 곧 사람인데,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악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나요. 루 살로메에 경도되었던 젊은 날이었기에 거기까지 살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다른 이름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의 이 필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요.제 진짜 이름은 ‘김복남’입니다. 1960년대산 산골 이름 치고도 촌스러움이 더합니다. 그 시대 여자이름에 흔하게 붙는 ‘자’자 돌림이 상대적으로 세련되어 보일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이름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 두 곡이 놀림의 선전곡이 되곤 했습니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꽁당 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 좋은 꽁당 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남자애들은 제 눈만 마주쳐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무 싫었습니다. 당시 월간지인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를 펼치면 서울우유 광고가 나왔습니다. 단란한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흰 우유를 곁들여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도회지 사람들의 이런 아침 풍경을 꿈꾸던 저에게 꽁당보리밥 놀림곡은 현실을 깨우는 조리돌림 같은 수치심을 안겨주었습니다.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 2탄이 장전되곤 했으니까요.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모두 다 찾아가서 위로합시다.’ 2절까지 무려 ‘복남이’이란 이름이 여섯 번이나 들어가는, 제게는 공포이자 폭력 같은 놀림이었지요. 확인 사살하듯 ‘콜록’ 또는 ‘에취’라는 감탄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남자애들의 뒤통수라도 갈기고 싶었습니다.어른이 되었다고 이름에서 자유로워진 건 아닙니다. 분주한 한 모임에서였습니다. 무슨 이유로(아마는 좋은 이유였을 거예요!) 제 필명인 ‘김살로메’가 불렸습니다. 순간 제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모른, 앞자리의 남자분 둘이 귀엣말을 했습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들의 뒷모습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살로메 진짜 이름이 뭔지 알아?’, ‘알고 말고. 김복남!’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진 이야기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김봉남 선생에 관한 것이었을 테고, 어쩌면 ‘꽁당 보리밥’ 노래까지 들먹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주보며 키득거리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무 잘못 없는 그들에게 욱,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 상상력의 범위가 너무 나간 것이지요. 저도 모르게 어린시절이 오버랩 되어 떠오른 모양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철든 이후 제 이름을 불편해하거나 불명예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개명하기 좋은 요즘 세상, 얼른 법원으로 뛰어갔겠지요. 제 이름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유머로 삼을 만큼 연륜도 생겼습니다. 자연인 김복남은 김복남이고, 쓰는 자로서 김살로메는 김살로메일 뿐이니까요.재미로 들른 철학관에서 제 이름이 좋지 않답니다. 앉은 자리에서 삼십 만원을 내고 개명할 이름을 받아 가랍니다. 물론 ‘그 돈으로 쇠고기나 사 묵지.’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이름으로 인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필명을 쓰는 데는 소심하나마 변명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 제 연배를 가늠하는 걸 피하고 싶었습니다. 본명 그대로를 필명으로 삼을 경우, 첫 독자라도 제 연식(?)을 금세 눈치 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글의 성격과는 상관없이 늙은 글로 읽힐 수 있습니다. 나이 따라 글이 늙는 건 당연한데 괜한 몽니를 부리는 것이지요. 미완의 글쟁이로서 가야 할 길이 먼 만큼, 제 이름이 지닌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아직은 스스로를 보호하고픈 마음이 있나 봅니다.어떤 이름이 스스로를 대변한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실명이냐, 필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이름 다 스스로 보듬어야 할 제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자에 꽃잎을 달고 열매를 맺는 이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니까요. 새벽 창을 엽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위한 발자국, 한 발 한 발 내딛어 봅니다.

2020-07-22

버리기 어려운 것

저는 뭐든 잘 버립니다. 안 그래도 좁은 집, 그리 필요치 않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이는 걸 참아내지 못합니다. 틈 날 때마다 뭐 떠나보낼 게 없나 살피곤 합니다. 보내는 입장에선 홀가분해서 좋고, 떠나는 물건 입장에선 사랑 받을 새 주인이 생겨서 좋고. 버려야만 하는 자로서 저런 변명이나 합니다. 어쨌거나 버리지 못하는 것보다는 잘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하곤 합니다.우리가 잘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알뜰 콤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와 동시대를 지나온 이들은 아껴야 잘 산다,라는 말을 캠페인 문구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놓아준다고 해서 가난뱅이가 되는 것도, 그것을 품고 간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을 쌓아두는 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잘 버리는 자들은 처음부터 잘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을 알기에 될 수 있으면 물건을 잘 들이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버릴 물건이 원래부터 그다지 없는 편에 속하지요. 최소한의 물건으로 버티다가 그마저 필요치 않게 되면 떠나보내는 것이니까요. 둘 자리가 넉넉했다면 이런 습관은 들지 않았겠지요. 마당 없는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공간을 규모 있게 활용하고픈 맘에서 생긴 습관입니다. 코로나 핑계로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긴 하지만, 올해 들어 새 신발이나 새 옷을 산 적이 없습니다. 알뜰해서가 아니라 뭔가 쌓이거나 넘치는 걸 경계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내친 김에 유행하는 미니멀리즘까지 나아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특정 물건에 대한 은근한 애정이나 감성적 회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책방 청소를 하는데 구석 밑자리에 있던 엘피판들이 청소기에 걸려 쏟아집니다. 이때다 싶어 와르르 부려내 한 컷 담았습니다. 삼십여 년 묵은 사연들이 먼지 낀 표지 위로 풀썩입니다. 버릴까 말까 숱한 망설임 끝에 살아남은, 저에겐 골동품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힘겨운 십대와 이십대를 건너는 동안, 감성적 물결로 제 곁을 지켜준 친구입니다. 그때의 청춘들은 라디오나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엘피 디스크로 음악 감상을 하곤 했지요. 추억을 소환하고 시간을 경작한 그 물건들을 누군들 함부로 버릴 수 있을까요.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부피가 큰 오디오 시스템 기기를 가장 먼저 버렸습니다.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바늘만은 따로 빼둘까 하다가 몽땅 버렸었지요.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고 매체들은 떠들었고, 그 예라도 되듯 엘피판이나 테이프로 된 음원 기기가 속절없이 무너지던 시대였으니까요. 와중에 엘피판들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품을 팔아 사거나 선물로 받은 그 디스크 안에는 청춘을 감내하던 풋것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버리기 좋아하는 선수라 해도 이어질 듯 끊어지는 한 시절을 소환하는 매개물 앞에서는 망설이게 되니까요.김살로메소설가잠시 그 시절을 환기해 봅니다. 카트리지 바늘이 엘피 홈에 스치면서 원판이 돌아갑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게 뻔한 소식을 기다리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사념을 가눌 길 없어 모차르트의 미사곡에 카트리지를 얹곤 했지요. 쓸데없이 성찰하고 불필요하게 막막해하던 스스로를 음악 속으로 유폐시키던 시간들이었지요.이제껏 버리지 않아서 거추장스러웠던 적은 있어도, 버리고 나서 후회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게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요. 그간 너무 쉽게 추억이나 향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젠가부터 복고의 풍경이 아슴아슴 떠오르더니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꼼꼼한 남편은 이게 나아, 저게 좋아 하면서 검색만 열심입니다. 쉽사리 들일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제게 있습니다. 기왕의 물건들은 자리가 정해져 있고, 아무리 둘러봐도 턴테이블이 놓일 만한 맞춤한 장소가 없습니다. 걸리적거린다고 버림당할 것을 저어해 확실한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 주저하게 되는 것이지요. 새로운 하나를 위해 기존의 무언가를 비워야 하는 우리집의 한계, 아니 제 품의 한계만 실감합니다. 그 공간을 만들 때까지는 옛 친구가 해준 말로 위안이나 삼아야겠습니다.그 시절, 서울로 유학 간 친구에게 엘피판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 왈, 자취 살림에 잦은 이사가 성가셔 턴테이블을 없애버렸답니다. 제가 건넨 음악을 들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이런 위트 있는 회답을 보내왔었지요. 백문이 불여일견.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나요. 저 음반들 역시 지금은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짜릿할 테지요.

