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옮겨 지은 평해 향교와 이산해가 본 평해

큰 규모의 평해향교 태화루와 명륜당.

향교는 사학인 서원과 달리 관학이라 도심지 주변 5리 내에 있어야 되기에 잘 옮기지 않는데 울진과 진보, 영덕, 영해 등 동해변에 있는 향교들은 자주 옮겼다. 그것은 행정구역의 변경이 가장 큰 원인이다. 평해도 원래 군으로 독립되어 있다가 울진군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읍성도 도심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 도심 속에 있다보니 그 기능이 사라지고 도시화로 개발되면서 없어지는 운명에 처했다. 평해 읍성도 일부만 남아 그 흔적도 희미하다.
 

이산해가 귀양와서 충격받았던 평해 바다마을.
이산해가 귀양와서 충격받았던 평해 바다마을.

#. 동네북이 된 평해

사는 사람은 변함없는데 행정의 편의따라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마음껏 휘둘린 평해는 고구려 때는 근을어(斤乙於), 신라 때는 명주, 고려 때는 동계, 조선시대는 강원도에 속했다. 울진을 우진아현(于珍也縣), 평해를 근을어라 부르다 고려 초에 평해로 불렀으며 충렬왕 때 군으로 되었다. 1914년 강원도 평해군은 울진군에 흡수되고 평해면은 기성면에 편입되고 월송면이 평해면으로 된다. 1963년 강원도 최남단 울진군은 경상북도 최북단 군으로 바뀐다. 또 평해면이 1980년 평해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의 평해는 행정의 변화에 따라 쇠락한 시골의 전형적인 면 단위 같이 북적대는 사람도 없고 한산하다. 평해 중·고등학교가 산언덕에 제일 큰 건물이 되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읍사무소 오른편으로 가파르게 오르면 평해 향교가 산비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평해 향교의 역사는 1484년(성종 15년) 조선시대 지은 울진향교보다 127년 빠른 1357년(공민왕 6년)에 명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반월산 아래에 지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김한철 군수가 지금의 성릉동으로 옮겨지었다. 우리나라 향교 어디를 가나 문은 잠겨있고 1년에 한두 번 제사지내는 것 뿐이다. 간간히 예절교실이나 충효교육 하는 것 외는 방치수준이라 완벽하게 제사지내는 반쪽 형식만 남았다.

조선의 제도와 법의 기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년)은 “학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인 동시에 인재가 이곳으로부터 배출되며 나라를 다스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결국 인재의 성쇠에 달려있고, 인재의 성쇠는 오로지 학교의 흥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향교는 서울의 성균관(태학, 국학)과 함께 국가의 지방관학으로 8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향교는 조선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관학으로 제향과 강학을 동시에 담당했던 곳이다. 조선에서는 각 지방에 1읍1교의 원칙을 두어 전국 각지에 1교씩 향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평해읍성은 집들이 들어서 흔적도 없다.
평해읍성은 집들이 들어서 흔적도 없다.

#. 고향사람과 귀양자가 본 428년 전의 평해

“풍진 세상에 무, 문관으로 분주히 살아왔다.(風塵奔走武文間), 나이가 들어서야 고달픈 새로 돌아왔다.(暮境方知倦鳥環). 크게 한하는 것은 고향마을이 도회지와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꽉 막혀서 이곳 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없고 아무리 똑똑해도 배경이 없으니 중앙에 나아가 출세할 수도 없는 울진(평해)사람들을 보고 매우 가슴 아프다.

그러나 이곳 고향 마을이 비록 작지만, 맑고 고요한 마을로 이곳은 호중계(壺中界·신선이 머무는 곳)라 한다고 하였다. 이곳은 태백산의 한 가지로 나누어진 모태(母胎)가 되는 산이며…. 황여일(1556~1622년)이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 평해 기성 사동으로 돌아와 해월헌을 만귀헌으로 고쳐짓고 쓴 글이다.

다음은 1590년 영의정이 된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정을 잘못 운영해 왜적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고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릉, 동해, 삼척을 거처 지금의 울진 평해로 와서 쓴 ‘기성풍토기’다.

“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의 서경포에 임시로 묵게 됐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수십 보가 채 안 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10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 때문에 코를 감싸 쥐고 구역질이 나려 했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생각했다.”

‘해빈단호기’에서는 그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바닷가의 단호(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한 곳이 있으니 사동도 그 중 하나라 했다.

