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
  • 등록일 2020.09.01 18:38
  • 게재일 2020.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5. 영덕 괴시리 마을과 영양 남씨

내려다본 괴시리 마을.
내려다본 괴시리 마을.

지금의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온갖 것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정착 농경시대는 땅이 최고의 가치이고 하늘이었다. 그래서 봉건사회의 모든 전쟁은 땅 따먹기 싸움이었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에 즐비한 기와집들은 오늘날 강남의 빌딩숲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경제적 기반의 물적 토대는 인근에 풍산들판과 안강 들판이었듯이, 영덕 수창면의 기와집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영덕 영해면의 괴시리 마을도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벌판 덕분에 물질적 토대가 형성된다.

괴시 마을은 고려 말에 함창 김씨가 처음 살았고, 조선 중기(명종 때)에 수안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살다가 1630년(인조 8년) 영양 남씨들이 정착하였다. 남씨들 세력이 강했는지 다른 성씨들은 떠나고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향에서 남향으로 옮겨지은 괴정.
서향에서 남향으로 옮겨지은 괴정.

#. 동해변의 영덕 괴시리 마을 가는 길

사람은 밥만 먹다가 때론 라면과 피자도 먹고 싶고, 산골에 있다가 간혹 넓은 바다를 보고도 싶어진다. 안동은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옮겨온 고택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아 아직도 안동에 남겨둔 것이 많아 발목이 잡혀(?) 전국으로 못 나가고 있다. 조금 잠잠해지던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여 온 나라가 어수선하여 광활한 바다를 품어보고 안기기도 싶어 동해변의 영덕 영해의 괴시리로 출발했다. 경주에서 영덕 가는 길은 자꾸만 일직선 도로를 만들어 산이 해안가에 붙어있는 지역 빼고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아쉬웠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흥해를 지나자 도로 옆 언덕에 흥해 향교가 그 옛날의 영화를 안고 힘겹게 앉아있다. 더구나 코밑에 차가 쉼 없이 주야로 달려 고통이 심한데다 조금 지나자 길가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마을’ 팻말이 더운 여름의 코로나 만큼이나 감동을 못주고 서있다. 그러나 주위의 넓은 벌판이 푸른 춤을 추어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곧이어 청하가 나온다.

청하는 지금은 포항에 편입되었지만 예전에는 현으로 포항보다는 한 수 위였다. 청하초등학교 자리가 청하현 관아 자리였다. 거쳐간 현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현감 한 것에 주목한다. 관념의 중국 산수화에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인왕제색도’ ‘금강산전도’등의 진경산수를 그려 한국회화사에 큰 획을 긋는다. 그가 청하현감 할 때 인근 송라면의 내연산을 찾았던 흔적이 제3폭포 움푹 파인 바위에 ‘갑인추 겸재 정선(甲寅秋 謙齋 鄭善)’의 조그마한 석각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각인된 스타일로 예행 연습한 결과 걸작 ‘금강전도’가 완성되는 뜻 깊은 곳이다.

청하에서 영덕까지는 해안가라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를 곁눈질하며 올라갔다. 온통 대게간판과 ‘블루영덕’의 알림판이 푸른 영덕과 연결된다. 이 해안 길을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 해안 걷는 길을 ‘해파랑 길’이라 하는데 경주 구간 해파랑 길을 ‘감포 깍지길’이름을 붙이듯이, 영덕 해파랑 길도 ‘영덕 블루로드’로 부른다. 이 해파랑 길(동해안 전체구간)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 때 필자가 자문위원 하면서 최대한 해안 절벽에 붙여서 만들라고 자문해 준 기억이 새롭다.

대게로 유명한 영덕이지만 울진 분들은 실제 대게는 영덕보다 울진에서 더 많이 잡는데 영덕이 선점했다고 아쉬워한다. 마치 고래하면 울산인데 실제 포항이 고래가 더 잡혀(공식적으로는 포경금지인데 그물에 잡히거나 등등으로 고래 고기는 끊어지지 않는다) 한 마리 1억 넘는 밍크 고래를 울산의 큰 상인들이 포항서 구매하여 울산서 판매하는 것과 같다.

영해 괴시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청량한 매미소리가 더운 여름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영양 남씨 종택.
영양 남씨 종택.

#. 고택에 백일홍 붉게 물들고

마을 시작되는 남쪽 끝에는 영해중고등학교가 높게 서있다. 주차장엔 이색의 시비와 영양 남씨 종친회서 만든 비가 세워져있고 영감댁 고택이 제일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 전체를 조망하고 마을을 둘러보기로 하여 이색의 산책길로 접어들었으나 수풀이 무성하여 발길을 돌려 마을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마을은 예전보다 많이 가꾸어져 있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천천히 나그네 되어 이집 저집 살펴보았다. 몇몇 집들은 숙박도 하고 간단한 차도 팔았지만 코로나 여파로 개점휴업이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그래도 집안에 간간히 붉은 백일홍이 8월의 마지막 여름의 정열을 불태우며 고택에 생기를 넣어주고 있었다. 천전 댁(내 앞 댁) 고택은 손님 받는 집답게 집 곳곳을 정갈하게 잘 관리해 놓아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둘러보았다. ‘ㅁ’형의 전형적인 북부지방의 형태지만 사랑채를 높게 올려 지어 별도의 독립된 집같이 해놓았다. 석류가 탐스럽게 붉음을 토하고 그 옆에 능소화도 주황색 꽃으로 은근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본채에서 중문을 거치지 않고 마당 끝의 텃밭으로 드나드는 조그마한 쪽문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간다. 150년도 안된 1876년에 지었지만 집과 마당과 텃밭의 규모가 이상적이라 선비가 유유자적하며 살만한 집이라 더욱 정감이 갔다.