2020-07-15

개별자만큼의 진실

모 출판사에서의 전화. 원고청탁이라면 짐짓 거절 제스처로 만용이라도 부려보겠지만 그럴 리가요.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인용하고 싶답니다. 재발간하는 책 말미에 몇 문장을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합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닌 걸 보면 편집자들은 자사의 책과 관계 되는 것이라면 구석구석 구글링을 하는 모양입니다. 변방의 글까지 찾아내니 말입니다. 물론 그리해도 좋다고 답했습니다.따옴표로 묶어 보내온 그 문구들을 들여다봅니다. 소설 ‘파이 이야기’에 관한 단상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의 의미는 현실에서는 ‘개별자가 본 대로’가 되기 일쑤이다. 씁쓸하지만 온당한 이 철학적 사유를 우리는 끝내 확인하고야 만다. 삶의 방식과 종교 문제 그리고 인간 본성, 살면서 느끼는 온갖 것들에 대한 개수만큼의 진실이 소설의 도마 위에 오른다. 동어반복이다 싶게 예나 지금이나 저는 이런 문제들에 생각이 많습니다.인도 한 도시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동물들도 함께 화물선에 오릅니다. 배는 난파되고 파이와 벵골호랑이 리처드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합니다. 그 과정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후일담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맹수와의 동거라는 어마어마한 진실은 소년 파이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솔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누가 파이의 말을 믿어 줄까요.보고도 믿지 않는 게 사람입니다. 아니, 본 뒤에 제 식으로 믿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 적조차 없는데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을 수 있을까요.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지낸다는 것, 내 문제일 때는 진실이 되지만 상대의 얘기일 때는 달라집니다. 비현실적인 파이의 경험담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이런 인간의 심리를 감안해 파이는 등장인물들을 동물에서 인간으로 각색한 버전도 들려줍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파이의 유머가 슬퍼 보이는 건 왜일까요. 세상엔 너무 많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파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저마다의 진실 즉, 개별자 숫자만큼의 진실을 믿어야 하는 삶이 있는 한, 파이의 유머는 단순한 유머로 그치지 않습니다.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쉽게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 되지요. 있는 그대로의 기준이란 얼마나 모호한지요.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그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무엇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종류에 상관없이 창작의 요소가 깃드는 것이라고 작가 얀 마텔은 말합니다. 뜻하든 그렇지 않든 한 사안에, 보는 이의 소설적 장치가 가미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애초에 존재했던 진실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저마다의 생각이 새로운 진실이 되어버린 마당에 진실 찾기가 무슨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말장난 같지만 진실은 진실만이 알 뿐입니다. 따라서 파생한 진실이 원래의 것과 멀어지더라도 슬픔 속에 갇힐 이유가 없습니다. 호랑이 리처드도 끝내 숲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공포와 공존 속, 최대 생존 파트너로 생각했던 파이를 둔 채. 호랑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의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진실의 실체가 아니라 저마다의 진실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한계 같은 걸 사유케 하는 순간이지요. 나를 둘러싼 현상이 온당하다는 아집에 빠질수록 상대의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아찔한 설정과 유머로써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상대에게는 박한 잣대를, 스스로에게는 후한 잣대를 들이민 모든 날들을 소급하고 싶어집니다.김살로메소설가마침 효자손이 보입니다. 껍질을 까고 옹이를 깎아낸 뒤 사포로 문질러 반질반질 윤이 나는 수제 등긁이. 무심한 듯 건네던 친구 왈, 산책길에 버려진 오동나무를 모셔 왔답니다. 받을 이를 생각하며 몇날며칠에 걸쳐 손맛을 입혔을 정성을 생각하면 등을 긁는 용도로만 쓰기엔 아깝습니다. 한 가지 진실에만 접근하려 한, 용렬한 어깻죽지가 들썩일 때마다 스스로를 내리치는 죽비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 한, 세상사 진실 찾기로 시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 멀어진 실체를 찾으려는 게임보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에 유연한 시선을 보탤 일입니다. 혹여 진실의 개수를 줄이겠다고 소견을 좁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등 긁는 일 못지않은 쓰임새로 이 죽비를 들어야겠습니다. 파이가 그랬듯이 유머와 이해를 싣는 죽비소리, 아니 동비(桐7BE6)소리가 저릿한 술맛처럼 어깻죽지를 타고 심장으로 흘러듭니다.

2020-07-08

스칼라 산타, 계단

블로그 알림창이 뜹니다. 3년 전 오늘 날짜에 올린 당신의 글을 확인하세요.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방치해둔 온라인 공간에서 짧은 글과 함께 사진 몇 장이 보입니다. 로마 스칼라 산타 주변 몇 컷에다 헬레나 씨 부부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습니다. 스쳐지나가든 오래 곁에 머물든, 따뜻한 인연들과의 시간은 늘 여운을 남깁니다. 정작 본인들은 그런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낌새조차 의식하지 못하겠지만요.여행에서 헬레나 씨 부부와 저는 같은 조원이었습니다. 초로의 헬레나 씨 남편은 차에 오르면 제일 먼저 일행의 간식이나 안부를 챙겼습니다. 내릴 때면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떨어진 쓰레기를 줍곤 했습니다. 좋은 것의 덤은 양보하고, 궂은 것의 덤만 갖는 게 몸에 밴 분 같았습니다. 그게 못마땅한 헬레나 씨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게 더 다정해보여 일행들은 웃곤 했습니다.티볼리 숙소 근처의 난전부터 얘기해야겠습니다. 체리와 납작복숭아를 비롯한 과일, 올리브 무늬 원피스와 바람막이용 스카프 같은 입성, 느긋하면서도 활달한 현지인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감흥들이 넘쳐났습니다. 저토록 황홀한 풍경을 두고도 가이드는 호텔 밖 출입을 불허하겠답니다. 마감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책임지고 싶지 않은 속내를 ‘해 저물면 위험한 곳이 여행지’라는 말로 에둘러 말했습니다. 밤이 오려면 멀었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저와 헬레나 씨는 어스름의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이국의 풍광에 너무 취했을까요. 눈 깜짝할 새 지나던 세단과 맞부딪쳤습니다. 헬레나 씨는 엉덩이를 차문에 부딪쳤고, 저는 달려드는 범퍼를 저지하느라 오른손목이 살짝 꺾였습니다. 중년의 운전사는 미안한 내색은커녕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보면서 화가 나기보다 창피함이 몰려왔습니다. 외출을 삼가라던 가이드의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헬레나 씨와 저는 동시에 눈빛을 주고받았습니다. 일탈의 벌로 얻은 상처와 난처함에 대해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이지요.다음날 헬레나 씨가 말했습니다. 어제저녁 시장에서의 일은 입도 뻥긋 안 했어. 근데 내 얼굴빛이 안 좋았는지 남편이 자꾸 무슨 일 있냐고 물어. 걱정 마. 작은 고통에서 큰 기쁨까지 온 인류를 위해 기도했대.그제야 전날 스칼라 산타에서의 헬레나네 아저씨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스칼라 산타’는 거룩한 계단이라는 뜻입니다. 저마다의 사람들은 ‘거룩한 계단’을 무릎걸음으로 오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고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의미입니다. 제 여행의 의미 가운데 하나도 그곳에서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리석을 감싸는 나무 계단을, 이방의 여행객에 묻혀 천천히 기어오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심과 결과는 다른 법. 카메라가 무겁고 가방도 맡길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핑계를 대며 무릎을 꿇지도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릎걸음용 오른쪽 계단 대신 도보용 중앙 계단을 선택해, 착실한 여행객들이 묵언의 무릎으로 올라 반들반들해진 성단을 셔터에 담았을 뿐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와중에 헬레나네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희를 훌쩍 넘긴 분이, 아픈 무릎을 꿇고 한 계단 한 계단 2층 예배당 입구를 향해 오르고 있었습니다. 빨판을 잃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하지만 작정한 듯 내딛는 아저씨의 무릎걸음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 애잔하고 진지한 그 구도의 시간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그 무엇이었습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연민이나 구차함의 감정이 제 안에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타자의 고난을 공감하고 내 하루를 반성해야 하는, 실체적 행위를 거른 자의 자기합리화가 발동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그림 같은 그 기도 속에 제 안위도 포함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헬레나네 아저씨의 기도 덕에 제 일탈의 벌이 그 정도에 그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복만 기원한 끝에 곁다리로 끼워주는 기도가 아니라, 온 인류가 우선인 소망을 기도한다는 아저씨의 진실함이 통하지 않을 리 없었겠지요. 그만하기 다행이다는 말은 그냥 생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하기 다행일 수 있도록 부지불식간에 누군가는 길을 잡아주고 배경이 되어 줍니다.손목의 욱신거림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날 스칼라 산타의 시간만은 아슴아슴할 때까지 떠오를 것 같습니다. 진지한 믿음과 이타적 자애로 가득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삶 자체가 충만합니다. 그들은 계단을 오르기 전에도 이미 성실하고 친절했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그 마음들은 더욱더 이타적으로 승화합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수고나 진심어린 선의 덕에 우리의 삶이 다사로워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제 것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것 또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뜨끔해지곤 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앞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들, 꼭 그리해야지 해놓고 현실에 닿으면 미적대고 망설인 날들이 하 몇 날인지요. 반성문을 되새김질하기도 전에, 어리석게도 저는 또 다른 여행을 꿈꿉니다.

