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꿈꾸던 소년, 대구 예술계의 ‘키다리아저씨’로
화가 꿈꾸던 소년, 대구 예술계의 ‘키다리아저씨’로
  • 등록일 2020.06.22 20:13
  • 게재일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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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천영애의 대구·경북 人
“평생 업으로 알고 힘닿는 데까지 후원할 생각입니다”

대구 문화예술계의 후원자이자 기부자로 살아가는 신홍식씨. 대구 중심가인 종로에 한옥 ‘한국의 집’을 지어 전시장 및 모임 장소로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전창욱 사진작가 제공
대구 문화예술계의 후원자이자 기부자로 살아가는 신홍식씨. 대구 중심가인 종로에 한옥 ‘한국의 집’을 지어 전시장 및 모임 장소로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전창욱 사진작가 제공

그를 만나기 위해 한국의 집으로 찾아간 날,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분홍빛 차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강렬한 여름 햇살을 거르기 위해 쳐진 차양 사이로 키 큰 은행나무 이파리가 흔들렸고, 마당은 한바탕 잔치를 벌일 듯 흥겨워 보였다. 저렇게 분홍빛으로 차양을 드리우기가 쉽지 않은데 역시 미적 감각이 탁월한 그의 안목이 돋보였다. 그 차양 아래 앉아 집을 둘러보니 한옥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에 눈길이 갔다. 글씨는 마치 춤을 추듯 한옥의 기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구의 중심인 종로에 품격을 더하며 날아갈 듯한 처마를 올린 한옥인 ‘한국의 집’을 지은 이는 대구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는 신홍식씨였다. 그에게 주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대구 중심 종로 ‘한국의 집’ 운영 신홍식 씨

IMF때 어려운 이웃에 쌀 기부 시작으로
오피스텔 한 층 통째로 화가에 내어주는 등
지역 문화·예술계 후원자로 이름 알려져
동시 작가·아동문학회 회장직 다양한 활동

“추사의 글씨지요. 글씨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저 글씨 한번 보세요. 저건 추사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거예요. 추사는 세 번이나 유배를 갔는데 그때마다 글씨가 많이 달라졌어요. 저 주련은 여덟자 병풍으로 된 한시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이 종로 골목에 전각을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각자를 했어요.”

한국의 집에는 주련 말고도 소소하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다. 근대골목투어 제2길인 진골목은 대구의 거부였던 정병국의 집이었던 정소아과를 비롯하여 달성 서씨들이 세거(世居)하던 곳이다. 정병국의 사촌인 서재균이 약 100여 년 전에 지은 한국의 집 안채는 살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려서 리모델링을 했다. 당시만 해도 귀하던 실내 화장실과 굵은 대들보, 아궁이, 마당의 우물 등은 그대로 두었다. 진골목을 낀 담장에는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수원)현륭원으로 장엄한 행차를 하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화성반차도’가 있다. 퇴색을 막기 위해 1300도의 고열에 두 번씩 구워 67장의 도자기에 전사(轉寫)한 이 그림에는 약 1천500여 명의 사람과 570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전부 달라 가치를 더한다. 이 힘들고 어려운 작업을 해서 골목 담에 전시한 내력을 그에게 물었다.

“우리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융숭했던 게 영·정조 시대잖아요. 이 그림은 그때의 화려한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은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 있으니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가 무척 어렵죠. 전 세계적으로 돌아봐도 이 그림처럼 화려한 그림이 없어요. 이런 대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죠.”