연이어 ‘기성풍토기’를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토질이 척박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집집마다 거처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두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다….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기가 항상 자욱이 피어 병이 들었다 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온 고을에 노인이 적다…. 이 지방의 풍속이 귀신을 숭배해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짓고….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 한자는 모두 무당이다. 성씨는 손씨와 황씨가 많고 명색이 향교에 소속됐다는 이들도 글은 모르고 모두 활을 잡는다. 인심은 순박한 듯하지만 실상은 싸움과 소송을 좋아한다…. 사람을 안장할 때는 대다수 산꼭대기에 묻고 혼인을 할 때는 굳이 먼 곳에서 배필을 구하지 않으며 예법은 소략하나 적서(嫡庶)의 구별은 분명하다…. 생산되는 어종은 은어, 복어, 광어, 방어, 대구, 문어 등인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평해의 이윤 효자비와 정려각.
평해의 이윤 효자비와 정려각.

#. 옛 평해의 특이한 사람들

이보다 12년 전(1580년)에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온 송강 정철은 평해 군수의 융숭한 영접을 받으며 관동팔경 중 여기 평해에 월송정과 망양정 두 곳을 자신의 감정에 취한 신선의 입장에서 노래했다. 반면에 아계 이산해가 54세 영의정에서 3년이나 평해에 귀양살이 하면서 쓴 ‘안주부전’은 이런 내용이다. “내가 황보리에 와서 우거하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차 왔는데 그 말석에 삿갓으로 몸을 덮었고 턱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한 자도 채 못 되는 사람이 있었다…. 아 참으로 매우 괴이한 일이다. 옛날에 한양서 보았던 그 여자도 여태껏 잊히지 않아 괴로운 터에…. 어쩌면 천지 사이에 사람으로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자가 둘이 있는데 내가 이들을 다 본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황보리에 산지 오래되어 그 사람됨을 알고 보니, 언어와 응대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민첩하였고 인사(人事)와 조백(早白)과 곡절들을 모두 마음속에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은 불구이지만 마음은 불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씨름을 잘하여 상대와 붙었을 때는 마치 모기가 산을 흔들려는 것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다가 비틀대는듯 상대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허리춤을 잡고 다리를 걸면 누구도 손길 따라 넘어지지 않는 이가 없어 비록 무인이나 장사라 할지라도 그를 이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들 넷을 두었다…. 아, 사람의 정신과 재기(才氣)가 육신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사람으로서 불구인 자로, 미치광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멍청이 등 이러한 사람들이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 그렇지만 또 육신은 멀쩡하면서 마음이 불구인 자들이 있으니, 이 둘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황보리에 살던 그 사람은 안(安)씨이고 이름이 응국(應國이다.”

귀양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그 지역사람들에게는 선진학문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이다.

사람은 관직이 승승장구하고 거침없이 잘 나갈 때는 사물을 세밀하게 보지도 못하고 사람의 향기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귀양 가면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죽음인데 고통과 외로움을 잘 승화시키면 훌륭한 문학과 예술이 잉태되는 것이다. 이산해도 평해에 와서 글씨와 문장이 더욱 깊이가 있게 되었다.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이지번이 귀양 왔던 평해 곽간의 집에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운명의 인연에 아버지가 벽에 쓴 시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토함 이지함의 조카로 정치적으로는 동인에서 대북파의 영수였지만 글씨와 문학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집 ‘아계유고’의 시 840수 중 483수가 평해서 쓴 것이다. 허균은 “초년에는 당시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고 평했다.
 

이산해가 쓴 해월헌 종택의 해월헌 글씨.
이산해가 쓴 해월헌 종택의 해월헌 글씨.

그러나 평해로 귀양온 그의 불행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큰 아들은 20세에 이미 요절했고, 이덕형(1561~1613년)에게 시집간 둘째딸은 왜적을 피해 자결했고, 며느리도 죽고, 넷째아들도 병으로 죽었다.

삼척부사 이사충의 아들 이윤은 어머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드리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드려 한 달을 연명케 하였고 아버지가 병이 위독하자 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몇 달을 더 살게 하고 3년 시묘 살이 했던 효자비가 있다.

이웃에 사는 안응준이란 일곱 살 아이는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손가락 잘라 피를 넣어 아침에 깨어났다고 이산해는 적고 있다.

1676년(숙종 2년)에 평해 출신 승려 처경(處瓊)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하다가 처형당하는데 평해 손도의 아들로 용모가 매우 수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일까?.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