2020-07-01

좋은 사람

공자와 자공의 수많은 대화 중 ‘좋은 사람’에 관한 부분은 제법 회자 됩니다.자공이 묻습니다.“마을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합니다.“좋은 사람이 아니다.”“마을 사람이 다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합니다.“좋은 사람이 아니다. 마을의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마을의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좋은 스승답게 공자님 화법은 에둘러 갑니다. 곧장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두어 번 호흡을 가다듬을 여지를 줍니다. 우선, 공자님이 말씀하신 좋은 사람 아닌 것에 대해 짚어봅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야합에 물들었을 수 있고, 모든 이가 싫어하는 대상이라면 실없이 굴어 신뢰를 잃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 아닌 것이 맞습니다.좋은 사람 아닌 것을 예시로 들면서, 공자가 정의한 좋은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이 미워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부조리 앞에서 단호하게 비타협을 실천할 것이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사심 없이 공정함을 논할 것입니다. 공자의 ‘좋은 사람’이란 한마디로 참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는 이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은 좋아할 것이지만, 나쁜 사람은 미워할 것이 자명합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나쁘게 말할 리 없고, 나쁜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을 좋게 말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못된 사람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부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공자가 정의내린 좋은 사람이 되거나, 그런 대상을 만나기란 쉬운 게 아닙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시각각 타협을 종용 받고, 공정함 따위는 버리라고 재촉 당합니다. 공자가 말한 ‘좋은 사람’을 꿈꾸기는커녕, 비겁함을 무기삼아 조금씩 나쁘게 살아가는 편리를 택합니다. 좋은 사람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철학적 이상으로 새길 수는 있으되, 현실에서 접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애초에 좋은 사람, 운운하면서 규정을 지으려고 한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 그러한 판단은 하지 않을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좋은 물건은 그냥 좋은 것이고, 좋은 사람은 마냥 좋은 것일 뿐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챙기고 싶은 마음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심리적인 호응 관계에 기반한 지극히 감정적인 반응 체계니까요. 분명히 좋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야 그 대상을 좋은 사람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좋은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마음에서 자주 불러내는 일입니다. 좋은 사람은 정의 내리는 대상이 아니라 곁에 있음을 자각하는 거울 같은 존재니까요.많은 곁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감히 따라갈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정서적 감성과 예술적 감각을 지닌 다정한 사람들. 그들이 전하는 따뜻함과 성실함을 접하면서 세상엔 좋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하고 반성합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음나무 장아찌가 잘 익었다고 누군가가 집 앞까지 배달해주고 갑니다. 새 집에 어울릴 거라며 오르골과 스노우볼을 놓고 가는 이도 있습니다. 며칠 앓았다는 것을 안 누군가는 죽 쿠폰을 전송해 옵니다. 천사 이름표를 단 것도 모자라 긍정의 에너지로 세상을 가꾸는 이들입니다. 처방전 없이도 받을 수 있는 명약이자, 예약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명의 같은 존재들. 울컥해집니다. 제 진심을 다 표현하기엔 오글거리고 그 마음을 다 갚기엔 아득하기만 합니다. 제대로 된 보답조차 없이 다만 오래토록 좋아할 뿐입니다. 은근히 까다롭고 대놓고 급한 제 곁에 훈풍 같은 여운이라니요.김살로메소설가좋은 것과 싫은 것에는 실체적 결론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호불호가 있을 따름이지요. 점점이 떠있는 저 부표처럼 사람들은 닮은 듯 다른 듯 제 하루를 표류합니다. 그 단독자의 삶이 서로 엮여있음을 느끼는 때가 바로 여운을 맛볼 때입니다. 이런 날이면 공자님의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를 제 식으로 바꿔봅니다. 꿈속에서 공자의 제자가 된 누군가가 묻습니다.“마을 사람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합니다.“좋은 사람이다. 마을의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마을의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본받으려 하기 때문이다.”아뿔싸!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공자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2020-06-24

거리 두기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 되는 나날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들이 코로나를 핑계로 귀가했습니다. 스무 살 넘으면 집 떠나야 한다, 는 생각을 지닌 터라 갑작스런 아들과의 동거가 적잖이 신경 쓰입니다. 일찍이 객지 생활을 한 아이였기에 애틋한 감정이 앞서지만, 며칠 새 불편한 상황들이 그 감정을 섞어버리는 걸로 보아 제 모성에도 이끼 같은 스트레스가 끼나 봅니다.여기까지야 엄마로서 감당할 저만의 상황이니 괜찮은데, 살짝 한 발 더 나가는 게 문제입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부모 입장에서의 당연한 말씀이 뒤따르는 것 말입니다. 일찍 일어나라, 운동해라, 감성을 잃지 마라, 그리고 계획해라……. 네, 하고 건성으로 돌아오는 대답 또한 십 년째 변함이 없습니다. 지리멸렬하기만 한 훈화와 답하기 속에서 두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엄마는 누르고 눌러 겨우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아들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레퍼토리를 들어야 하나 하는 부담감을 맛봅니다. 가까이 있는 한, 엄마는 하나마나한 ‘좋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식은 들으나마나한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경험한 대로의 삶의 나침반을 제시한다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가 아닌 모정의 덫에 걸리는 격입니다. 거리 두기는 ‘사회적’으로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요청된다고나 할까요.적당한 거리가 확보 되어야 현명한 소통에 이를 수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시공간적으로 너무 가까운 거리는 느긋하고 성숙한 관계를 해치는 훼방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애든 우정이든 또는 사회 관계망이든 다 해당 되는 말씀 같습니다. 일단 너무 가까우면 상대의 초심에 괜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흔히, 믿었던 상대에게서 실망감을 맛보면 우리는 ‘초심을 잃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곰곰 생각하면 그 누구도 초심을 잃은 적 없는데 말입니다. 초심은 한 가지가 아닐뿐더러 거기 그대로 있는데다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초심들이 사람 안에 살지만 우리는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한두 가지만 봅니다. 좁은 거리감에서 오는 기대감이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요. 초심을 잃은 건 상대가 변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믿음이나 환상을 가진 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자신의 환상을 상대에게 투사해 초심을 잃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내 환상이 걷힌 자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상대의 초심이 되는 겁니다. 기대라는 가지에 달아버린 나의 환상이 언제나 문제인 것이지요. 이 모든 게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심리적 착시라는 생각이 듭니다.누구나 타고난 단점과 성장 과정의 결핍, 그로 인한 묻어버리고 싶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삽니다. 약점 많은 사람끼리 잘 지내려면 거리가 필요합니다. 저 테라스에 피어난 제라늄 화분만큼의 거리면 딱 좋겠습니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 만큼 꽃끼리 뭉치는 법도 없고, 남의 화분을 침범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심 거리를 확보한 꽃들은 거리낄 것 없이 화사한 빛깔을 피워 냅니다. 화분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저마다의 꽃잎들이 저토록 창 아래서 생기를 뿜지는 못하겠지요. 다닥다닥 좁혀진 거리라면 작은 바람에도 꽃잎끼리 부딪혀 물러지고 질척거리게 될 테니까요.찢어지기 쉽고 떨어지기 쉬운 꽃잎 같은 관계의 속성에 주목한다면 적당히 무심해야 오래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랄 게 없으면 야속할 일도 없습니다. 물이나 주고 바람정도나 통하게 두면 꽃피울 것을, 매일 물을 주고 매만지다 보면 꽃 피우기는커녕 새싹 돋는 것도 만나기 힘들겠지요. 매일 보면 찡그릴 수 있지만 가끔 만나면 웃음 짓게 됩니다. 괜히 고슴도치 이론이 있는 게 아니겠지요. 좋다고 비비대면 서로 돋은 가시에 상처만 입을 뿐입니다. 근원적인 친밀감이 형성되었다면 적당히 멀 때, 오래 가고 피로도도 덜합니다. 가까워지려고 허둥대는 마음이 항상 상대에게로 순정하게 전달되지만은 않습니다. 적당히 떨어져야 가볍고 산뜻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핀 꽃도, 예쁘다고 꽃병 앞에서 코를 박는다면 꽃병도 깨지고 내 코에도 파편이 박힙니다. 코를 들이미는 대신 맞춤한 거리에서 덤덤히 바라보면 그 꽃은 오래 갑니다. 자주 본다고 깊어지지도, 멀리 있다고 얕아지지도 않는 게 관계입니다. 요란한 결속일수록 풀어지고 흩어지기 쉽습니다. 관계의 밀도는 지근한 거리가 아니라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까요.마인드맵처럼 번져가는 반성문을 쓰다 보니 당장 아들에게 필요한 건 ‘모성의 거리’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리 두기의 지향점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네요. 타자로부터의 거리 두기는 스스로부터의 거리 두기에로 종결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내면과 떨어지는 연습을 통해 자기 객관화를 도모하는 길 말이에요. 가족애든, 인류애든 조금 떨어지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성숙된 사랑을 연습하고 실천할 일입니다.