한참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박스를 열자 동그란 접시에 화성반차도 그림 한 부분이 그려져 있었다. 화성반차도가 그려진 컵과 함께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갑자기 그림이 내 안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사업을 잘 하던 그가 갑자기 예술 쪽으로 인생을 바꾼 것은 평생 돈벌이에 매이기 싫어서였다. 마침 그가 납품하던 금성사와 오리온 전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무렵 그도 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뭘 할까 궁리하던 그에게 공장이 있던 대구 달서구의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선 매달 20kg짜리 쌀 10포를 사서 이웃돕기에 나섰다. IMF 때라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질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쌀 기부는 현재 매달 80포까지 늘어나며 그에게 ‘쌀 배달 아저씨’라는 별명을 선사했고, 그 공로로 2017년 대한민국 자원봉사상 대상인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그는 어릴 때 화가를 꿈꿨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다른 길로 가서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며 산다. 그도 사업을 그만두고 불우이웃돕기를 시작하면서 어릴 적의 꿈으로 눈을 돌렸다. 새롭게 화가의 길을 걷기는 어려웠고, 화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작업실이 필요했지만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더 이상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 공장을 비워줬다. 그러나 공장을 작업실로 쓰기에는 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성안오피스텔의 한 층을 통째로 구입하게 되었고 그곳을 화가들을 위해서 무료로 내놓았다. 20개의 방이 있는 560평의 공간이었다. 작업실이 필요했던 화가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구 예술계의 후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화가의 꿈은 후원자와 컬렉터로 변형되어 이루어가고 있었다. 현재 그가 소장한 그림은 이응노의 작품을 비롯하여 장욱진, 김창열, 이대원 등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100년이 넘은 한옥을 구입했을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옥미술관을 지을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건축을 시작하자 예상치도 못했던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건물 지하에 넓은 미술관을 짓고자 했던 그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언젠가는 한옥에서 상설전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은 그늘에 있을 것이 아니라 밝은 바깥으로 나와야 가치를 더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동시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구의 대표적인 아동문학회인 혜암아동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019년에 동시 전문 계간지 ‘동시발전소’를 발행했다. 전국에서 동시 전문지는 ‘동시마중’과 ‘동시먹는 달팽이’, ‘동시발전소’ 3개뿐으로 대구라는 지방 도시에서 동시 전문지를 발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동시에 대한 애정이 이 일을 이루게 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 작가이기도 한 그는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동시가 활성화된 대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랬지만 지금 어른 세대들은 어릴 때 변변한 공연 문화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고작해야 영화를 보는 것이 문화생활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도시에 살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문화예술을 접하고 자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역에서 조금만 후원해 주면 문화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는데 신씨는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생 업으로 알고 힘닿는 데까지 후원할 생각입니다.”

100년은 넘었을 듯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동시를 말하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대구는 우리나라 동시의 태동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동시가 발전해 왔죠.”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후원도 하고 자리도 맡게 되었지만 그는 역시 동시 작가였다.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업으로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잘 살기에만 골몰하는 세태임에도 신씨는 그런 욕망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는 듯이 보였다.

은행나무가 한옥의 처마와 어울려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허공의 분홍 차양이 한들한들 바람을 만들어내는 동안 마당에는 시민들이 차츰 들어와 앉았다. 카페를 하는 안채의 손길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안채 옆에는 전통혼례 때 사용하는 가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아궁이가 있는 처마 아래에는 목조건물의 화재를 막기 위한 드무가 녹이 슨 채 놓여 있었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 그가 만들고 싶은 삶인지도 모른다.

천영애시인
천영애시인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잖아요. 나도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 쌀 봉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청소년들에게 문화로 봉사하는 길을 찾아보고 싶어요. 문화는 지금 심각해져 가는 사회적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여건을 만들어가야 해요. 그러면 사람들의 인성도 좋아질 거고, 사회적 갈등도 해소될 거라고 생각해요.”

은행나무 아래에는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공예작품이 놓여 있었다. ‘I LOVE’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아버지가 석물 공장을 했는데 나도 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았는지 저 정도는 만들 줄 알아요.” 수줍게 웃는 그의 눈가에 자잘하게 주름이 잡히면서 천진스러운 아이의 표정 같은 웃음이 묻어났다. 예술가로 살지는 못했지만 예술컬렉터로, 예술후원자로, 대구의 기부자로 살아가는 삶이 그를 만족스럽게 하는듯했다.

본지가 창간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연재할 ‘시인 천영애의 대구·경북人’은 ‘사람’을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와 예술, 사회와 경제를 밀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기획됐다. 필자인 천영애 시인은 대구문학상 수상자로 ‘무간을 건너다’ ‘나무는 기다린다’ 등의 시집을 냈고, 다양한 매체에 문화예술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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