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하면서 위압감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 흐르는 운봉관
웅장하면서 위압감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 흐르는 운봉관
  • 등록일 2020.09.22 19:02
  • 게재일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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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청송향교와 찬경루, 운봉관

유장한 아름다움의 운봉관.

청송, 청주, 청도는 이름만으로도 맑아 보이듯이 마을이나 도시의 지명을 보면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송하면 무언가 푸르고 맑아 보이는 이미지에다 주왕산, 달기약수, 주산지, 청송 심씨 등등이 연상된다. 청송 곳곳에 ‘산소카페’란 슬로건에 청송사과를 브랜드화 하고 있다. 관학인 향교는 고을의 중심에 있기에 반경 5리(2km)를 벗어날 수 없다. 청송향교는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그리고 세종의 왕비 소헌 왕비가 청송 심씨여서 청송은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 육지속의 섬 청송

청송은 동으로 영덕, 서로는 의성, 남으로는 영천. 북으로는 영양, 북서로는 안동으로 둘러싸인 육지속의 섬같이 고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주왕산의 독특한 산세와 맑은 기운 가득한 곳이다. 청송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란 뜻인데 풍속은 검소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며(尙儉率), 사람은 순박하고 습속은 순후하다(民淳俗厚)고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처량하게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는 가을을 재촉하고, 청송의 산과 들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송향교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청아루가 엷은 미소로 맞이하고 자신은 비스듬히 기울고 있는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통의 향교는 대문 겸 루가 있고 좌우에 동무, 서무에 중앙에 명륜당이 중심을 잡고 일직선으로 공자와 성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이 있는데 청송향교는 경사진 뒷산에 공간이 협소하여 옆에다가 지어놓았다. 그리고 대성전은 수리중이라 청아루부터 올랐다. 어느 읍면 도시할 것 없이 하늘로 치솟는 건물 때문에 시야가 막힌다. 2층 누각인 청아루에서 앞을 보니 오른쪽에 교회 철탑 두개가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린다. 기숙사인 동무, 서무, 명륜당 어디에도 유생들과 교관은 없고 푸른 풀들만 속삭이듯 바람결에 공자 가라사대(子曰), 공자 가라사대(子曰) 재잘거린다. 기둥 위에서 종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굵다란 들보들은 푸른 녹색 용들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건물의 이력을 말해주는 청아루 중수기가 여기저기 붙어있다.
 

찬경루와 운봉관.
찬경루와 운봉관.

조선시대 지방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목적으로 성현의 위폐를 봉안, 배향하는 향교는 중심 되는 관청 인근에 있다. 청송향교는 1426년(세조 8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06년(선조 39년)에 국동에 대성전을 건립했고, 1629년(인조 7년)에 부사 이구징이 강당과 동무, 서무 등을 보수, 중수했다. 그러다가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청아루는 1700년(숙종 26년) 부사 이상훈이 증축하고, 1869(고종 6년) 부사 이현기가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였고 1962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은 1975년 보수하여 지금 또 보수 공사하고 있었다.

명륜당이 향교건축의 중심이다. 이를 기준으로 모든 건축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기능 잃은 향교는 각종 예절교육, 충효 교육 등등을 부정기적으로 프로그램 하는데 청송향교는 ‘산소카페 청송에서 즐기는 풍류체험’의 플래카드가 텅빈 명륜당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위에는 지금의 청송군청이 온 청송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푸른 청송의 이미지답게 푸른 유리창문으로 해놓았다.

 

푸른용이 꿈틀거리는듯한 청송 향교 청아루 들보.
푸른용이 꿈틀거리는듯한 청송 향교 청아루 들보.

#. 청송 심씨 소헌 왕비의 본향, 찬경루와 운봉관

우리나라에서 왕비의 본향이라고 이런 귀한 대접을 해준 곳은 아마도 청송뿐일 것이다. 더구나 직접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단지 청송 심씨라는 본만 같을 뿐인데 이런 어머 어마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향교에서 내려와 청도의 중심부에 소헌 왕비의 이름을 딴 소헌 공원에 갔다. 예전에 처음 왔을 때 깜짝 놀랐다. 시골에 이런 큰 고택이 있다니 마치 종묘같이 길게 늘어선 건물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더구나 경주, 안동도 아닌 청송 산골에….

소현왕비(1395~1446)는 조선 27명의 왕들 중에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1397~1450)의 왕비인데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송을 받는 만큼 개인의 고통은 심했다. 소헌왕비의 아버지 심온(1375?~1418)과 할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으로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하고 있었다. 심온은 세종의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동생 심청은 처형당했고 자신은 의주에서 압송되어 수원고향에서 자결해야 했다. 태종 이방원(1367~1422)이 누구인가. 조선건국과 왕권이란 목적에 조금도 방해가 되면 형제들도 죽여 버리고 26살 때 56살 포은 정몽주(1337~1392)를 죽이고 조선의 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도 죽여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처남 민무규 형제 4명마저도 처형시키지 않던가. 18년 왕 하다 어질고 총명한 셋째아들 충녕(세종)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병권은 쥐고 있었다.