2020-06-17

슈가 하이

병원 가는 날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흡입기와 천식 비염약 등을 처방 받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호흡기내과를 찾는 게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비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올 들어 가장 무더운 날씨랍니다. 여름이 채 오지도 않았는데 36도가 넘는데다 습도마저 높습니다. 차문을 열자마자 숨이 막히고 기침이 납니다. 비상용 인삼 캔디 한 알을 머금습니다. 사실 출발할 땐 더운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후식으로 달달한 케이크까지 먹은 터라 도리어 상기된 기분이었습니다.병원 마당 천막, 1차로 체온을 잽니다. 무사통과입니다. 호흡기내과가 목적지라고 했더니, 안내하는 분이 병원 모퉁이를 가리킵니다. 그 새 출입구가 바뀌었습니다. 공용 출입구에서 호흡기 환자 전용 출입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2층에 있던 호흡기내과는 입구와 가까운 1층 구석자리로 옮겨졌습니다. 모두를 위한 세심한 배려이자 온당한 조치입니다. 호흡기 질환이야말로 코로나 앞에서 주의가 필요한 기저질환이니까요. 취약한 면역력으로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건장한 이들에 비해 몇 배나 위험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묘한 긴박감과 미세한 파장이 일어납니다.진료실 입구, 2차로 체온을 잽니다. 미열이 있나 봅니다. 오늘 같은 날씨엔 다들 체온이 조금 높으니 괜찮다며 간호사는 진료 대기실을 안내합니다. 대기실 앞 접수대, 3차로 귀의 체온을 잽니다. 미심쩍은지 왼쪽 귀로 바꿔 잽니다. 37. 7도. 양쪽 귀 체온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규정 체온보다 높아 진료가 불가하답니다. 비대면으로 처방전은 받을 수 있답니다. 그토록 원했던 비대면 진료가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성사 되게 생겼습니다.다시 진료실 입구, 밀려나 처방전을 기다리는 동안 4차로 체온을 잽니다. 여전히 열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담당 간호사가 의자를 권합니다. 상냥함과 친절함을 장착했지만 그 맘이 편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감 있는 환자를 대면할 텐데 그 스트레스가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앉는 시늉만 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마음 씀이 진심으로 느껴져 더 미안해집니다. 친절 카드 작성으로 화답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걸로 보아 저 스스로 당황한 게 분명합니다. 멀쩡한데 체온이 높다니 어인 일일까, 그 생각에만 갇혀 있습니다.처방전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자주 들어도 금세 까먹는 각종 꽃들이 병원 뜰을 장식합니다. 꽃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대궁을 꼿꼿이 말아 올리지는 못합니다. 등나무 벤치에 맞춤한 그늘이 집니다. 가서 앉습니다. 왜 열이 나지? 하기야 밖의 열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 지경의 날씨이니 열이 오르지 않는 게 이상할지도 모릅니다. 높은 온도와 습도, 에어컨을 켠 차 안과 바깥의 온도 차, 달라진 병원 환경, 숨 돌릴 틈도 없이 재고 또 잰 체온, 가장 높은 체온의 시간은 늦은 오후라는 점 등이 갑작스레 열이 돋은 원인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부대껴 열을 방출하지 못한 제 몸이 일시적으로 과부하를 일으킨 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그 와중에 강력하게 덧붙이고 싶은 요인이 있으니, 단 맛 중독이 그것입니다. 후식으로 먹은 케이크와 차에서 내릴 때 긴급으로 입가심한 인삼 캔디 말입니다. 저는 단 것을 유달리 좋아합니다. ‘달콤함’을 먹으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슈가 하이(sugar high)라는 말이 제게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설탕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피로가 풀리고 흥분감 같은 걸 느끼는 현상 말입니다. 그 효과가 소멸되면 안 먹은 만 못하는데도 자꾸 찾게 됩니다. 완전한 공복에는 그런 욕구가 덜한데, 식후엔 뭔가 허전함이 밀려오면서 단 것이 뇌리에 맴돕니다. 욕구가 채워지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면서 활기가 돕니다. 높아진 오늘의 열은 여러 요인 못지않게 슈가 하이 현상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듭니다.김살로메소설가단맛은 생래적입니다. 기억의 원형처럼 자리 잡은 엄마 젖의 달콤함이 그 매혹적 중독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설탕맛에 홀릭 된 제 흥분지수가 열감에 기름 역할을 한 건 아닐까요.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습니다. 설탕에 기댄 제 심리 상태가 피톨도 달뜨게 했나 봅니다. 여러 약점이 드러남에도 쉽사리 단맛의 쾌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커피 없이 못 산 ‘커피 칸타타’의 여주인공처럼 노래해 봅니다. 다 없어도 괜찮아. 하지만 설탕만은 못 끊어. 열이 돋는대도 순간의 기쁨이 보장되는 설탕만은 못 끊어.사랑에 빠지는 게 죄가 아니듯, 적당한(!) 달콤함에 빠지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각설하고 처방약을 받아들고 귀가한 뒤 체온부터 쟀습니다. 정상입니다. 멀쩡하게 돌아온 몸의 온도, 혹시라도 당 떨어져 그런가 싶어 제 눈은 벌써 남은 케이크가 든 냉장고를 더듬습니다.

2020-06-10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봤다

1930년 경오생 조갑규 씨는 오늘도 일기를 씁니다. 소일거리로 만지던 재봉틀을 놓아버린 뒤 생긴 습관입니다. 91세, 노동에서 해방 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데 웬 걸요. 뒤늦게야 무료함이야말로 생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게 됐지 뭡니까. 버젓한 자식들이 둘레둘레 있으니 사전적 의미로는 독거노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일기를 써도 홀로 사는 왕노년의 하루해는 길기만 합니다.또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조갑규 씨 역시 평생 ‘심심하다’는 말뜻을 이해할 여가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시집 와, 농사일에서 장삿길까지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닳도록 노동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지금에야 일을 손에서 놓았지만 딱히 일 하지 않는 지금이 더 행복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잡념 생길 겨를이 없었던 바빴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몸은 고되어도 성취감 때문에 날아갈 듯한 날도 많았으니까요.이상한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은 더 힘듭니다. 성당도, 경로당도 갈 수 없으니 심심함을 넘어 사방이 막힌 기분입니다. 무료함을 지나 적요함의 공기가 방 안을 감쌀 때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한기가 온몸을 파고듭니다. 혼자 사는 조갑규 씨의 요즘 화두는 ‘무료함과의 전쟁’입니다. 이런 조갑규 씨의 일기장을 훔쳐봤습니다. 두어 컷을 담았습니다. 몇 구절을 원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코리나 병 때무내 백계 안 나가고 이섯다. 이 병이 언재 끈날지 모른다. 뱅글뱅글 돌면서 하류하류 지냇단다. 아무대 안 나가고 지배 이섯다. 하이 땃히 박게 내보이 버를입피 파락캐 도다낫다. 벅꼿 명알도 불근색가료 벌서 매자간다. 점심 반찬 토란국 계랄찜 해먹다. 오늘 책일다보이 시간가는 모고 이섯다가 벌서 5시가 다대다. 저녁 가래 해먹것다. 오를언 비가 와 날새 컴컴했다. 오늘도 그럭저럭 화루해가 다각구나. 고리나 병대무내 22째 집아내마 갓채이섯다.”조갑규 씨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기약도 없습니다. 갇힌 날들을 셈하면서 조갑규 씨는 뱅글뱅글 집안을 돕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따뜻해진 밖을 내다보니 버들잎이 파랗게 돋아났습니다. 어느새 벚꽃 몽오리도 붉은 색깔로 맺어갑니다. 무료할수록 허기는 더 잘 찾아옵니다. 점심 반찬으로 토란국과 계란찜을 해먹습니다. 책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벌써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저녁으로는 카레를 해먹습니다. 비가 와서 날씨는 컴컴해집니다.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해가 다 갔습니다. 22일째 집안에만 갇혀 있습니다. 조갑규 씨 일기체의 담백한 서술 방식이 어쩐지 난중일기를 닮았습니다. 심리가 반영된 내용은 아니지만 진술과 풍경 속에 조갑규 씨의 공허한 내면이 읽히는 듯합니다. 사진에 찍힌 장면 몇 구절도 첨부합니다. ‘왕노년’을 보내는 조갑규 씨의 도돌이표 일상이 이어집니다. 읽기 편하게 맞춤법에 맞게 올려봅니다.“소설 파랑새를 두 번째 읽었다. 오늘은 37페이지까지 읽었다. 성경 야고보서 4장 11절까지를 읽었다. 점심은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구웠다. 새 밥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28일 만에 처음 밖에 나갔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망우공원을 둘러서 큰다리를 건너서 갔다. 옛날에 살던 동네인 방천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봤다. 집으로 오다가 어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손짓했다. 같이 놀다가 갑시다, 했다. 이야기도 하고 오랜만에 잘 놀다가 왔다. 큰딸이 쌀, 돼지고기, 쌀과자 등을 배달시켜줬다. 손자가 사온 파로 김치를 담갔다. 하도 여러 가지를 가져와서 숫자도 모르겠다. 오늘은 봄바람이 완연하다. 밖에 내다보니 개나리꽃, 벚꽃이 피어서 만발하다. 방천에 사람들이 벚꽃 구경한다고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막내 내외가 와서 점심 돼지찌개해서 먹었다. 함께 방천 꽃구경하고 공원에 갔다. 집에 와서 커피 한 잔하고 갔다. 한 달 20일 만에 망우공원에 갔더니 빵과 우유를 (봉사회에서) 주었다. 안과 병원에 갔다. 소설책 129페이지 읽었다. 요한묵시록 22장 12절에서 17절까지 읽었다.”-조갑규씨 일기 중김살로메소설가코로나 때문에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조갑규 씨.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본’ 대목에선 숙연해집니다. 동네 윷놀이 친구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지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소설책 읽고. 그래도 심심하면 식솔들에게 차례로 전화하는 왕노년 조갑규 씨는 제 엄마입니다. 절약 세대의 모범생답게 여백마저 아까워 빽빽하게 공책을 메우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줄 넓고 칸 큰 일기장을 한 더미 사다드렸습니다. 동시대 할머니들이 쓴 시집과 일기집도 곁들였지요. 비껴 간 얘기긴 하지만, 시집과 일기집은 노년이 읽기엔 활자가 너무나도 작았습니다. 누구를 위한 책인지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나저나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밴 조갑규 씨가 줄 넓은 새 일기장을 잘 활용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2020-06-03