1600년대에 괴시 마을 입향조 남두원의 장남 남붕익이 지었다는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은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러나 문들을 새것으로 많이 수리해놓아 고택의 맛이 덜했다. 그 앞의 물소와 고택은 길고 개성 있게 지었는데 내부전체를 수리 중이라 어수선했다. 산 오르는 길옆에 경주댁은 남아있는 괴시 마을의 고택들이 남씨들이 지은 것인데 반해 먼저 입향 했던 수안 김씨가 살았던 고택이다. 대문채가 천전댁과 같이 별도로 되어있다.

마을 중간에서 산 위로 올라 마을과 넓은 벌판이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을 조망했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 저편은 장수면으로 인량 전통마을이다. 고려 때 나옹화상의 고향이고 조선중기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내로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 그리고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곳이다.

 

정리 잘된 천전 댁 고택.
정리 잘된 천전 댁 고택.

#. 옮겨지은 괴정과 영양 남씨

산에서 내려와 다시 북쪽으로 백희재 고택부터 살펴보았다. 구계댁 사랑채 고택 방향이 특이하다. 보통 사랑채는 안채의 방향대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안채가 서향이라도 ‘ㅁ’자로 감싸서 서향의 단점이 보완되지만 사랑채는 그대로 노출되어 긴긴 여름 햇살이 힘들게 하기에 사랑채는 남향으로 앉히고 서향의 측면도 판자로 막아버렸다. 주인의 실용적인 감각이다. 이와 같이 예전에는 집주인이 건축가였다. 혜촌 고택은 사랑채의 높낮이로 변화를 주면서 돌출 시킨 집주인의 낭만이 보인다.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정자를 지은 괴정 남준형이 지은 대남 댁도 개성 있게 지었고, 북쪽 끝의 영은 고택은 다른 고택에 비해 멋스럽게 지어 눈 맛이 상큼하다. 북쪽 마을 앞에는 고려 말의 의식 있는 문장가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두 분의 유적을 추모하는 유허비를 세워 놓았다. 이 유허비는 1796년(정조 20년)에 경상감사 이태영이 영해부사 황은에게 세우게 하였고 마멸이 심하여 1971년 영해군수 이상복이 괴시 마을 남영종의 도움으로 새로 세웠다.

남씨의 시조는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 남민(南敏)으로 시작하여 고려 중기에 와서 의령, 영양, 고성 남씨로 분파된다. 괴시리 입향 조는 앞에서 말한 대로 남두원 이래로 지금까지 400여년을 이어온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문향을 간직하면서 고래등 같은 특출한 고택은 없어도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들로 오랜 전통을 이어온 것에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문필의 분위기라 영양 남씨들도 여러 문장가가 배출되는 자양분이 되었다.

이 마을에서 옮겨온 고택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생가 터에 옮겨 지은 고택이 있고, 유허비 옆에 괴정이 있다. 이 괴정은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 남준형이 이곡과 이색 부자의 유허지에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연못을 앞에 둔 서향이었으나 1817년(순조 17년) 괴정을 중건하면서 지금과 같이 남향으로 옮겨지었다.

이 괴정을 지은 남준형의 글을 보면 밭 갈고 씨 뿌리는 전원생활하면서 담담한 선비로서의 이치를 깨달은 삶을 살았던 분 같다. 괴정 앞에 있는 ‘삼을 심으면서’ 시에는 “삼 심고 밤새도록 비가오니/…. 괴화나무 아래에 앉아 시를 읊네 / 전원에서 늙은 계획 이루어졌으니/ 이로부터 그 계획 어기지 말기를.”

‘늙음을 읊으면서’에서는 “총명은 유한하나 이치는 무궁한데/ 부질없이 책속에서 예순 살 늙은이 되었네/ 요즘 다시 천화(天花)가 책상 가득 떨어져/ 흑백을 가져다가 청홍으로 바꾸었네” 행장에서는 “맑아도 풍속과 괴리되지 않고/ 개결해도 남을 끊어버리지 않으며/ 청렴한 상처를 입히는 데에 이르지 않고/ 주밀해도 인색한데에 이르지 않으니 참으로 문무의 재능이 온전하다” 하였다. 묘갈명에는 “늙고 병들고 곤궁한 어른을 집에 맞아 모시돼 아버지처럼 섬겼다. 곤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도와주었다. 이를 미루어 노인을 편안히 모시는 양노회도 만들었다. 영해부에 자금이 서리의 사유재산으로 돌아가자 괴정공은 두, 세명의 향 중 노성한 이와 함께 고루 절약하여 주민들에게 세금을 덜어 주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선비가 곡진히 삼가는 그런 무리들과는 달랐다.

특히 행장과 묘지명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응축해 놓은 것이다. 괴정 남준형은 크게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뜻과 글이 좋고 참다운 선비 같아 그의 글을 음미하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