소헌왕후(1395~1446)가 14살에 12살의 충녕군과 결혼할 때는 3째 아들 세종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왕비가 되자마자 삼촌과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고 어머니는 종이 된다. 심온을 제거한 신하들이 태종이 죽고 나면 왕비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폐출을 주장했지만 왕비 심씨가 자손을 많이 나았으며 세종과 금슬도 좋다는 이유로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 자신도 처남 4명을 죽였지만 자신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는 왕비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시아버지 태종(이방원}이 죽고 4년 뒤(세종 8년)에야 아버지 심온의 명예가 회복되고 어머니도 신분이 회복된다.

태종은 외척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후궁제도를 법으로 정한다. 그래서 세종은 왕비 신씨에서 조선의 왕비와 후궁 전체에서 제일 많은 8남 2녀를 낳았고, 7명의 후궁에서 10남 2녀를 두었다. 태종이 법제화한 후궁제도는 양반가문에서 간택하게 했으나 세 번째 후궁부터는 출신을 따지지 않게 했다. 왕의 선택권을 넓혀주고 궁녀들도 간택될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무수리 출신 영조의 어머니 최씨도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친정이 쑥밭이 되고, 성군이었던 세종도 호색이라 7명의 후궁이 들어왔으나 속으로 곪아터지고 분노를 삼켰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질투는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세종대의 왕비와 후궁들은 겉으로는 분란이 없었다.
 

안평대군의 송백강릉 글씨.
안평대군의 송백강릉 글씨.

#. 친정의 몰락과 맞바꾼 현모양처

맨 앞에 2층 찬경루 건물에 갔다. 찬경루는 소현 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찬양한다고 1428년(세종 11)에 청송군수 하담이 건립하였고 화재로 불타자 1688년(숙종 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누의 이름은 하담의 청을 받은 당시 경상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 기문에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은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각에서 보광산에 있는 소헌 왕후의 시조 묘를 바라보면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이라 이름 지었다.”는 아부성 이름이다. 정면4칸 측면4칸 이층이니 16칸이 된다. 소헌왕후의 8왕자들이 각 2칸씩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지어낸 말이다. 막내 영응대군(1434~1467)은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잘 살려 지은 누이고 지방유생들의 백일장 장소로 사용했다. 송백강릉(松栢岡陵) 현판 글씨는 소헌왕후의 셋째아들로 시, 서, 화에 뛰어나 3절이라는 평을 받은 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인데 이 건물 지을 때는 11살이라 그 뒤에 쓴 것이다. 이 건물에서 바라보이는 보광산에 청송 심씨 시조 심흥보의 묘가 있고 저 앞의 용전천 냇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면 여기에서 묘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른쪽 옆에는 청송 심씨 유허비가 서있다. 그 뒤에 운봉관으로 갔다. 이 건물도 찬경루 지을 때 같이 지은 공공 숙박기능인 객사건물인데 굉장히 길고 멋있게 지었다. 서산에 비스듬히 길게 비친 건물 기둥의 그림자가 건물의 당당한 위용을 자랑한다. 웅장하면서 위압감을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한참을 맴돌다 사람 없는 넓은 청마루에 누워버렸다. 때마침 상큼한 바람이 불어와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린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소헌왕후는 짧은 행복 긴긴 고통이었을 것이다. 친정이 박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참담함, 아들 8명이나 낳았지만 다섯째 광평대군은 20살에, 일곱째 평원대군은 19살에 천연두에 걸려 죽는 아픔도 겪는다. 며느리 복도 없어 두 번이나 세자빈을 내쫓고 세 번째 세자빈은 아들(단종) 낳았지만 다음날 산후병으로 죽었다. 4남 임영대군과 막내인 8남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쫓아내었다. 특히 첫 번째 큰며느리 휘빈 김씨는 학문은 좋아했지만 여색은 별 즐기지 않는 남편(문종)의 사랑을 되돌린다고 좋아하는 여자 신발 뒷 굽을 잘라다 불에 태워 술에 타마시게 하거나 봄에 교접하는 뱀과 붉은 박쥐를 가루 내어 세자(문종) 몰래 먹였다. 이런 회괴한 일들을 시어머니 소헌왕후가 알게 되어 국모의 자질이 없다고 쫒아냈다. 두 번째 며느리 봉씨는 독수공방하다가 동성애(레즈비언) 하여 쫓겨났다. 소헌왕후는 온갖 영욕을 가슴에 담고 52살에 쓸쓸히 죽었다.

청송은 1418년(세종 원년)에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보배로운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하고 송생현과 합하여 청송군으로 개칭하였다. 1459년(세조 5년) 안덕현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 이곳 소헌 공원에서 청송→영양→봉화→영월로 걷는 240km 구간의 첫 출발지다. 입구에 청송고을을 다스린 수장들의 송덕비가 있는데 군수 장승원이 이 있었다. 치적이 교량신축인데 관찰사 시켜달라고 20만 냥(당시 관찰사 뇌물 값이 20만 냥) 들고 허위 의병대장에게 찾아간 칠곡 부호였다. 물론 받지 않았다. 허위는….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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