사념이 없어야

아침마다 음악과 시를 전송해주는 지인이 있어요. 연세도 많은 분이 어쩜 그리 한결 같으신지. 처음엔 송구한 맘에 의무적으로 클릭을 했지만, 요즘은 늦잠을 완벽히 깨우는 마법의 음료수로 삼고 있어요. 눈을 뜨면 습관처럼 찾곤 하지요. 누군가의 수고로 제 하루의 시작이 신선합니다.오늘은 황지우 시인의 ‘겨울산’이 배달되었어요.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몸은 부스스한데 정신이 버쩍 듭니다. 짧은 시지만 통렬하게 뜨끔합니다. 칼럼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시인의 일갈처럼 인간은 사색이 많아 괴로운 기회주의자들이죠. 그 출발점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평범한 우리들에게 욕망 없는 만족이 있기나 할까요? 욕망은 인간의 숙명적 굴레예요.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욕망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에요. 거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사색’이 문제인 거지요. 사념덩어리는 욕망하는 행위의 필수불가결한 부산물이에요. 그것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욕망을 좀 더 건전하게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상념, 그러니까 어떤 판단이나 계산 같은 것들은 욕망이 누는 똥이에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수반하지요. 내가 기회주의자일 때 파생된 잡념들이니까요. 사색만 버릴 수 있다면 욕망 자체는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념이 많다는 건 유리에 갇힌 파도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휘몰아치고 넘실대지만 자연스러운 게 아니니 제 안을 넘지 못합니다. 신선하지도 그렇다고 파란을 일으키지 못하지요. 끝내 해안선에 닿지 못하고 번뇌의 유리통만 되풀이해서 철썩일 뿐이지요.순수하니 몰염치해도 사랑스럽고 간절하니 맹렬해져도 용서가 되는 게 욕망이에요. 나아가 성취하면 오만해지는 것도 욕망의 속성이에요. 군자가 못 되는 대다수의 우리는 그렇게 욕망하면서 살아가지요. 욕망의 인간적인 면모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한 바퀴만 돌리면 다음과 같은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완벽하게 성숙하면 겸허해지는 것 또한 욕망이라는 것에요. 성숙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사색을 버리는 일이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쓸데없는 사색을 부려 놓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외곽지에서 폐차장을 만났습니다. 층층이 쌓인 껍데기들이 허공 속에 누워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한 컷을 얻습니다. 탐욕의 끝자락이 저 쨍한 하늘자리에 걸려 있습니다. 한 때 도로를 누비던 부질없었던 영광이 낡고 부스러진 사념덩어리로 켜켜이 쟁여져 있습니다. 위태로운 사색의 끝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의 짐을 덜려다 더한 마음의 짐이 생깁니다. 사특한 욕망이야말로 끝내 허망의 탑 쌓기와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인간은 근본적으로 ‘홀로쟁이’입니다. 어느 프로파일러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에게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그래서 매체로는 동물의 왕국만 본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생각에 동조할 때가 있습니다. 쌉싸름한 희망보다 달콤한 비관이 가슴을 지배하는 그런 날이 가끔 있잖아요. 그래서 누구나 외롭고 누군가는 고독을 즐긴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외로움과 고독 구별법,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저만의 풀이를 달아봅니다. 감성적 에너지로 자신을 갉으면 외로움이에요. 한마디로 괴롭지요. 그 자리에 창조적 에너지를 쏟으면 고독이 되는 거지요. 견딜만한 희열이지요. 어차피 무에서 시작하는 유는 없어요. 있는 유를 파괴한 찌꺼기가 신선한 창조물이 되는 거지요. 완벽에서 새로움이 생길 리 없잖아요. 새로움이야말로 기존의 새로웠음을 밟고 일어나는 뭉근한 혁명이니까요.지인의 전화기 퍼스나콘에서 이런 뉘앙스의 문구를 본 적이 있어요. ‘징징대거나 불평하지 말아요. 열심히 나아가요.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요. 나는 나예요. 이유를 찾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가만 읽어 내리면서 욕망이나 고독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거니까요.김살로메소설가여전히 혼자 또는 소수를 강권하는 나날이에요. 코로나가 친숙한 친구가 되어가는 동안 건강한 욕망을 꿈꿔도 좋을 것 같아요. 외로움을 고독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연습도 괜찮구요. 주변을 챙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게 결코 견디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가만 자문자답해봅니다. 외로운가요? 욕망해서 그래요. 하지만 괜찮아요. 욕망은 나쁜 게 아니니까요. 다만 명심하세요. 욕망의 똥덩어리인 사념을 버려야 건강한 고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번드르르하거나 번잡함 뒤의 공허한 잔해. 삶의 실체적 진실이 자명할수록 우리는 잘 견뎌내야 하니까요. 더한 사색이 쌓이기 전, 빨리 집으로 가야겠어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0-05-27

깔끔하게, 담백하게

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데이지와 달리, 꽃송이와 잎사귀가 뒤섞여 피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데이지는 꽃송이는 송이요, 줄기는 줄기요,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각각 제 자리를 지켜 핍니다. 튤립이 그러하고 양귀비꽃도 비슷하긴 해요. 깔끔하기로만 따진다면 그 둘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꽃은 어쩐지 고고한 느낌이 있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그에 비해 데이지꽃은 적당히 소박하고 알맞게 단정한 모습이지요.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소담스럽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꽃입니다.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피었소.’ 하고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위엄이나 날렵한 멋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요.사람도 마찬 가지예요. 데이지꽃만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요. 학창 시절, 의기소침하면서도 질척댔던 저에 비해 담백한데다 넘치지 않았던 그 친구를 참 좋아했었지요. 심지가 곧으니 포장할 필요가 없고, 사심이 없으니 과장할 이유도 없는 그런 성정의 친구였어요. 얼핏 보면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단체 미팅을 했을 때였지요. 누가 봐도 괜찮은 남학생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어요. 성격 상 호들갑을 떨거나 적극성을 비칠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것이 도리어 그 남자를 도발했나 봐요. 친구에게 꽂힌 남학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를 찾아 왔어요. 물론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나치다싶을 만큼의 무덤덤함이 오히려 남학생을 울릴 만큼의 매혹이 되었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알지 못했어요. 소식조차 모르는 그 친구를 지금 만난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천진스럽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단호했던 그 면을 제가 좋아했던 거지요. 아마 남학생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나 싶어요. 복잡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잖아요. 단순함과 깔끔함은 같은 집안 아니겠어요.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꽃 같은 이미지의 글을 선호합니다. 그러려면 덜어냄의 미학이 우선 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도 너무 기네요. 글의 본질은 주제에 있어요. 전하고 싶은 게 선명하면 말에 꼬임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맘이 허욕으로 들떠 있을 때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손끝에 힘이 들어차니 글이 무거워집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켜켜이 쌓는 순간 형체는 모호해지고 끝내 글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마감에 내몰릴 때면 정도는 더 심합니다. 며칠 지난 뒤 보면 버릴 것투성이입니다. 퇴고의 명약은 시간이라는 걸 느끼는 부끄러운 순간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무거운 날이면 데이지꽃을 떠올립니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잡념부터 없앱니다. 쓰잘머리 없는 곁가지 치기에 집중합니다. 더하기는 쉬워도 빼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한 줌 덜고 두 말씀 닫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오후로 가는 수목원, 한밭으로 깔린 데이지 언덕에 오월 바람이 나부낍니다. 여백 깃든 저 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날 글꽃들을 그려봅니다. 꽃송이와 주변부의 조화를 생각하며, 줄기는 곧게 이파리는 조금 멀리 플롯을 짜봅니다. 꽃잎 아래, 보일락 말락 배경으로 들일 꽃받침도 잊지 않지요. 덤덤한 듯 정갈한 글 꽃 한 송이, 꽃대를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미소 짓는 아침입니다.

