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최고의 격전지이자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한 호국도시 포항과 이를 증명하는 충혼탑, 충혼비, 전적비 등 수많은 역사적 자원을 재조명하고 그것을 지역의 관광의 자원으로 삼아 포항시민의 자부심을 드높이고 그것으로 다시 포항이 재도약하는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이다. 사진은 지난해 8월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 충혼탑에서 거행된 제63회 전몰학도의용군 추념식 모습. /포항시 제공

작년까지 매년 6월이 되면 그 전 달부터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었다. 이는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은행이 1950년 6월 12일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년 6월에는 창립기념 지역경제 세미나를 개최하여왔다. 하지만 올해에는 다소 느낌이 다른 6월을 맞이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해 각 기관들도 행사를 취소 내지는 연기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함께 호흡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6월은 한국은행만 기념하는 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포항시민들에게도 6월 12일은 매우 특별한 날로 기억되고 있다. ‘시민의 날’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1962년 6월 12일 포항항이 국제무역항으로서 지정된 것과도 관련된다. 국제무역항으로의 지정은 포항시민들이 오랫동안 고대하였던 것이기에 당시 포항시에서 이날을 ‘시민의 날’로 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포항항이 외국과의 무역선이 오갈 수 있게 개항한 것은 이미 100년 전인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항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을 개시한 때부터다. 해방된 이후 포항시가 적극적으로 지정항 선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지만 의외로 국제무역항 지정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또 6월 12일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포항의 대표적인 축제인 ‘국제불빛축제’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벌이는 것은 ‘불꽃축제’인데 왜 포항은 ‘불빛축제’라고 할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필자도 처음에는 잘못 적은 것이라 여겼었다. 2004년 포스코가 포항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영일만을 상징하는 ‘빛’과 제철소의 용광로를 상징하는 ‘불’을 주제로 불꽃 쇼를 기획한 것이 지금까지 ‘불빛’ 축제로 이어져 온 것이다.

내친김에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 거슬러 과연 6월에는 포항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지를 조사해 보았다. 다양한 단체가 있지만 6월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는 포항우체국을 제일 먼저 꼽고 싶다. 포항에 우체국이 들어서게 된 것은 1905년 6월 9일 연일에 ‘임시우체소’가 설치된 것이 최초다. 그리고 4년 뒤인 1909년 6월 1일에는 포항의 연일 우편취급소에서 처음으로 전신업무를 개시하면서 이름도 ‘포항우편전신사무취급소’로 개칭되었다. 포항우체국과 6월은 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포항시민들의 우체국 사랑도 남달랐던 것 같다. 6·25전쟁 기간 동안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포항우체국(지금의 중앙동 우체국)을 재건하기 위해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1952년 4월 포항시민들은 1천만 원의 성금을 모아 당시 체신국에 포항의 우체국과 통신 시설을 재건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결국 성사시켰다.

이외에 6월에 벌어졌던 사건들은 수없이 많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통감부 시절인 1908년 6월 11일에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영구지배할 목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해류조사를 위해 영일만 동쪽 15리 해상(위도 36.8도, 경도 129.45도)에서 위치를 기록한 병 10개를 처음으로 바다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후 해류조사는 계속되어 1922년 종합보고서가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영일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미 그들은 알았던 것 같다. 110년 전인 1910년 6월 10일에는 지금의 청하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천일학교가 개교하기도 하였다. 포항의 교육열이 최근 높아진 것이 아니다. 교통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1919년 6월 25일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학산역이 영업을 개시한 날이며, 1945년 6월 10일에는 포항과 부산진 간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그에 앞서 1924년 6월에는 포항과 구룡포 간, 포항과 영덕 간 자동차 여객노선이 정기 운행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10일에는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서거하면서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6·10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달 30일에는 박문찬 목사가 흥해 예수교 예배당에서 흥해청년회를 발족시킨 후 본격적인 애국 계몽운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24년 6월 4일에는 포항청년단이 창립되었으며, 1933년 6월 4일에는 포항체육회 주관으로 당시 남빈동에 있었던 공설운동장에서 포항시민 대운동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지난해 3·1만세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80년 전인 1940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흔들고 전쟁에 필요한 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던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던 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포항에서 맞는 6월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사실 6월 첫 주가 되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6일 현충일은 국기를 조기로 거는 날 정도로 여겼다. 정부가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삼은 것은 6·25전쟁으로 인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ㆍ보훈의식,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크게 통감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올해의 6월은 조금 달라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6·25전쟁 기간 동안 포항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와 희생들에 대한 사료와 기록들을 모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포항의 6·25전쟁사(포항 6·25)를 집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료수집을 위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노병의 눈물과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지식으로만 존재하였던 6·25전쟁이 심장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반도는 국제법상으로는 평화지대가 아닌 전쟁이 일시 휴전상태인 채로 70년이 지났다. 올해의 6월은 그런 달이다. 특히 포항시의 경우에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한두 달 만에 대한민국의 마지막 영토를 수호해야 하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로서 형산강을 남북으로 두고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형산강 이북에는 공중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해 교회 건물 하나 외에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엄청난 희생을 겪었다. 그러하기에 포항인들에게 6월은 단순히 현충일이 있는 달이 아니라 지금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고통을 느끼기에 가급적 6월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분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만 한다.

포항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다. 아예 산 이름조차 ‘탑산’이라 바꾸어 부를 정도로 6·25 전쟁과 관련한 전적비, 충혼비, 충혼탑들이 들어서 있는 도시인 것이다. 포항시민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분이 당시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항만이 가진 소중한 유적이고 유산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온갖 산책로를 만들며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풍광이 좋은 길이거나 둘레길일 뿐이다.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길의 하나일 뿐이다.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였고, 다시 북진하는 대반격의 출발지였기에 ‘혈산강(血山江)’이라 불렸던 형산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포항시민들이 자부할 수 있는 증거들이 탑산을 비롯한 도시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다. 포항은 당당하게 다크투어리즘으로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서로 연결하여 탐방하고 생각하며 호국 영령을 기릴 수 있는 그 ‘길’이야말로 어느 지자체도 따라 할 수 없는 포항 고유의 ‘길’일 것이다.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