2020-05-20

첫맛

바닷가를 지나다 트럭 행상을 만났습니다. 한 차 그득 쌓아놓고 파는 것도 놀라운데, 그 내용물이 한라봉이라는 데서 더욱 놀랍니다. 감귤이 흔해진 지는 오래지만 업그레이드 된 파생 종류마저 흔하디흔한 세상이 올 줄 몰랐습니다. 한 컷 담겠다는 양해를 구하며 신기해하자, 사장님 왈, 제주 농장과 직거래하기 때문에 신선한 상태로 박리다매가 가능하다나요.제가 귤을 처음 본 것은 1974년 겨울 무렵이었어요. 삼촌이 귀향길에 사온 것이지요. 깡촌 아이였던 제게 귤이란 어린이 잡지책 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의 과일이었지요. 주황빛 부드러운 껍질을 벗겨내자 촘촘하게 박힌 과육이 보이고, 그것을 가르면 초승달 모양의 여러 조각이 되는 거예요. 모양부터 이국적이라 경이로웠지요. 조심스레 한 조각 베어 물면 입안으로 퍼지는 달콤함도 잠시, 목구멍을 적시는 새콤함에 온몸이 저릿해졌습니다.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지요. 귤 종류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제게 그건 어디까지나 귤이 흔해지고 난 뒤의 일입니다. 바나나 같은 건 구경도 못할 시절에 귤은 그 첫맛만으로 어린 입맛을 사로잡았더랬지요.귤의 첫맛이 입맛의 로망을 실현시킨 보편적인 예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거예요. 기대한 맛을 충족시킨 추억이 아련함에서 그친다면 실망한 맛을 남긴 추억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요즘, 틈날 때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찾아서 봅니다. 판타지가 아니라 지난날에 기대는 몇몇 작품은 제가 지나온 시절들과 아주 닮아 있어요.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다가 곧장 웃음이 터지는 거예요. 파인애플 첫맛에 관한 시퀀스 덕분이지 뭡니까.가족 온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5학년 타에코는 보기에도 요상한 파인애플을 보고 졸라서 사게 됩니다. 하지만 식구들은 먹는 방법을 모릅니다. 다음날 큰언니가 배워온 방법대로 엄마는 중간을 잘라 박힌 심을 발라냅니다. 피자조각 같은 노란 파인애플 속살이 드러나고, 할머니를 비롯한 모인 식구들 눈동자가 일제히 파인애플 위에 동그랗게 꽂힙니다. 찰나의 긴장된 침묵이 끝나고 식구들은 저마다 한 조각씩 베어 뭅니다. 천상의 맛을 기대했건만, 그날 파인애플 맛의 진실은 썰어놓은 무맛만도 못합니다. 먹기를 포기한 채, 애써 외면하는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타에코는 꾸역꾸역 파인애플 조각을 입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역시 과일의 왕은 바나나야, 이런 혼잣말을 내뱉어보지만 위로가 될 리 없습니다. 어린 타에코와 제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때까지도 저는 바나나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김살로메소설가비슷한 기억 하나를 소환하지요. 도회로 이사 온 후, 입주 과외를 하던 오빠가 첫 월급을 타서 과일을 사온 적이 있어요. 백화점에서 파는 과일 바구니 속, 구색 맞춰 담기는 것 중 하나라는 것만 알았을 뿐, 이름도 속도 모르는 과일이었어요. 거친 박처럼 생긴 그것을, 타에코네가 그랬듯이 우리 식구들 역시 먹는 법을 알 리 없었지요. 일차로 엄마가 과도로 자르기를 시도했습니다. 칼끝이 끄떡도 하지 않았지요. 첫 귤을 먹던 그때가 떠올라 저는 자꾸만 목구멍으로 침을 삼켜야만 했어요. 생채기로 얼룩진 채 끄떡도 않던 그 요물은 오빠가 식칼을 들고 힘자랑을 한 뒤에야 실체를 드러냈어요. 어슷하게 잘린 과일 머리 사이로 오줌 줄기 같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식구들 눈빛은 적잖이 당황하고, 새콤달콤한 과육을 기대했던 저는 실망감에 주저앉고 맙니다. 무맛보다 못한 음료 한 잔, 그게 그날 얻은 수확의 전부였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것이 야자열매인 코코넛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확실히 첫맛은 환희에 찬 ‘새콤달콤’보다는 실망으로 소침해진 ‘텁텁밍밍함’이어야 해요. 달콤한 첫맛은 너무 당연한 기억이라 우리의 정서에서 소환될 기회가 후자보다는 못해요. 마치 귤 맛에 익숙해진 제가 더 이상 그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요. 기대했던 첫맛에 아려본 적 있을수록 삶의 소환장에 기록될 확률이 높아요. 때 이른 계절의 파인애플 맛을 만나거나 전혀 엉뚱한 코코넛 내용물의 실체를 알아챌 때, 우리 삶은 풍성해지고 공감 지수가 높아지니까요. 예견된 미감이나 충족된 호기심보다 실패한 환희나 실망했던 기대감이 더 나은 재산이 되는 셈이지요. 기상천외의 짠함으로 버무린 웃거나 울게 하는 온당한 좌절, 누가 뭐래도 그건 그 자체로 진실 된 에피소드가 되는 거예요. 아주 오래된 그 첫맛은 마법의 주문이 되어 누군가를 독려하고 진작시키는 힘이 되니까요. 과일에서 사랑까지, 첫맛이라면 다소 텁텁하거나 호되어도 나쁘지 않아요. 적당히 무너져줘도 괜찮은 거예요.각설하고, 그대들의 첫맛은 안녕하신지요?

2020-05-13

어머니의 뜰

어머니는 아직도 혼수방에 나가십니다. 그곳에서 당신 노년의 뜰을 가꾸듯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십니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에게 바느질은 벅찬 노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오남매 어느 누구도 애써 그것을 말리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손끝이 평생 바지런함과 친구해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소일거리가 있다는 게 당신 여생의 활력과 건강을 위해서도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한창 때의 체력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천성이 밝고 재바른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들 앞에서 당신 건강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지요.그해 봄, 혼수방으로 일 나가시는 어머니의 배웅은 노환과 병색으로 힘든 아버지 차지였어요. 이른 아침을 드신 어머니가 집을 나서 지름길인 방죽계단으로 올라섭니다. 겨울 뜰에 버려진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아버지가 힘겹게 한 계단, 한 계단 따라 나섭니다. 둑방 아래 금호강에서는 풀어헤친 여인의 속치마처럼 물안개가 솟아올랐지요. 어머니는 물안개에 떠밀리듯 방죽길 속을 잰 걸음으로 걸어가셨지요. 안개 속 희미한 실루엣을 한 어머니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아버지를 향해 ‘어여 들어가라’는 손사래를 치곤했지요. 어머니가 먼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요.연민과 구차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이런 익숙한 아침 풍광을 지켜보던 나는 은밀한 가출을 꿈꾸곤 했어요. 원하던 대로 결혼을 하면서 집을 떠날 때, 잔정 많은 병든 아버지는 우셨지만 날개를 꿈꾸던 저는 마냥 웃었어요. 남은 밭뙈기까지 팔아 아낌없이 결혼자금을 마련해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같은 건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철없는 탈출이었지요. 그렇게 막내인 저를 마지막으로, 우리 오남매는 콩깍지를 벗어난 콩처럼 통통 분가를 하고 새로운 식솔들을 거느렸지요.어머니가 없는 온 낮을 아버지는 혼자 견뎌내야 했어요. 안방 윗목, 아버지 손끝에서 바스락대선 약봉지들 소리를 신호삼아 천식 앓던 당신의 기침소리가 고요히 퍼져나가곤 했지요. 지루함을 견딜 수 없을 때,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바로 집 앞 방죽으로 올라갔어요. 그곳은 또 다른 아버지의 뜰이었지요. 아버지는 멀리 강물을 바라보곤 했어요.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강물 위로 종달새가 낮게 날아다녔지요. 아버지는 방죽 위에 쪼그리고 앉아 까불대는 종달새의 생기발랄한 지저귐을 부러운 듯 바라보곤 했어요.아버지는 그해 마지막 이승의 봄날을 당신만의 뜰에서 그렇게 적요와 쓸쓸함으로 버텨내고 있었지요. 저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안부전화조차 자주 하지 않았어요. 칙칙하고 병약한 아버지의 하루가 까닭 없이 설레는 제 신혼생활에 방해가 되는 게 싫었던 거지요.김살로메소설가어스름 저녁, 긴 방죽을 따라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면,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를 마중하러 둑방 계단을 올라서곤 했지요. 멀리 도심의 화려한 불빛을 지고 어머니가 돌아오십니다. 아카시아꽃잎처럼 머리칼에 핀 몽실몽실한 솜먼지가 어머니 노동이 얼마나 고되고 또한 아름다웠는지를 말해줬어요. 아버지는 말없이, 풍성한 어머니 머리카락 사이에 피어난 솜꽃을 하나하나 떼어내 주셨지요. 그 모습은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아 쓸쓸하게 서로를 보듬는 겨울새 한 쌍 같았지요.아버지는 그해 오월을 넘기지 못했어요. 수선스러움도 없이 너무도 고요하게 돌아가셨어요. 늘어난 약봉지만 남긴 채 쓸쓸하게 떠나신 아버지를 부르며 저는 목 놓아 울었어요. 너무 늦은 후회만큼 쓸 데 없이 큰 울음이었지요.친정집을 둘러봅니다. 어머니 없는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흔적들이 좁은 뜰 곳곳에 보입니다. 담장 밑을 손수 파고 심은 넝쿨장미는 온 담장을 휘감아 지붕까지 뻗어 있습니다. 방죽 위, 당신만의 뜰에서 쪼그리고 앉아 캐내왔던 어린 유도화는 어김없이 여름이면 붉은 꽃잎을 말아 올립니다. 지천에 널려 있던 나팔꽃씨를 받아 화분에 키우던 분도 아버지셨지요. 아버지의 나팔꽃은 지금껏 봄이면 싹을 틔워 가을이 질 때까지 옥상 난간을 휘감곤 하지요. 나팔꽃이 얼마나 순하게 싹을 틔우고 얼마나 부드럽게 꽃을 피우는지 아버지 덕에 알게 되었어요.아버지가 안 계시는 지금도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십니다. 당신 신성한 노동의 뜰에서 잠시 지치면 어머니는 가만, 아버지의 시간을 추억해낼지도 모릅니다. 방죽 위, 그 쓸쓸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와 목소리와 눈빛들. 머리칼에 핀 작은 솜꽃을 떼어내 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그리며 말없는 미소를 지으실 거예요.

2020-05-06

신발을 돌려놓으며

몸살이 났습니다. 팔다리가 쑤시고 기침도 납니다. 금세 나을 거라며 지인이 한의원을 소개해줍니다. 사흘 치의 약만 쓰면 된다는 선생님의 호언과는 달리 기침이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치료제를 쓰는 건 더 이상 의미 없으니 보약으로 바꿔 보잡니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원기 회복제로 몸을 다스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조심스레 여쭙니다. 염증을 가라앉힌 후에 약재를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순간, 의자에 앉은 선생님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기서 진료를 끝내겠다는 신호입니다. 떼밀리듯 집을 향하는데 뭔가 서럽습니다.여기까진 제 입장이고 의사선생님에게 감정이입해 봅니다. 남들 다 쉬는 토요일 오후, 피로감을 몰아내며 진료실을 지킵니다. 마지막 환자까지 나름 최선을 다해 상담하고 처방해줬건만 당사자가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며 휴식이 그립습니다. 자제심을 놓치고 환자에게 속내를 비치고 맙니다. 신발을 돌려놓듯 이렇게 바꿔 생각하니 별일도 아닙니다.현관문을 들어섭니다. 정말이지 신발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습니다. 앞코가 까진 보라색 등산화와 뒤축 닳은 에나멜 단화를 지나, 느슨하게 묶은 밑창 말랑한 운동화와 굽 높은 철 지난 갈색 부츠까지 식구들 개성을 말해주는 신발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저린 발바닥을 달래가며 하루를 저벅댄 고단함이 묻어있고, 흔전하게 배었다 서서히 말라가는 땀 같은 연민이 서린 저 신발들. 살아낸 날들의 구차한 추억과 살아갈 날의 막연한 희망이 교차로처럼 엎어지고 포개져 있습니다. 아픈 것 잠시 내려놓고 한 켤레씩 간수합니다. 신발코를 현관문 쪽으로 돌려놓으면 신발정리는 끝이 나겠지요. 한 호흡의 짧은 시간이지만 역지사지하는 순간입니다.신발을 돌려놓는 마음은 한 청년에게서 배웠습니다. 잠시 잠깐 아들의 과외 선생님이었던,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하고 선한 대학생 말입니다. 방문 첫날,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선생님은 자신의 벗은 신발을 현관문 쪽으로 가지런히 돌려놓는 거예요. 손님을 배려해 집주인이 신발코를 돌려놓는 일은 봤어도 방문객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냥 들어오시라고 해도 싱긋 웃기만 할 뿐 매번 그렇게 하더라고요. 제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던, 젊디젊은 청년의 역지사지 매무새가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더군요.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이 선생님으로서도 최고였음은 첨언할 필요조차 없지요. 자기관리를 하는 동시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습관화 된 청년 같았습니다. 신발을 단정히 돌려놓던 첫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요. 자신을 갈고닦아 예의와 염치를 실행하는 마음. 섬세한 결을 지닌 청년의 역지사지를 보면서 한동안 자기반성 모드가 되곤 했지요.역지사지가 덜 된 제 실수담이 떠오릅니다. 역시 신발에 관한 것이군요. 시각장애인 봉사 모임에 동참한 적이 있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짝을 이뤄 야외 나들이를 갔지요. 제 짝지는 초로의 신사분이셨어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였지요. 초보 봉사자인데다 덜렁이인 저는 짝지의 신발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짝꿍의 신발 정도는 가뿐히 챙기는 다른 봉사자들에 비해 저는 우왕좌왕 헤맸지요. 난감해하는 저를 보고 베테랑 봉사자가 도와줘 신발을 찾긴 했어요.김살로메소설가하지만 부끄러움은 온전히 제 몫이었습니다. 짝지가 신발을 벗을 때 도와드리긴 했지만, 그 분의 신발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깨치지 못했어요.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행위에만 제 마음의 방점을 찍었던 거예요. 행위만 앞섰지 그들 입장에 대해 숙지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신발을 돌려놓는 마음의 수련이 있었더라면 짝지의 신발을 기억하는 것쯤이야 유쾌한 과제가 되었을 텐데 말예요.일본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도 구두를 돌려놓는 장면이 두어 번 등장합니다. 현관을 들어설 때면 맏딸 요코는 벗은 자신의 구두를 바깥 방향으로 가지런히 되돌려 놓습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작은 일이야말로 세상사 소중한 그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기 훈련이 필요하고, 잘 다져진 그것은 역지사지로 연결되어 좋은 기를 발산한다고 의미 부여하곤 했지요.덧놓이고 흐트러진 신발들을 다시 갈무리합니다. 피로처럼 달라붙은 뒤축의 젖은 흙을 털어내고, 통증처럼 내려앉은 신발 웅덩이 속 먼지도 닦아냅니다. 신발코가 현관 쪽으로 향하도록 한 켤레씩 돌려놓습니다. 신발들 금세 새초롬하니 단정해집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작은 행위는 자기수양을 구하는 안으로의 수렴이자 타자이해를 실천하는 외적 발산입니다.분별하려는 마음이 돋을 때마다 신발 돌려놓기를 생각합니다. 포개지고 헝클어진 마음의 코를 바깥쪽으로 향합니다. 결코 표 끊은 적 없지만 역지사지라는 삶의 환승역에 닿은 느낌입니다. 한결 가벼워진 덕분일까요. 약으로도 낫지 않던 통증이 점점 잦아드는 기분입니다.

2020-04-22

드라이브 스루

봄볕이 따습습니다. 겨우내 갇혀 있던 화분들을 베란다 창턱에다 내놓았었지요. 다육이들 작은 잎새마다 새순이 돋고, 빨갛거나 노란 기왕의 잎들도 선명한 때깔을 자랑합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 캠페인으로 갑갑하지만, 앙증맞은 잎들을 살피노라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됩니다. 몇몇 화분을 더 들여야지 하는 핑계를 앞세워 봄 마중을 나섭니다.봄을 보채는 온갖 물상들이 점멸등처럼 깜박입니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먼빛의 아른거림을 시작으로, 아파트 꾸밈 벽 바위틈을 뚫고 핀 영산홍의 춤사위며, 물기 서린 바닥으로 내려앉는 벚꽃들의 분분함이 차례로 어룽거립니다. 볕이 다사로울수록 쉬엄쉬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길섶, 사과 바구니를 갈무리하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넓디넓은 과수원을 배경 삼아 앉은 품새가 쩨쩨하거나 손이 작아 보일성싶지는 않습니다. 잠깐 실리적인 계산속이 제 머리를 스칩니다. 공판장이나 마트보다는 싸고 맛난 과일을 ‘득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생각보다 비쌌지만 흥정도 에누리도 없이 한 바구니를 샀습니다. 할머니가 사과를 꾸리는 동안 저는 과수원에 내려앉은 별사탕 같은 봄까치꽃을 앵글에 담았지요.다시 길을 나섭니다. 벚꽃 터널이 시작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상춘객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drive-thru) 안내 현수막이 꽃길 따라 나부낍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서나 필요했던 이 첨단의 방식이 행락에도 적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지요.아시다시피 드라이브 스루는 주차하지 않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합니다. 우리말로 다듬자면 ‘승차 구매’쯤이 될까요. 장소를 가리키는 의미라면 ‘승차 구매점’도 될 수 있겠네요. 순화한 표현도 순우리말이 아니니 굳이 바꿔 부를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일찌감치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다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비대면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한 것은 아니었겠지요.단순하고 스피디한 것을 마다않는 저는 코로나가 오기 전부터 드라이브 스루에 호의적이었답니다. 햄버거 한 세트를 사기 위해 매번 매장 안을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니 이보다 매혹적인 편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미가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서비스 주체와 손님 간에 신뢰만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요. 실제 드라이브 스루로 구매한 햄버거가 잘못 나온 적이 있었는데, 직원의 친절한 전화 응대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경험도 드라이브 스루에 긍정적인 제 마음에 일조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경상도식 발음 영향인지 ‘드라이버’라고 틀리게 인쇄된 현수막 글씨마저 인간적입니다. 드라이브 스루는 원조 격인 미국보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보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는 동안 우리 의료진이 보여준 창의적이고도 성공적인 이 검진 방식에 전 지구촌이 주목했다니 의료진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하염없이 꽃터널만 드라이브 스루하다 화원엔 들르지도 못한 채 귀가합니다. 목이라도 추길 겸 봉지에서 사과를 꺼내는데 썩은 것이 눈에 띕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좋이 삼분의 일은 검은 구멍이 송송 나있습니다.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지만 속임수 없는 이문 또한 불가능한 것일까요. 시골할머니에게 장삿속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믿는 것은 사랑이 로맨스만으로 이뤄진 거라고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렸네요. 순박한 꽃을 입은 악덕에 상처 받은, 착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저는 괜히 꿀꿀해집니다.가만 되돌아봅니다. 더 싸고 맛난 과일을 접수할 수 있을 거라고 설레발친 것은 제 마음이었지요. 할머니가 저를 속인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를 속인 셈이지요. 욕심 낀 마음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니까요.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면 스스로를 속일 때야 가능한 일임을 알겠습니다.눈 마주치고 손 맞잡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사람 모인 곳이 항시 비로드 조각보처럼 포근하거나, 데워진 찻잔처럼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내 한 가슴에서 두 심장이 뛰면, 한 입에서 두 혀가 움직김살로메소설가이는 화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반대로 직접 부딪히지 않더라도 신용이란 끈으로 선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게 관계입니다. 긴가민가하지만 결과적으로 단호한 믿음을 주고, 갸우뚱대지만 결국 정한바대로 얻을 수 있는 드라이브 스루 같은 것 말입니다. 물리적 대면이 없다고 해서 마음마저 드라이브 스루하는 건 아니니까요.머잖아 식당, 건강검진, 은행 등 도처의 업무에 드라이브 스루가 적용될 날이 오겠지요. 하지만 제 아무리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에 동조하는 저 같은 이라도 그 바퀴 굴리고 싶지 않은 분야도 있답니다. 이를테면 꽃 터널에 갇혀 못다 본 봄꽃 거래라면 드라이브 스루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눈으로 느끼고, 손으로 맛보며, 코로 만질 수 없는 방식이라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 곁엔 있으니까요. 달디 단 꽃잎 옆에는 벌 나비가 바싹 붙을수록 섭리에 가까운 거잖아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0-04-15

풍경의 마음, 마음의 풍경

이번 주부터 김살로메 작가의 포토 에세이 ‘뜻밖의 시선’을 연재한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풍경과 사람의 순간을, 사진 곁들인 사색의 글로 갈무리하는 코너이다. 작가의 소박한 시선이 독자들과 호흡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심상치 않은 나날입니다. 전 지구촌을 장악한 바이러스 무리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폭풍처럼 진군하는 저 기세 앞에서 평범한 일상이 꺾인 지 오래입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유폐의 시간이 친구처럼 따라붙는 날들입니다.갇힌 세상, 여유가 넘쳐납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보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간을 살피는 망울은 금세 흐릿해지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길은 기다렸다는 듯 민첩함을 잃어갑니다. 위급은 불안을 낳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시간이 남아돈다 해도 불안한 마음이라면 집중도가 발휘될 리 없습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온통 혼란스럽기만 합니다.고개를 돌리고 호흡을 가다듬어 봅니다. 오후 봄 햇살이 부엌 구석진 곳까지 길게 와 닿습니다. 햇살에 겨워 블라인드를 내리려다만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한껏 다사로워진 빛살을 흐트러진 마음 깊숙이 끌어당깁니다. 금세 가슴 한 쪽이 따스해집니다. 느꺼웠든 부끄러웠든 우리 삶은 스스로의 도움만으로는 어림없었음을 자각합니다. 수고하고 짐 진 것들이 베푼 선의로 내 하루는 살쪄왔습니다. 이를 테면 저 깊게 퍼지는 봄 햇살 같은 소박한 모든 것들에게 하루를 빚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물일 수도, 생각일 수도, 더러는 사람일 수도 있는 그 모든 것들을 풍경이라 명명하겠습니다. 별 것 아닌 그 풍경들을 불러내 제 식으로 말을 걸고 스스로를 성찰할 참입니다.표출되지 않은 결심이나 계획은 그야말로 미완의 설계일 뿐 완성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꿈만 꾸는 자리에는 진정한 영혼이 깃들 리 없습니다. 머리에 머문 생각들이 가슴으로 내려와 말이나 행동으로 발산될 때 제대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면 장고의 시간보다 어설프나마 행동하는 날들이 값질 때가 많습니다.예를 들면 어느 날부터 한 장의 사진이 많은 말을 품고 있다고 느끼는 걸 어떻게 설명할까요. 한 컷 물상으로 앉은 그 품새에 많은 의미들이 녹아 있는 게 보입니다. 오도카니 앉은 그 말들을 진솔하게 번역하고픈 욕망이 생겼답니다. 글 쓰는 이로서 아주 늦은 자각이었지만 그 매혹은 뿌리치거나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되었지요. 어떤 한 컷이 말을 걸어오면 반사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로 정리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실제 풍경과 마음의 풍경 즉, 심상이 교집합을 이루는 한 지점에서 스파크가 일듯 새로운 말들이 마구 번져가는 것이지요.저는 사진가는 아닙니다. 사진가가 될 마음도 없습니다. 사진에 관한한 예술적 눈썰미와 이 지면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요. 미적 완성도에서 자유로운 사진일 때 제 글도 한껏 날개를 달 수 있겠지요. 앞으로 펼쳐질 에세이에 곁들이게 될 한 컷의 장면은 문화역사적 시각이나 사진학적 의미로서 언급될 일은 없을 거예요. 사진이 요구하는 객관적인 약속이나 양식에서 벗어나, 저만의 시각이나 감각으로 포착하고 감지한 것들을 언어로 옮길 테니까요. 하잘 것 없는 장면일지라도 가슴을 찌르는 제 식의 정서가 발동한다면 기꺼이 셔터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리겠습니다. 여러 풍경이 선사할 뜻밖의 의미들을 풀어내는 이 작업이 자못 흥미롭습니다.여전히 매체들은 바이러스 전파 소식으로 도배를 합니다. 배경으로 따라 붙는 ‘코로나19’의 로고는 어쩜 그리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에 반하여 영롱한지요. 그토록 강력한 전파력을 숨기고자 신비롭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치장한 채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주의 꽃을 가장한 저 바이러스는 어쩌면 인류 보편에게 전하는 서늘한 경고 같습니다. 무해한 타인의 선의를 헤아리지 못하거나, 소중한 것들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곁에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울림의 무늬 같은 것 말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삶이란 온전히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참담하게 비극적인 것도 아니지요.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비관이나 불운을 곁에 두되, 그보다는 의식적인 낙관이나 희망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갔으면 합니다. 험난한 시간을 어떻게든 견디는 것도 위에서 말한 풍경의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벨 소리에 현관문을 엽니다. 하 수상한 시절인데도 택배 아저씨의 수고로움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울릉도에서 지인이 햇명이 장아찌를 보내왔습니다. 나물향이 포장 박스를 뚫고 온 집안으로 번집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완연하고 인간적인 봄 내음입니다. 봄이면 새 잎에다 향기라지요. 봄이면 꽃이나 희망이라지요. 첫 사진 전송을 봄 명이나물이나 늦은 명자꽃으로 하려다 멈춥니다. 파문 앓는 여러 날들이 새순이나 꽃망울로 맺기까지, 차분한 기도보다 나을 게 없을 테니까요.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사회적 거리의 시간들이 저마다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기만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글·사진= 소설가 김살로메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